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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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당하게 최애하는 작가라고 말하는 작가 중의 하나가 바로 로베르토 볼라뇨다. 고작 반세기를 살고 지구별을 떠난 볼라뇨는 천재작가가 그렇듯, 살아서보다 사후에 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작품은 바로 11년 전에 나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었다. 그후 꾸준하게 그의 책들을 읽었고, 사 모았다.

 

얍삽하게도 단편 소설이나 소설집들은 섭렵했지만 정작 대작인 <야만스러운 탐정들>, <2666>은 아직 읽지 못했다. 전자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후자는 1권과 2권까지는 읽었지만 3권에서 멈춰서 있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나. 비슷한 궤도로 <3제국>89쪽까지 읽었더라. 샀지만 읽지는 않았다는 죄책감에 어젯밤에 책을 집어 들었고 가뿐하게 전에 읽었던 부분을 돌파했다. 이거 왜 이렇게 재밌지. 역시나 책은 읽을 때가 있는가 보다.

 

전략 게임 <3제국>의 챔피언 게이머 우도 베르거는 애인이자 자기 행복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잉게보르크와 함께 유년 시절 부모님과 함께 즐겨 찾던 스페인의 바닷가 휴양지 코스타 브라바를 찾는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25세 청년 우도는 아름다운 애인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시샘을 즐기며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함께 델 마르 호텔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긴다. 다만, 잉게는 우도의 게임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흠이라고나 할까.

 

떠오르는 전략 게임의 스타 우도는 다양한 잡지에 게임에 대한 글을 기고하는데, 쾰른의 어느 출판사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글쓰기를 가다듬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 <3제국>의 내레이터인 동시에 주인공인 셈이다. 휴가지에서 만난 찰리와 한나 커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외톨이 같은 성격의 우도는 그들과 어울려 술집과 디스코텍에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게임판에서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걸 더 선호한다.

 

전쟁마니아가 아니라면 전혀 들어 보지 못했을 제프 디트리히나, 파울 하우저, 하인쯔 구데리안 그리고 폰 만슈타인 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기갑군을 이끌었던 맹장들의 이름을 보니 왜 이리 친근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세계에 블리츠크리크로 알려진 세계대전 개전을 알린 폴란드 전역의 백색작전, 바로바로사 작전, 튀니스와 비제르테에서의 소모전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니 나름 마니아로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들이 어쩌면 다시 읽게 되었을 때, <3제국>의 매력 포인트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볼라뇨의 끝없는 관심의 끝이 어디였을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우도와 찰리 커플의 잔잔한 세계에 스페인 현지의 로보와 코르데로 그리고 화상으로 괴물 같은 얼굴의 페달 보트 업자 케마도가 서사에 참여하면서 서스펜스와 스릴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로보와 코르데로 듀엣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지중해의 태양을 상징한다면, 독일에서 온 두 커플은 그들이 발산하는 태양 이미지를 열심히 소비하는 구매자 같다고나 할까.

 

찰리의 실종으로 소설은 변곡점을 그리면서 하이라이트로 치닫기 시작한다. 우도가 머무는 호텔 델 마르의 여주인 프라우 엘제와의 미묘한 관계 역시 문제다. 어려서부터 품어온 연상녀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감정을 청년 우도는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 화상 때문에 괴물 같은 얼굴의 케마도를 전략 게임 <3제국>의 제자로 삼은 독일 챔피언 우도는 그와의 대결에 몰입한다. 그리고 실제 제3제국의 몰락처럼, 우도의 삶도 침몰하기 시작한다.

 

보드게임 마니아이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망상에 가까운 판타지를 볼라뇨는 생산해낸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로 무시로 넘나들며, 다양한 사건에 연루된 주인공은 일상을 잊고 오롯하게 태양과 바다를 즐겨야 하는 휴가지에서 악몽의 포로가 되고 만다. 우리는 왜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전 세계를 집어 삼킬 것 같은 기세로 연전연승하던 나치 독일의 베허마흐트는 영국을 굴복시키지도, 스탈린이 지배하는 적도 모스크바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성기 시절의 제3제국의 영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전략 게임 <3제국>이 나치 독일의 패망의 길을 따르리라는 것을 우도는 결국 알지 못했던 것일까. 게르만 민족의 영도자를 자처했던 히틀러는 복수에 불타는 무시무시한 적군(赤軍)에게 포위되어 베를린 벙커에서 결국 죽지 않았던가. 추락하는 챔피언 우도의 모습은 그렇게 제3제국의 지도자의 길을 따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2주나 되는 휴가를 즐기는 우도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꿈만 같은 일이니 말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보통의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천재 볼라뇨 덕분에 전쟁작가 스벤 하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오마하 비치에 상륙하던 미군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은 352사단의 리더 디트리히 크라이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나의 11번째 볼라뇨 읽기는 예상 외로 수월하게 마쳤다. 이제 내친 김에 메타픽션 <2666>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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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2-25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호기심이 급 땡깁니다. ^^

레삭매냐 2020-02-26 10:45   좋아요 1 | URL
<제3제국> 마치고 나서 드디어
<2666>에 도전 중입니다.

과연 완독에 성공할 지 저 자신
도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