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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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당하게 최애하는 작가라고 말하는 작가 중의 하나가 바로 로베르토 볼라뇨다. 고작 반세기를 살고 지구별을 떠난 볼라뇨는 천재작가가 그렇듯, 살아서보다 사후에 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작품은 바로 11년 전에 나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었다. 그후 꾸준하게 그의 책들을 읽었고, 사 모았다.

 

얍삽하게도 단편 소설이나 소설집들은 섭렵했지만 정작 대작인 <야만스러운 탐정들>, <2666>은 아직 읽지 못했다. 전자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후자는 1권과 2권까지는 읽었지만 3권에서 멈춰서 있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나. 비슷한 궤도로 <3제국>89쪽까지 읽었더라. 샀지만 읽지는 않았다는 죄책감에 어젯밤에 책을 집어 들었고 가뿐하게 전에 읽었던 부분을 돌파했다. 이거 왜 이렇게 재밌지. 역시나 책은 읽을 때가 있는가 보다.

 

전략 게임 <3제국>의 챔피언 게이머 우도 베르거는 애인이자 자기 행복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잉게보르크와 함께 유년 시절 부모님과 함께 즐겨 찾던 스페인의 바닷가 휴양지 코스타 브라바를 찾는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25세 청년 우도는 아름다운 애인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시샘을 즐기며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함께 델 마르 호텔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긴다. 다만, 잉게는 우도의 게임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흠이라고나 할까.

 

떠오르는 전략 게임의 스타 우도는 다양한 잡지에 게임에 대한 글을 기고하는데, 쾰른의 어느 출판사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글쓰기를 가다듬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 <3제국>의 내레이터인 동시에 주인공인 셈이다. 휴가지에서 만난 찰리와 한나 커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외톨이 같은 성격의 우도는 그들과 어울려 술집과 디스코텍에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게임판에서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걸 더 선호한다.

 

전쟁마니아가 아니라면 전혀 들어 보지 못했을 제프 디트리히나, 파울 하우저, 하인쯔 구데리안 그리고 폰 만슈타인 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기갑군을 이끌었던 맹장들의 이름을 보니 왜 이리 친근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세계에 블리츠크리크로 알려진 세계대전 개전을 알린 폴란드 전역의 백색작전, 바로바로사 작전, 튀니스와 비제르테에서의 소모전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니 나름 마니아로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들이 어쩌면 다시 읽게 되었을 때, <3제국>의 매력 포인트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볼라뇨의 끝없는 관심의 끝이 어디였을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우도와 찰리 커플의 잔잔한 세계에 스페인 현지의 로보와 코르데로 그리고 화상으로 괴물 같은 얼굴의 페달 보트 업자 케마도가 서사에 참여하면서 서스펜스와 스릴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로보와 코르데로 듀엣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지중해의 태양을 상징한다면, 독일에서 온 두 커플은 그들이 발산하는 태양 이미지를 열심히 소비하는 구매자 같다고나 할까.

 

찰리의 실종으로 소설은 변곡점을 그리면서 하이라이트로 치닫기 시작한다. 우도가 머무는 호텔 델 마르의 여주인 프라우 엘제와의 미묘한 관계 역시 문제다. 어려서부터 품어온 연상녀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감정을 청년 우도는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 화상 때문에 괴물 같은 얼굴의 케마도를 전략 게임 <3제국>의 제자로 삼은 독일 챔피언 우도는 그와의 대결에 몰입한다. 그리고 실제 제3제국의 몰락처럼, 우도의 삶도 침몰하기 시작한다.

 

보드게임 마니아이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망상에 가까운 판타지를 볼라뇨는 생산해낸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로 무시로 넘나들며, 다양한 사건에 연루된 주인공은 일상을 잊고 오롯하게 태양과 바다를 즐겨야 하는 휴가지에서 악몽의 포로가 되고 만다. 우리는 왜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전 세계를 집어 삼킬 것 같은 기세로 연전연승하던 나치 독일의 베허마흐트는 영국을 굴복시키지도, 스탈린이 지배하는 적도 모스크바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성기 시절의 제3제국의 영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전략 게임 <3제국>이 나치 독일의 패망의 길을 따르리라는 것을 우도는 결국 알지 못했던 것일까. 게르만 민족의 영도자를 자처했던 히틀러는 복수에 불타는 무시무시한 적군(赤軍)에게 포위되어 베를린 벙커에서 결국 죽지 않았던가. 추락하는 챔피언 우도의 모습은 그렇게 제3제국의 지도자의 길을 따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2주나 되는 휴가를 즐기는 우도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꿈만 같은 일이니 말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보통의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천재 볼라뇨 덕분에 전쟁작가 스벤 하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오마하 비치에 상륙하던 미군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은 352사단의 리더 디트리히 크라이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나의 11번째 볼라뇨 읽기는 예상 외로 수월하게 마쳤다. 이제 내친 김에 메타픽션 <2666>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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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2-25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호기심이 급 땡깁니다. ^^

레삭매냐 2020-02-26 10:45   좋아요 1 | URL
<제3제국> 마치고 나서 드디어
<2666>에 도전 중입니다.

과연 완독에 성공할 지 저 자신
도 궁금하네요.
 
검은 튤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8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송진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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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축약본으로 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을 읽었다. 아마 영화로는 <여왕 마고>로 알려졌었지 싶다. 영화도 봤다. 뒤마의 <삼총사><몬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여왕 마고>1844년 그리고 6년 뒤에 <검은 튤립>이 발표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혼혈 장군으로 무용을 떨쳤던 부친을 둔 뒤마는 통속소설 작가로 그동안 저평가 되어 오다가 2002년 팡테옹으로 묘를 이전하면서 비로소 프랑스 국가를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통속소설이 어째서?

 

<여왕 마고>에서도 그랬지만 알렉상드르 뒤마는 낭만주의 역사소설의 대가다운 솜씨를 <검은 튤립>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 무협지 같은 그런 재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까. 실제 있었던 1672820일 헤이그에서 있었던 드 비트 형제의 끔찍한 살육에서 시작해서 꽃을 사랑하는 홀란트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던 검은 튤립을 얻게 되는 일단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인 탐욕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홀란트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오라녜 가문의 빌렘 3(영어식으로는 윌리엄)은 약관의 나이로 순수한 공화정을 주장해오던 코르넬리스와 얀 드 비트 형제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이웃의 강적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을 도모한다. 지난 세기 해양강국으로 군림했던 홀란트의 미래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을 상대로 한 경쟁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부르주아 시민들은 경쟁국들을 제압할 수 있어 보이는 강력한 군주정을 원했고 22세의 빌렘 3세는 순수한 공화주의자 드 비트 형제를 제물삼아 권력 강화에 나선다. 드 비트 형제들의 죽음은 왠지 로마 공화정 시대의 그라쿠스 형제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소설의 1/3 가량을 당시 정국과 상황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진짜 주인공인 코르넬리우스 판 바에를르가 등장한다.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의 코르넬리우스는 의사(첫번째 직업)이자 박사로 신실한 기독교도(신교도)의 모범과도 같은 사나이다. 코르넬리우스의 부친은 돌아가시면서 최대한 행복을 추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지. 그가 가진 유산과 지적 재산은 그럴 수 있을 만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작자가 그렇게 우리의 주인공 코르넬리우스를 행복하게 둘 리가 있나 그래.

 

신문연재를 하면서 다져진,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일일드라마의 영속성을 뒤마는 일찍이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신속한 전재와 피와 살이 튀는 그런 유혈극을 필두로 해서 소설 <검은 튤립>은 달려가기 시작한다. 뒤마에게는 이건 뭐 도저히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독자에게 그 정도는 유추할 수 있지 않나하는 도발적인 유머까지 곁들이며 몰입하게 만든다.

 

이런 막장 드라마에 악당이 빠지면 안될 것이다. 코르넬리우스의 이웃에 사는 이작 복스텔(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인으로 추정된다)이라는 희대의 악당을 배치해서 주인공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역할을 맡긴다. 이 시샘과 질투의 화신은 당시 홀란트를 열광 속에 몰아넣은 취미 활동이었던 튤립 재배자로,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모차르트를 질투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처럼 코르넬리우스의 중대한 도전을 철저하게 방해한다. 그렇다면 그의 도전이란 무엇이냐? 바로 하를럼의 원예협회장이 제시한 희귀한 검은 튤립을 만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금 10만 플로린이라는 거금까지 걸렸으니, 홀란트의 모든 튤립 재배자들이 도전에 나섰다.

 

, 이제 모든 준비가 완성되었다. 한편,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의 대부 코르넬리스가 남긴 비밀편지를 맡아 두었다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복스텔의 무고로 반역자로 몰려 투옥되고 재판과정을 거쳐 사형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관대한 청년 군주 빌렘 3(혹은 오렌지공)의 사면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미래의 검은 튤립이 될 세 개의 소구근을 간수 흐리푸스의 딸 로자의 도움으로 구하게 된다. 아하, 로자와의 로맨스가 이어지리란 것을 명민한 독자들은 예측했으리라. , 이제 중대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수감한 뢰베슈타인으로 이송된 코르넬리우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뒤마가 구사한 낭만주의 역사소설 <검은 튤립>은 요즘 쓰인 소설과 비교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 서스펜스와 재미 그리고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백미다. 전작 <여왕 마고>에서처럼 자신이 특정 인물에 대해 설정한 소설 전개상의 드라이브가 어쩌면 약점으로 지적될 지도 모르겠다. <여왕 마고>에서 카트린느 메디치가 그랬던 것처럼, 이중적 속성을 지닌 청년 오렌지공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초반의 묘사처럼 오렌지공이 권력의 화신이라면, 굳이 코르넬리우스를 사면하고 신원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 영명한 군주는 비교적 공정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창조한 게 아닌 타인의 것(검은 튤립)을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악의 화신 복스텔의 집요한 음모와 탈취 계획은 또 어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코르넬리우스가 죽건 말건 상관없고 오로지 타인이 누릴 명예와 부를 가로채기에 혈안이 된 한 부르주아의 초상은, 소설 초반 등장해서 드 비트 형제를 도륙한 부르주아 군중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소설 쓰기에 일가견이 있는 19세기 대가는 코르넬리우스와 로자 그리고 검은 튤립 사이에 세밀하게 벌어지는 일종의 삼각관계에서도 대단한 심리묘사를 보여준다. 간수의 딸이자 문맹인 처녀 로자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드 비트 형제와 코르넬리우스를 돕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르넬리우스의 아바타처럼 자유인으로 검은 튤립을 창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물론, 자신보다 검은 튤립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 코르넬리우스에게 때때로 냉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게 바로 이렇게 쪼는 연애소설의 핵심이 아니던가.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을 읽을 적에도 그랬지만, 알렉상드르 뒤마가 역시나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팡테옹에 가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의 무덤에 헌화라도 했을 텐데 뭐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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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02-23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뒤마의 소설 중 가장 좋았던 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시작해보렵니다.

레삭매냐 2020-02-23 21:51   좋아요 0 | URL
<여왕 마고> 작년에 소개된 <카트린 메디
치의 딸>을 추천해 드리고 싶으나 축약본
이라 어떨실 지 모르겠습니다.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백작> 말고는
국내에 출간된 책이 거의 없네요.
 
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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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PKD(필립 K. )가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그리고 정확하게 29년 뒤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연출과 키애누 리브스로다쥬우디 해럴슨 그리고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영화는 특이하게도 실사 영화를 애니메이트화한 그런 스타일의 영화였다.

 

소설과 영화를 투트랙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진기한 경험이었다우선 영화를 조금 보고 나서 소설의 진도를 뽑았다그랬더니만 조금은 낯선 소설의 줄거리들이 쏙쏙 뇌리에 와서 박히는 게 아닌가 말이다물론 영화가 소설만한 디테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꼭 말해 주고 싶다.

 

프레드라는 암호명의 언더커버 폴리스는 밥 아크터라는 이름으로 물질 D를 취급하는 약쟁이들 사이에서 암약하면서 일망타진을 도모한다프레드는 스크램블 수트라는 기묘한 복장으로 자신의 상사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는 특이한 설정이다그의 상사 행크 역시 그놈의 스크램블 수트를 입고 있어서 서로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경찰 조직에서는 짐 배리스어니 럭맨 그리고 마약 딜러 도나 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장비로 합법과 위법을 오가며 약쟁이 일당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맨 처음에 등장해서 물질 D(느린 죽음:slow death)에 중독된 찰스 프렉이 온몸에서 나오는 진딧물 환각에 시달리는 장면도 꽤나 충격적이었다사실 영화로 보면 더 자극적이다어쨌든 프레드는 밥 아크터로 신분을 위장해서 약쟁이들 사이에서 암약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나는 누구이고도대체 여기서 나는 무얼 하는 거지프레드는 멀쩡한 생활인으로 두 명의 딸들과 부인을 가진 정상적인 직장인이었는데 순전히 직업 때문에 약쟁이 행세를 하다가 진짜 약쟁이가 될 판이다약쟁이 친구들이 주는 약을 거부하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건네주는 느린 죽음을 덥썩덥썩 받아먹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상당 부분이 PKD의 실제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반네 번째 아내와 이혼한 작가는 실제로 거리의 정키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어쩐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짐 배리스찰스 프렉어니 럭맨 그리고 도나 호슨 같은 캐릭터들이 생생하고 리얼하다 싶었는데 아마 그 시절의 동거인들을 스케치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잡입 수사관인 프레드는 약쟁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물질 D에 중독되고 만다이게 문제가 되지 않을까당연히 문제가 된다소설/영화에서 프레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만 지속적인 약물 중독으로 심신이 파괴된 그의 판단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결국 자신의 상관인 행크로부터 자신이 원하지 않을 그런 결과를 통보받는 프레드그 뒤에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너무 디테일하게 풀어 놓는다면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이미 스포일은 충분히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PKD의 또 다른 걸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영화 버전인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작가가 준비한 반전은 기대 이상이었다아 내가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엉뚱한 코끼리 다리를 더듬고 있지 않았던가. 1970년대에 이미 이런 설정을 구상했다는 점이 놀랍다과연 내가 사는 이 세상의 실질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아니 그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던가.

 

소설과 영화를 교차하면서 읽고 보는 재미는 대단했다영화는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소설이 영화보다 훨씬 더 디테일에서 풍부했고프레드/밥 아크터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치밀했다물론 영화에서 보여준 형상화는 소설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PKD의 다른 소설들을 다시 읽어야 싶다오늘 눈이 엄청나게 내렸지만 대부분 녹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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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6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7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20-02-1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vd를 가지고 있는데 보지는 않았어요. PKD원작인지도 몰랐네요@_@;;; 레삭매냐님 덕분에 알게 됩니다. 소설도 영화도 꼭 봐야겠어요. 불끈!

레삭매냐 2020-02-17 09:0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실사로 찍은 다음에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만족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소설을 읽었더니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시간 되시면 한 번 보시길...
 

 


지금 막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아카데미 4개 본상(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각색상) 중에 각본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침 출근길에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나온 씨네21 편집장인가 하는 양반의 예상이 적중했다.

 

사실 아카데미상은 국제영화상이 아닌 미국의 로컬상이다. 게다가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상이라는 점을 편집장은 강조를 하더라.

 

그런 점에서 본상에 해당하는 각본상을 점쳤지 아마.

작품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는 샘 멘데스의 <1917>을 꼽았는데, 전쟁서사와 휴머니즘 그리고 볼거리마저 풍부한 해당 작품이 작품상을 받으리라는 보수적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아카데미나 그래미가 보수적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지 않은가.

아카데미 꼰대들이 외국어로 만들어진 외국 영화에 본상을 주지 않을 거라는 점에 수긍이 갔다. 8-9,000명 정도 되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고 하는데, 원체 보수적인 아카데미다 보니 자국산 영화에 표를 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편집장은 라이벌 쿠엔틴 타란티노가 두 번이나 이미 각본상을 받은 경력이 있으니 이번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상을 받지 않을까라는 그야말로 점쟁이 뺨치는 예지를 시전해 주시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기생충>의 빛나는 칸느 영화제 대상이라는 후광으로 국내에서도 이미 천만 관객이라는 흥행과 작품성마저 일군 보기 드문 영화라는 점을 편집장을 높게 평가했다. 참고로 나는 아직 <기생충>을 보지 않아서 그저 후문으로만 영화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참에 영화를 봐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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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Oscar goes to...

you know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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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2-10 1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자리, 어느 인터뷰에서든지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잘한다는 의미의 자유자재가 아니라, 정말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봉감독을 보면서 저런 자신감이 있어야 세계에 우뚝 설수 있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봉감독.
저도 아직 영화 안 본 1인이라서... 봐야겠어요, 이젠^^

레삭매냐 2020-02-10 13:10   좋아요 1 | URL
지금 보니 감독상도 받았다고 하네요.
작품상까지는 아무래도 무리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수하면 결국
이런 성과를 얻게 되는가 봅니다.

페넬로페 2020-02-10 1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품상까지 받았어요, 와우~~

레삭매냐 2020-02-10 15:01   좋아요 2 | URL
대박이네요.

각본상과 감독상 정도는 예상했는데.

카스피 2020-02-10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생충 4관왕 했어요.만세 ^3^

레삭매냐 2020-02-10 15:01   좋아요 1 | URL
본상 3개를 쓸었으니 <기생충>
의 해라고 해도 될 듯 하네요.

캐모마일 2020-02-10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기생충은 진짜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네요.

레삭매냐 2020-02-11 09:10   좋아요 0 | URL
아직도 안 보고 버팅기고 있는
저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ㅋㅋ
 



골수 레드삭스 팬으로 어제 무키 베츠가 다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뭐 예상하고 있던 바라 크게 놀라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환영하는 바이다. 그런데 레드삭스가 프랜차이즈 스타를 떠나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이던가? 아니다.


시간을 16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2004년 7월 31일,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충격적인 뉴스가 빈타운을 뒤흔들었다.

레드삭스의 주전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컵스로 트레이드되었던 것이다.

그가 누구였던가. 보스턴의 암울했던 시절을 함께 한 그야말로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던가. 신인왕 그리고 우타자로 2연속 타격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노마를 트레이드하다니!


새로 부임한 냉철한 젊은 단장 테오 엡스타인은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정책을 밀어 붙였다. 그것은 바로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는 것이었다.

그 저주를 깰 수만 있다면 프랜차이즈 스타의 트레이드는 그에게 금기가 아니었다.


노마가 보스턴에서 지낸 9년과 무키 베츠의 6년은 비교 불가다.

사실 노마는 숙명의 라이벌 양키즈의 데릭 지터에 비해 전혀 딸리는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키즈는 데릭 지터에게 10년 2억 달러에 달하는 화려한 금액을 선사했고, 보스턴은 냉정하게 노마에게 5년 6천만 달러라는 초라한 연장 계약을 스프링캠프에서 제시했다. 다시 한 번 야구가 냉정한 비즈니스라는 점을 강조해야할 것 같다.



잦은 부상으로 많은 필드 레인지를 커버해야 하는 주전 유격수에게 수비 부담은 크게 다가왔다. 더불어 강점을 가진 타격에서도 빛을 발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결국 노마는 레드삭스와 비슷한 처지의 컵스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그 다음의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2004년 가을, 노마 대신 올란도 카브레라를 주전 유격수로 삼은 레드삭스는 양키즈를 상대로 모든 프로리그에서 전무후무한 리버스 스윕을 완성하고, 월드시리즈에서 1946년과 1967년 두 번이나 물먹은 카디널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86년 묵은 저주를 뽀갰다.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리고 모두가 노마를 잊어 버렸다.


다시 2020년으로 돌아와 보자. 보스턴 수뇌부는 이미 올해가 끝나면 프리 에이전트가 되는 무키 베츠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지난 스토브 리그에서 선수들의 몸값 폭등을 목격한 베츠는 연장계약 대신 프리 에이전트 시장에 나갈 것을 공언했다. 전언에 따르면 연장계약에서 보스턴은 10년 3억 달러를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츠는 메이저리그를 상징하는 마이크 트라웃 수준의 연장 계약을 원했던 모양이다. 12년에 4억 2천만 달러. 바이 바이 무키.


한 선수에게 그런 돈을 주는 건 정말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팀의 총 연봉을 2억 달러라고 간주했을 때, 선수 한 명이 팀 연봉의 20%를 가져 가는게 정상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레드삭스가 올릴 수 있는 최대 승수를 100승으로 잡았을 때, 그러면 베츠에게 기대하는 WAR가 20.0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팀에 마음에 떠난 선수는 그나마 값어치가 있을 때 트레이듷하는 게 맞다.



그렇지 않아도 망한 계약인 데이빗 프라이스의 계약을 털어 내고 사치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보스턴 경영진이 짝수해와 홀수해를 오락가락하는 선수에게 그런 계약을 내줄 리가 없었다. 결국 고육책으로 베츠와 프라이스를 묶어 다저스와 극딜에 나선다. 더 이상 팀에 머무를 생각이 없는 선수와 망한 계약을 상징하는 선수 대신 베츠의 자리를 대신할 (하지만 허리 부상으로 건강에 물음표가 달린) 알렉스 버두고와 미네소타와의 삼각 딜로 유망주 한 명을 얻었다.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는 데이브 돔브로우스키가 보여준 팜을 털어 먹고 돈을 잔뜩 들여 우승한 2018년 우승 모델(게다가 사인 스틸링까지!)보다는 괜찮은 준척 선수들과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준 응집력으로 우승한 2013년의 우승 모델이 2020년 레드삭스가 추구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보스턴은 이번 트레이드에서 다저스의 개빈 럭스나 더스틴 메이 둘 중의 하나는 꼭 데려왔어야 하는데 그 점이 좀 아쉽다. 아마 베츠 트레이드만으로는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는데, 프라이스를 덤으로 끼워 넣는 바람에 아쉬운 딜이 된 것 같다. 버두고가 부디 건강해서 베츠의 몫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No one is bigger than the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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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MLB를 뜨겁게 달구었던 배추 트레이드 건은 루키 단장의 탬파베이 스타일의 트레이드 결과를 손에 쥐고 현타한 보스턴 수뇌부의 결정으로 막판에 엎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오죽했으면 보스턴 팬들이 팀의 이름은 보스턴 레이 삭스라며 놀려댔을까.

 

그러니까 팀의 가장 강력한 타자인 배추와 썩어도 준치라는 1억 달러 연봉이 남은 사나이 프라이스에 연봉보조 5천만달러까지 해서 손에 쥔게 메이크업’(선수의 생활방식 혹은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알렉스 버두고와 아직 실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신인 투수 그라테롤이라니! 믿어지는가.

 

그러니 당연히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다저스와 보스턴의 딜을 주축으로 미네스타에 에인절스까지 낀 빅 딜은 난항에 부딪혔다. 딜이 무한정 길어지자 성질이 솟구친 에인절수 구단주 모레노는 결구 나가리를 선언했고 에인절스로 가게 되었던 우완투수 후두러 패기작 피더슨(우투수 상대 홈런 36, 좌투수 상대 홈런 0)과 로스 스트리플링은 그대로 다저스에 주저 앉게 되었다. 프리 에이전트가 1년 남은 피더슨은 팀을 상대로 한 연봉조정 분쟁에서 패하면서 사단을 냈지만... 뭐 그렇게 가는 거지.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배추가 다저스로 트레이드 되기 전, 연장 계약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끝내 배추는 프리 에이전트 시장에서 자신의 가격을 알아볼 심산인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원하는 1042천만 달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설마 이미 3번의 MVP에 빛나는 트라웃과 비교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 배추의 실력은 이제 정점에 달하고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그런 선수에게 장기계약은 절대 안된다. 길어야 1-2년이 배추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일 것이다.

 

어쨌든 딜은 성사되었고, 부디 보스턴이 받은 버두고 외에 지터 다운스와 코너 웡이 팜에서 무럭무럭 자라 피디와 캡틴 베리텍의 왕년의 모습을 재현해 주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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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2-07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장동료들과 점심먹으면서 이 트레이드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레삭매냐님의 깔끔한 요약정리 감사합니다^^ 사인훔치기의 가장 큰 피해자 다저스-_-;;;;

레삭매냐 2020-02-07 22:32   좋아요 0 | URL
보스톤 팬으로
이번에는 다저스에게 당한 딜로 보이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