너 좋아한 적 없어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영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W.G.)의 소설들을 사기 위해 중고책방에 들렀다. 공간은 시원했으며 사람도 없었다. 달랑 목표했던 책만 사가지고 나오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만화라도 한 편 읽고 오자고 마음 먹고 집어든 책이 바로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라는 만화였다.

 

숙인 리가 누구인지 그 사람에게 헌정한다는 어쩌구의 문구가 있었고. 나중에 말미에 적은 노트를 보니 아마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만나던 사람이었는지. 관계는 사라지고, 글과 기록은 영원할지니.

 

만화의 주인공 체스터는 누가 봐도 뻔한 작가의 페르소나다. 십대 소년으로 어머니의 말은 드럽게 듣지 않으며, 심부름도 간단하게 거부하고 주일 교회 복장도 거부하면서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 땐 다들 그랬지.

 

특이한 것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또래들(예나 지금이나)과 달리 소년 체스터는 C8이라는 단어에 혐오라도 가지고 있는 듯, 절대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가 그 말을 사용하게 하려고 내기까지 걸 판이다. 그냥 냅두면 안되나? 나와 다른 꼴을 보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최근 터진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폭력이 연상되기도 했다. 우리의 체스터에게 물리적인 폭력이 가해지진 않았지만, 친구들의 놀림도 일종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나도 체스터처럼 십대 시절에는 누구 못지 않게 음악을 들었던 지라, 체스터가 관심을 보이는 밴드 이름이 눈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레드 제플린을 필두로 해서, 키스와 데이빗 보위 아마 비틀즈는 이미 유행이 지났던 시절이지 싶다. 캐나다 터론토 인근의 샤토게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체스터의 이야기에는 어디에서나 비슷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심지어 엄마조차!), 관계 형성도 쉽지 않은 그런 시절의 경험담들.

 

나의 감정도 추스르지 못하는 판에 누구의 감정을 어루만진단 말인가. 오랜 고민 끝에 스카이란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진전이 전혀 없다. 체스터는 여전히 피터와 존(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같은 찌질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심한 관계이겠지만, 당시 그에게는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그런 친구들이지 않았을까.

 

그런 어느 날 어머니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떠나시고, 체스터는 여행을 떠났지 아마. 아버지와 같이 어머니 병문안을 간 체스터는 어머니의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을 찾아온 스카이의 데이트 신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디 깎는데만 열심인 체스터. 에라 쪼다 같은 자식아.

 

왜 그렇게 불필요하게 흥분을 하냐고? 왜냐하면 나도 그 시절에는 체스터 같은 쪼다였기 때문이다.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주체할 줄 몰랐고,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정말 엉성했었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도약의 시간들이 되었어야 할 중요한 시간에 그놈의 입시라는 지옥문을 통과하기 위해 씨잘데기 없는 시간들이 녹여야했지. 생각할수록 아쉽고 억울하고 뭐 그렇다. 몇 년 뒤에 다시 돌아온 비슷한 시기에도 달라진 게 없었지. 요령만 늘었을 뿐. 무언가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의 내 삶과 달라졌을까? 아마 그렇지도 않았으리라.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고 넘기지 않았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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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7-1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고 넘긴다면 위로가 될 듯합니다. 저도 사실은, 이번 인생은 만족스럽지 않아...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인생 설계라는 것 자체가 없이 살았기 때문이에요.
이십 대 젊은 시절에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게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아까운 시간들이었어요. ㅋ

레삭매냐 2020-07-12 08:48   좋아요 1 | URL
정말 공감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네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구나...

지금이라도
주어진 시간 동안에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