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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콘의 춤
로맹 가리 지음, 김병욱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3월
평점 :

때는 일천구백육십육년, 22년 전인 1944년에 신의 가호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모이셰 콘, 별명은 징키스 콘인 폴란드 출신 유대인 희극배우가 지금은 독일 리히트에서 일급 경찰서장으로 활동 중인 샤츠헨(귀여운 보물)이 이끄는 SS분견대에 잡혀 총살당했다. 징기스 콘은 유대 귀신이 되어, 지난 22년 동안 샤츠헨에게 늘러 붙어 살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희귀한 스토리로 시작되는 로맹 가리의 소설 <징기스 콘의 춤>은 망상적 매력을 발산한다.
콘과 같이 사로잡힌 다른 유대인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걸출한 희극배우는 절대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SS 총살대에게 감자를 먹이고 엉덩이를 까보이며 마지막으로 유대식 유머의 정수를 선사해 주었다. 참, 다시 현대로 돌아와 잘 나가는 경찰서장 샤츠헨은 지금 자신이 관할하는 가이스트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 해결에 몰두하고 있다. 자그마치 22명이나 되는 이들이 뒤에서 백스탭(back stab)으로 심장이 찔려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지상 최고의 황홀경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살인사건에 대한 미스터리만큼이나 과연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유대 귀신과 연쇄살인사건을 <징기스 콘의 춤> 속 내러티브의 두 축으로 삼았단 말이지.
디부크(Dybbuk)라는 이디시 어로 사악한 악령이 되어 샤츠의 곁에 머물러 있는 존재 징기스 콘은 로맹 가리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 중의 하나인 유대인 특유의 자기파멸적 유머를 상징한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유럽 유대인의 절멸 가운데 일정 정도는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부분도 소설에 등장한다. 대가는 소설적 장치로 샤츠의 알코올성 섬망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전개를 반복한다. 연쇄살인의 범인은 귀족 부인 릴리와 바람이 나서 가이스트 숲으로 튄 사냥터지기 플로리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가가 특이한 존재다. 파리며 나비 같은 벌레들이 가까이에만 가도 바로 죽는 게 아닌가. 독자는 <징기스 콘의 춤>(유대 민족의 호라 춤을 의미한다)을 읽으면서 플로리앙이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사신(死神)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릴리는 그의 도구로 이용되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해야 할까. 하나 같이 바지를 벗고, 천상의 무언가를 본 표정으로 심장에 칼을 맞고 죽은 남자들. 뒷마무리는 당연히 사신이 맡았다.
그나마 첫 번째 장인 <디부크>의 내러티브는 따라갈 수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가 구사하는 망상을 넘어선 섬망에 가까운 스토리텔링은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든다. 사신 플로리앙은 이디시 사람들 600만, 스탈린그라드 30만 같은 숫자로 지난 세기 전 세계를 휩쓴 자신의 활동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한편, 아름다운 릴리가 모나리자를 필두로 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예술 작품으로 변주되는 장면, 2000년 전에 이미 획기적인 죽음으로 종교(기독교)가 탄생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신성모독(blasphemy)에 가까운 구성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이스트 숲에서>는 샤츠를 따라 다니던 징기스 콘이 플로리앙/릴리 커플에 빙의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바르샤바 게토 출신 몽상가이자 냉소주의자로 분장한 이디시 희극배우의 변신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수난 대신 지상의 낙원 타히티로 간다고 했던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가의 좌충우돌 내러티브에 혼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 디부크가 쓰인 것인가.
로맹 가리가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자기파괴적인 유머를 차용했다면 격렬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맹 가리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에 프랑스의 영토해방을 위해 싸운 레종도뇌르 3급 훈장에 빛나는 전쟁영웅이 아니었던가. 소설이 쓰이던 1966년은 패전국 독일이 마셜 플랜의 세례와 소련의 서진에 맞선 서구진영의 최전선에서 이른바 강력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탈나치즘 이후 처음으로 극우정당이 등장하기도 했다. 로맹 가리가 소설의 곳곳에서 지적하듯이, 홀로코스트라는 문명 유럽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가는 경찰서장 샤츠가 전후 프랑스 외인부대로 활동하면서 신분세탁에 성공했듯이 독일의 유대화 혹은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동시에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유대인 배척주의도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되었다. 로맹 가리의 조국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겪지 않은 신세대들이 유대인을 배척하는 풍토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디부크 징기스 콘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죽음에 몰어 넣은 샤츠와 공존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처럼 유럽에서의 정치경제적 상황 역시 스키조프레닉했던 게 아니었을까. 로맹 가리가 구사한 문학적 전개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멸절계획의 책임전가 같이 예민한 이슈에 대한 작가의 사유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과 샤츠가 그렇게 두려워한 비누가 과거의 문제였다면, 현재의 문제는 베트남전쟁이었다. 희극배우 징기스 콘은 연쇄살인의 현장 가이스트 숲에서 느닷없이, 백인과 흑인 그리고 멕시코인들이 투입되어 베트남 인민들과 무력투쟁을 벌인 베트남의 정글로 공간이동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좀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는 나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사신의 활약은 오라두르쉬르글란, 리디체, 트레블링카 그리고 미라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 재래식 학살이 주를 이루었다면 현대전쟁에서는 핵폭탄과 수소폭탄까지 동원한 그야말로 절멸이 현실화되지 않았던가. 7억 중국인들과 전쟁이 멀지 않았다는 종래의 구태의연한 황화론에 대한 불안감과 작가의 인종주의적 시선이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점들도 눈에 띄었다. 그냥 로맹 가리식 자기파멸적 유머로 퉁치기엔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이런 정신분열적 책을 완독해낸 내가 다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초반은 흥미진진하고 재밌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좌표를 잃은 양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꾸역꾸역 읽다 보니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런 게 로맹 가리식 블랙유머라고 한다면,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7권 남았다. 나의 로맹 가리 읽기는 계속된다.
[뱀다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2차세계대전사 <히틀러의 최정예 전차부대, 다스 라이히>에서 다룬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지 못했다면, 프랑스인 로맹 가리가 왜 그렇게 자신의 작품에서 오라두르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리디체는 <새벽의 7인>을 통해 알게 됐다. 이래서 책과 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