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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너 다클리 ㅣ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1977년 PKD(필립 K. 딕)가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29년 뒤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연출과 키애누 리브스, 로다쥬, 우디 해럴슨 그리고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특이하게도 실사 영화를 애니메이트화한 그런 스타일의 영화였다.
소설과 영화를 투트랙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진기한 경험이었다. 우선 영화를 조금 보고 나서 소설의 진도를 뽑았다. 그랬더니만 조금은 낯선 소설의 줄거리들이 쏙쏙 뇌리에 와서 박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물론 영화가 소설만한 디테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꼭 말해 주고 싶다.
프레드라는 암호명의 언더커버 폴리스는 밥 아크터라는 이름으로 물질 D를 취급하는 약쟁이들 사이에서 암약하면서 일망타진을 도모한다. 프레드는 “스크램블 수트”라는 기묘한 복장으로 자신의 상사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는 특이한 설정이다. 그의 상사 행크 역시 그놈의 스크램블 수트를 입고 있어서 서로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경찰 조직에서는 짐 배리스, 어니 럭맨 그리고 마약 딜러 도나 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장비로 합법과 위법을 오가며 약쟁이 일당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아, 맨 처음에 등장해서 물질 D(느린 죽음:slow death)에 중독된 찰스 프렉이 온몸에서 나오는 진딧물 환각에 시달리는 장면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사실 영화로 보면 더 자극적이다. 어쨌든 프레드는 밥 아크터로 신분을 위장해서 약쟁이들 사이에서 암약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나는 누구이고, 도대체 여기서 나는 무얼 하는 거지? 프레드는 멀쩡한 생활인으로 두 명의 딸들과 부인을 가진 정상적인 직장인이었는데 순전히 직업 때문에 약쟁이 행세를 하다가 진짜 약쟁이가 될 판이다. 약쟁이 친구들이 주는 약을 거부하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건네주는 ‘느린 죽음’을 덥썩덥썩 받아먹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상당 부분이 PKD의 실제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반, 네 번째 아내와 이혼한 작가는 실제로 거리의 정키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어쩐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짐 배리스, 찰스 프렉, 어니 럭맨 그리고 도나 호슨 같은 캐릭터들이 생생하고 리얼하다 싶었는데 아마 그 시절의 동거인들을 스케치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잡입 수사관인 프레드는 약쟁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물질 D에 중독되고 만다. 이게 문제가 되지 않을까? 당연히 문제가 된다. 소설/영화에서 프레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만 지속적인 약물 중독으로 심신이 파괴된 그의 판단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의 상관인 행크로부터 자신이 원하지 않을 그런 결과를 통보받는 프레드. 그 뒤에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너무 디테일하게 풀어 놓는다면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이미 스포일은 충분히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PKD의 또 다른 걸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영화 버전인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작가가 준비한 반전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 내가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엉뚱한 코끼리 다리를 더듬고 있지 않았던가. 1970년대에 이미 이런 설정을 구상했다는 점이 놀랍다. 과연 내가 사는 이 세상의 실질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아니 그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던가.
소설과 영화를 교차하면서 읽고 보는 재미는 대단했다. 영화는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소설이 영화보다 훨씬 더 디테일에서 풍부했고, 프레드/밥 아크터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치밀했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준 형상화는 소설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PKD의 다른 소설들을 다시 읽어야 싶다. 오늘 눈이 엄청나게 내렸지만 대부분 녹아서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