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박건웅 지음, 님 웨일즈 외 원작 / 동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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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김산이라는 혁명가의 삶을 다룬 <아리랑>이란 책을 알게 됐다. 되짚어 보니 정말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런데 책은 다 읽지 못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호기롭게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렇게 <아리랑><중국의 붉은 별>과 더불어 나의 숙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미국 출신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 여사가 저술한 <아리랑>의 그래픽노블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차 안에서 50쪽을 훌쩍 넘겨 버렸다.

 

202011월의 을씨년스러운 날에 내가 만난 님 웨일즈가 기술한 조선 출신의 비운의 혁명가 김산, 아니 장지락에 대한 전기는 제목만큼이나 슬픈 그런 이야기였다.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동안의 휴지기에 과연 서구 출신 저널리스트로 님 웨일즈가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저자는 편견이나 왜곡 없이 일제의 프로파간다가 배제된 진실에 과연 얼마나 도달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아리랑>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저자가 조선공산당에서 파견한 극비 대표 김산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비밀에 쌓인 조선 출신의 혁명가를 음모가라고 처음에는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 장명이라는 가명으로 숱한 책들을 빌린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출발했던가. 님 웨일즈가 저술한 <Song of Arirang>1941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신천지라는 잡지를 통해 소개됐다당시 부제는 '조선인 반항자의 일대기'였다. 그후, 1984년에 다시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 평북 용천에서 빈농의 세 번째 아들로 출생한 장지락은 유년 시절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93·1운동을 체험하면서 비폭력 평화운동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중이 하나님에게 죄의 보상을 치르고 있다는 외국 선교사의 말은 어이가 없었다. 죄의 보상이 치러지고 나면 독립하게 될 거라는 말에 소년 장지락은 아연실색한다.

 

소년 장지락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족이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민족주의자로 출발한다. 하지만 3·1운동의 실패를 보고서,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것은 정교한 운동 이론과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음 단계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후 둘째 형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문배달과 인력거꾼으로 고학을 하면서 도쿄 제국대학 진학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운동이 활발했던 모양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장지락은 미래의 혁명가로서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700리 길을 걸어 어린 나이에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최연소 입학한 장지락의 일화는 거의 전설이 되었다. 그 다음 단계인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기도 했다. 이 시절에 만난 안창호 선생과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았던 이광수와도 교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의열단 출신의 김약산과 오성륜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테러에 의한 항일운동이 이상적이라는 사실과 그 한계를 느끼고, 대중혁명운동인 마르크시즘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21년 중국 베이징으로 간 장지락은 당대 중국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던 베이징 협화의학원에서 의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5·4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마르크스 학술활동이 활발하던 베이징에서 그는 공산주의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공산청년동맹에도 가입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승려 출신 김충창(김성숙)과 만나 본격적인 마르크시즘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1차 국공합작과 쑨원의 사망 그리고 국민당이 주도한 북벌의 소용돌이 속에 장지락은 당시 중국 최고의 대학이었던 중산대학의 의대 본과생(나중에 정치학 전공으로 바꾸었다)으로 김충창과 함께 활발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장지락은 조선 출신으로 광둥 코뮌이나 하이루펑 소비에트 활동에 참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기도 하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조국 조선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임정에 도움을 주었던 장제스 정권이나 중국공산당 모두 자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싸우느라 타국의 독립까지 후원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조선의 혁명가들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것이 결국 훗날 장지락의 운명에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조선 출신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단 장제스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에 일단 협력한 다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1927412, 장제스의 주도로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것은 국민당 우파에 의한 혁명세력과 노동자 학살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호기롭게 시작한 광둥 코뮌마저 백군에게 격파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상부로부터 후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하고 적군과 맞서 싸운 박진 부대 최후에 대한 증언은 광둥 코뮌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광둥 코뮌이 분쇄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퇴각에 성공한 장지락을 비롯한 혁명 세력들은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이동한다.

 

그 다음 무대였던 홍군이 장악한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장지락을 비롯한 혁명 동지들에게 미래의 조국의 희망찬 모습을 엿보기도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집요한 국민당군의 공격 앞에 패퇴한 장지락과 혁명 동지들은 사경을 헤매면서 적군의 추격을 피해 도주했다. 굶주림과 말라리아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수많은 동지들이 노상에서 죽어갔다. 이런 잇달은 실패의 체험과 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반동 계급에 대한 숙청에 대해 장지락은 인간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계급투쟁과 인간해방이라는 거대한 대의를 위해 싸웠지만, 그에 따른 부차적 피해와 피에 피를 부르는 복수는 피할 수가 없는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휴머니스트로서 실패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박건웅 저자가 밝힌 대로, 혁명 와중에 피어나는 연애 스토리도 빼놓을 수가 없다. 혁명가 장지락은 철저하게 조국 독립과 혁명에 모든 것을 바쳤노라고 수없이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가에도 덧없는 사랑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혁명 동지 류링의 적극적 구애와 결혼까지 한 역시 다른 혁명 동지와의 사랑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혁명가의 삶을 비춘 한 줄기 빛이 아니었을까.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기도 했지만, 혁명 열사의 의기는 꺾을 수가 없었다. 중국 혁명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옌안에 조선혁명가 극비대표로 파견되어 님 웨일즈를 만나면서, 서구의 저널리스트가 남긴 기록을 통해 잊혀진 혁명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숱한 투쟁의 사선을 뛰어 넘은 이 걸출한 혁명가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이 아닌, 리리산주의자 혹은 트로츠키주의자 그리고 일본 특무(스파이)라는 모함을 받아 19381019일 처형된 점은 비극의 전형이다.

 

박건웅 저자가 아무래도 장지락이라는 개인에 집중하다 보니, 어떻게 해서 조선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남의 나라인 중국혁명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1920-30년대 한국 독립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인 중국혁명사를 동일선상에서 고찰해야 하는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여는 어쩌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이 충돌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냉전적 사고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아울러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하는 혁명가들의 정체성 문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조국의 광복이라는 대의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민족주의 계열 운동가들과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의 운동의 방법과 각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런 디테일들이 조금 아쉬웠다.

 

오늘 읽은 그래픽노블 <아리랑>으로 일부분이나마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마친 것 같이 조금이나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도 중국의 1920-30년대 혁명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혁명가 장지락이 중국에서 투쟁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상당 부분 해소된 기분이다. 아무래도 그래픽노블로는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는다. 님 웨일즈의 원작에 다시 도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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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0-11-22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두 부부가 쓴 <아리랑>과 <중국의 붉은별> 만만치 않은 책이었어요.
중국의 붉은 별은 3분의 2정도에서 대장정을 끝내지 못했고 아리랑도 읽다 말았네요^^
숙제로 여겨진 2권의 책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책이 엄청 반가웠네요.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의 이데올로기속에서 아예 존재조차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가 시대가 변해 우리에게 다가오니 넘 뿌듯합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1:40   좋아요 0 | URL
저도 계속해서 읽다 말다를 거듭하고
있네요...

이참에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설까
봅니다.

아무래도 냉전시대에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
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선 <아리랑>부터 읽는 것으로.

페넬로페 2020-11-23 0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시대가 시대인 만큼 ‘중국의 붉은 별‘과 ‘아리랑‘ 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혁명의 꽃이 만발하길 기대했지만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그들의 행동들이 실망만을 안겨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리랑‘ 은 사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기회되면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1:42   좋아요 0 | URL
장지락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 보다
보니 서구 저널리스트가 쓴 <아리랑>
보다 이원규 선생이 썼다는 <김산
평전>에 눈길이 가더라구요.

다만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는
게 흠이네요.

작고하신 김준엽 선생의 <장정>도
다시 만나야지 싶습니다. 읽을 책들
이 너무 많네요 증맬루.
 
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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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완벽하게 디지털 네트워크에 종속되었다. 인별그램에 들어가 보면, 회사에서 구입한 커블 체어 광고가 뜬다. 아니 나는 주로 책에 대한 콘텐츠를 인별그램에 올리는데 왜 회사에서 산 커블 체어 광고가 나의 인별그램에 침입한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이랴. 커블 체어는 단적인 하나의 예일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모바일폰에서 빠져 나간 정보들이, 아니 허상의 무언가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걸까. 내가 아닌 내가 검색한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나를 역으로 규정하는 건 아닐까.

 

돈 드릴로의 신작 <침묵>에서 다루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 블랙아웃에 대한 단상을 생각하다 또 엄한 데까지 사유가 흘러간 모양이다. 앞으로 2년 뒤인 20222월의 첫 번째 주, 일요일이 시간적 배경이다. 파리에서 떠나 뉴어크로 향하는 짐 크립스와 테사 베런스가 탄 비행기 속에서 <침묵>은 시작한다.

 

거의 미국인들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볼 선데이다. 일 년에 달랑 16번만 하는 정규시즌의 미식축구가 끝나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AFCNFC 리그에서 각각 올라온 두 팀이 맞붙는 슈퍼볼 경기의 희귀성만큼이나 세계 광고회사들의 각축이 벌어지는 디지털 공간이기도 하다.

 

예의 슈퍼볼 경기를 보기 위해 맨해튼 어느 아파트에 5명의 지인들이 모이기로 했다. 짐과 테사는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고, 나머지 3명인 맥스와 다이앤 그리고 마틴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짧은 분량만큼이나 돈 드릴로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역시 심플하다. 거대한 세계적(아니 어쩌면 미국인들만의) 이벤트를 앞두고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된다. 어쩔 것인가?

 

게다가 한 팀은 지금 이런 소동 속에서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 갇혀 있다. 화끈한 설정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심정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보다 먹거리며 판돈까지 모든 걸 준비한 상태에서 킥오프를 앞두고 대형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대기하던 수천만명의 허탈함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슈퍼볼이라는 이벤트는 전기로 바뀐 신호를 타고 위성이나 케이블을 타고 전 미국의 가정으로 배달된다. , 슈퍼볼은 공중파에서 방송을 했던가? 어쨌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는, 잘쳐 줘봐야 고작 땅따먹기 게임에 불과한 단판승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홀리는 건 연구의 대상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쌓아온 업셋과 치명적 실수들 그리고 명승부들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었고, 예의 관심은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하긴 그런 신나는 경기를 앞두고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혹은 괴델 같은 이들이 등장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해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쌩뚱 맞지 않았을까. 이런 거에 비하면, 셀시우스나 패런하이트는 양반이지 싶다.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살아 남은 짐과 테사는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부상 치료도 미룬 채 화장실에서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놀랍군. 그리고 이어지는 타인을 배려하는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런 위기상황은 그런 일탈의 발생에도 관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처음에 맨해튼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20년 전, 미국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9-11 테러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공간적 배경이 같은 맨해튼이 아니던가. 다만 시간은 계절적으로 가을과 겨울이라는 점이 달랐지만. 예상하지 못한 가공할만한 테러는 물리적으로 쌍둥이 빌딩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거대한 심리적 타격을 가했었다. 그 때와 달리 소설 <침묵>에서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정보의 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기이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차단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인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되더라도 곧바로 일상을 되찾는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하는데 성공한 짐과 테사는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걸어서 도착한다. 슈퍼볼 홈파티의 호스트인 맥스는 오크통에서 십년 동안 숙성시킨 버번을 들이킨다. 그리고 맥스가 꺼진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01로 이루어진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소설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점점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신문이나 뉴스 혹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를 취합해서 나만의 고유한 사고를 형성했다. 하지만 너튜브라는 동영상 매체가 모든 것을 잡아 삼키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는 선동으로 점철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만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아니 이제 진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도서관에서 막 빌린 따끈따끈한 책을 읽긴 했으나, 번잡스러운 속에서 과연 내가 읽은 게 맞는지 그리고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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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는 독일 출신의 작가 율리 체를 만났는데 이달에는 미국 버지니아/네브래스카 출신의 작가 윌라 캐더를 만나게 됐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 모르는 작가는 지천이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산더미라는 걸 새삼 느낀다.

 

1873년생으로 소설 <나의 안토니아>의 주인공 지미 버든처럼 동부 버지니아를 떠나 열 살 때, 서부의 황량한 네브래스카에 안착했다. 한 작가를 아는 방법은 역시나 그의 책을 읽는 게 최고다. 사실 예전에 미국의 주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그림에서 윌리 캐더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 나는 윌라 캐더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달에 윌라 캐더 작가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우리 중 하나>가 나온다니 하니 더더욱 궁금하지 않을소냐. 그리하여 주문한 책이 나의 수중에 들어오기 전에 도서관으로 냉큼 달려가 일단 <나의 안토니아>를 빌렸다. 또다른 대표작인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이북 맛보기로 좀 읽었다. 내가 사는 곳 부근에 있는 도서관에는 <나의 안토니아>만 있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의 주인공은 미국 땅으로 영입되지 얼마 되지 않은 뉴멕시코 선교지로 떠나게 되는 사제 장 마리 라투르다. 때는 바야흐로 1848, 바티칸에서 페랑 신부는 추기경들을 설득해서 온타리오에 있던 프랑스인 사제를 카우보이와 백인들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인디언들이 넘실대는 오지로 파견하는데 동의한다. 반건조 사막지대를 지나 부임지로 가는 모습까지 읽었나 어쨌나.


<나의 안토니아>를 한창 읽는 중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했고, 두 책을 번갈아 가며 읽는 중이다. 전자도 읽는 재미가 상당했는데, 19세기 중반 미국령으로 편입된 뉴멕시코 선교에 나선 장 마리 라투르 주교와 그의 동료 요셉 바일랑 신부가 겪는 일단의 모험담도 대단했다.

 

신세계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티칸에서 파견된 신부들은 기존의 가톨릭 교회가 현지에서 얼마나 토착화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선 현지의 멕시코 사제들은 바티칸에서 파견한 교주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래서 라투르 교주는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고난의 선교여행에 나서야했다.

 


프랑스 오베르뉴 출신의 독실한 라투르 신부는 친화력 강한 바일랑 신부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강단 있게 개혁을 시도한다. 왜 신대륙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주민들에게 외면을 받았던가? 스페인 정복자들을 대신한 지배계층 행세를 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원주민들의 농장을 강탈하고, 그들의 노역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발타차 몬토야 신부의 전설 같은 죽음이며, 타오스의 파계신부 안토니오 호세 마티네즈 같은 인물이 구시대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선수일 것이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고려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주도해 나가는 라투르 신부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두 사제가 불모의 땅 뉴멕시코에서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건 선교를 하는 장면들을 윌라 캐더 작가는 유려한 필치로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아무리 신의 대리인이지만, 뿌리까지 뽑아낼 수 없는 멕시코 인디언들이 토속신앙에 집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타오스의 타락한 마티네즈 신부는 그 점을 강조하면서, 금지된 가톨릭의 계율을 깬 자신을 옹호하는 논리의 비약도 마하다지 않았던가. 그는 아무리 봐도 철저하게 고인물이었고, 개혁의 대상이었다.


<나의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윌라 캐더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그 황량함이 넘실거리는 네브래스카 평원이나 뉴멕시코의 반건조 사막에 달려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나의 안토니아> 모두 지난 세기 미국의 실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나의 안토니아>는 명백하게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다. 열 살에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네브래스카 블랙 호크로 떠난 지미 버든. 어린 소년은 어느덧 성장해서 철도회사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당시를 회고하는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아>, 아니 제목을 바꾼 <나의 안토니아>의 시작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기차에서 산동네 사나이 제이크와 함께 만난 이들이 바로 이제 막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쉬메르다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집의 맏딸이 바로 지미 버든의 유년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 지분을 지닌 안토니아, 혹은 토니 쉬메르다였다. 자신들도 이민자였던 버든 가족은 신참내기 이민자인 쉬메르다 패밀리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고향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유능한 직조업자이자 흥이 넘치는 바이얼리니스트였던 쉬메르다 씨에게 미국은 그저 낯선 땅이었을 뿐이다. 아내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기 위해 꿈과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결국 그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신천지에 둥지를 튼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사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쉬메르다 패밀리의 신산한 삶 못지않게 우크라이나 출신 농부 파벨과 피터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아니 떠들썩한 결혼식이 끝난 뒤, 귀갓길에 늑대 무리를 만나 살기 위해 결국 신랑 신부를 늑대들에게 내던진 파벨 역시 끝이 좋지 못했다. 쉬메르다 씨가 죽고 나서야, 블랙 호크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다. 공동체의 선행을 목격하기도 한다.

 

<나의 안토니아>는 목가적인 윌라 캐더 저자의 자전적 소설인 동시에 지미 버든이란 소년이 이런저런 소동 끝에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난한 쉬메르다 가족은 가장을 잃고,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농삿일에 나선다. 학교에 가야 할 14살의 안토니아 역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학교 대신 들판에 나가 남자들처럼 농사를 짓는다. 어쩌면 얼마간의 자본과 그 땅에 대한 지식의 유무가 미래 세대의 향방을 갈랐던 게 아닐까. 농부-하녀 그리고 미혼모의 삶을 살게 된 안토니아와 하버드 대학 졸업 로스쿨을 거치면서 신천지의 지배계급에 올라선 지미 버든의 삶의 양태를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네브래스카의 혹독한 계절의 변화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다. 여름에는 불타는 태양이 빚어내는 빛나는 옥수수 알갱이가 등장하고, 한겨울에는 이웃과의 왕래를 끊어 버리는 폭설은 기본이다. 1미터가 넘는 방울뱀을 토니 앞에서 빌린 부삽으로 요절내는 장면은 또 어떤가. 비로소 지미 버든은 소년에서 그런 과정을 통해 소위 싸나이로 변신해 가는 게 아닌가. 낯선 땅에서 반드시 필요한 언어인 영어를 하지 못하는 안토니아와 율카를 위해 영어 교사를 자처하는 내레이터의 모습도 아름답다. 그런 선행들이 모여 지난 세대의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었던 게 아닐까. 지금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뿌리를 잊어버린 그런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기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를 잃은 안토니아에게 슬퍼할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쉬메르다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오빠 암브로쉬처럼 들판에 나가 쟁기를 끌어야 했다. 서부 개척시대에 남성 못지않게 거세고 억척스러운 새로운 여성의 전형이다. 지미의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런 안토니아를 걱정하지만, 특유의 낙천스러운 성격으로 안토니아는 빈곤과 난관을 돌파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새로운 제국으로 도약을 시작한 시대에 걸맞는 미국적 여성상이 아닐까 싶다.

 

다음 무대는 지미가 학업과 연세가 드셔서 더 이상 농사가 무리라고 판단한 지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사한 블랙 호크다. 지미와 안토니아의 유년 시절은 이제 끝났다. 지미는 학업을 지속하고, 안토니아는 지미 할머니의 주선으로 지미네 이웃인 할링 부인네 하녀로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들인 레나 린가르드와 티니 소더볼 등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예고한다. 더 이상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는 신세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마 갈등의 전조는 춤바람이지 않았나 어쨌나. 신세대의 반항이 보통 음악과 춤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윌라 캐더의 선택은 아마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열심히 읽고 있는 두 권 모두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어서 빨리 <나의 안토니아>를 읽고 난 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중 하나>에 도전할 계획이다. 한 작가에 대해 세 권 정도의 책을 읽으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윌라 캐더의 다른 책들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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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19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

레삭매냐 2020-11-20 08:27   좋아요 0 | URL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게 알게 되어 열심입니다.

han22598 2020-11-2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레샥메냐님의 추천작가! 윌라님의 책들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0 08:28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너무 재밌어서
다른 걸 못하겠네요 그래...
지금 절반 정도 돌파했습니다.

신간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도 배송 출발했다고 하니 이번 주말
에는 느긋하게 즐겨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고정 코너로 하나... 쿨럭

han22598 2020-11-21 07:05   좋아요 1 | URL
그정인가요? 옴마야....ㅎㅎ

고정코너! 저는 적극 찬성입니다!!!

2020-11-2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7:40   좋아요 0 | URL
<나의 안토니아> 읽다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해서
후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나의 안토
니아> 못지 않게 좋네요.

가히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네요.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
뤼시앵 페브르 지음, 김중현 옮김 / 이른비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에 대한 책을 읽어야지 싶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계획은 꼴랑 한 두어권의 관계 서적을 읽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다고 예의 프로젝트를 포기한 건 아니다. 계속해서 종교개혁의 선전포고를 맡았던 루터나 다른 저작들을 사 모으고 있으니깐.

 

오늘 새벽에 잠깐 일어나서 서가를 둘러보는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뤼시엥 페브르의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이 눈에 들어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첫 장을 넘겼다. 이건 뭐 거의 충격이었다.

 

뤼시앵 페브르는 알다시피 마르크 블르호와 함께 아날 학파의 창시자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문제적 인간 마르틴 루터를 분석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학에 대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루터나 종교개혁 관계의 책들을 비종교인들이 본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점이 나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솔라 피데(sola fide)니 칭의론이니 하는 전문적인 신학 용어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하긴 종교인 행세를 하는 이들도 거의 그 난해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지난 수백년간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페브르 저자는 티롤 출신의 데니플레 신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에서 출발해서 비텐베르크의 신학 교수 그리고 종교개혁가로 거듭나게 되는 인간 루터의 본질을 추적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의 평화, 구원을 원하는 수도사/연구자가 어떻게 해서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 교황주의자들과 타협을 원하던 루터에게 응답한 이들이 그가 원하던 교황주의자들이 아닌 독일 민중이었다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페브르가 루터 신화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가감 없이 학자로서 진짜 루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대정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정말 매혹적이다. 이러니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

 

지금 1/5 지점을 넘기고 있는데, 루터가 고행이나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했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목숨을 걸고, 황제 앞에서 양심선언한 점도. 가히 근대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에라스무스 못지 않은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발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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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미국 대선이 끝났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기록될 얼간이 대통령은 패배가 확실시된 시점에서도 불복할 태세다. 선거를 통해 얼마나 미국 사회와 민주주의 시스템이 엉터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전 세계 시민들이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일찍이 말했다지 않은가. 잘못된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21세기 모바일 시대에 마차타고 다니던 시절의 선거 시스템을 고집하는 그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슈퍼 라떼 꼰대 올리브 키터리지 여사도 돌아왔다. 남편 헨리를 여읜 교사 출신 라떼 꼰대 올리브. 심지어 그녀가 사는 동네조차도 현대 미국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 메인 주다. 아니 어쩌면 올리브 키터리지가 실존 인물이라는 얼간이 대통령에게 투표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원작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으면서 이렇게 멋진 캐릭터를 달랑 한 편의 소설로 때우는 건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작가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모두 13개의 연작소설 같은 구성으로 <다시, 올리브>는 이루어져 있다.

 

내가 오늘 새벽에 만난 새 소설의 맛보기는 네 번째 인스톨인 <엄마 없는 아이(Motherless Child)>였다. 스토리는 간단한다. 대도시 뉴욕에 사는 아들 크리스토퍼와 앤 그리고 네 아이들이 올리브의 초청으로 메인 주의 포틀랜드를 찾는다. 뉴욕 방문 3년 만이라고 하는데, 아마 뉴욕 방문 당시 호되게 며느리 맛을 본 올리브는 다시 아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메인과 뉴욕의 거리 만큼 모자 관계도 썩 원만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이번 미국 대선에서 보여준 도시와 농촌 간의 거리 같다고나 할까.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얼간이 대통령이 대선 캐치 프레이즈로 내세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캠페인에 열광했다. 이미 세계 제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은 반 세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지 않았던가. 제국으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겠다는 자국 우선주의에 침잠하는 모습이 올리브 여사의 그것에서 느껴졌다. 세상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어야 하는데, 올리브 여사는 온 몸으로 그것을 거부한다.

 

또 한 가지 나의 관심을 끄는 건 핏줄에 대한 집착이다. 크리스와 앤 사이의 자식들은 모두 이부형제들이다. 리틀 헨리와 내털리가 올리브의 진짜 손주인 셈이다. 라떼 꼰대 여사는 리틀 헨리에게서 죽은 남편의 모습을 찾는다.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족부학 전문의인 아들과도 사이가 영 껄끄럽다. 자신의 앞에서 서슴지 않고 가슴을 드러내고 모유 수유를 하는 며느리 앤도 영 탐탁지 않다. 이만큼 구 시대의 가치와 정면충돌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또 있을까. 무언가 거대한 것을 통해 사회의 변해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이렇게 전 세대와 다는 육아방식 같은 소소한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통 방식의 토스트 대신 치리오스인지 뭔지 하는 시리얼 타령을 해댄다. 결국 올리브 여사사 나서서 마트에 가서 아이들이 애타게 찾는 치리오스를 사온다. 이번에는 우유가 떨어졌다. 정말 , 맙소사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이제 진짜 크리스 가족을 메인으로 초대한 이유가 등장할 차례다.

 

그것은 바로 전편의 말미에서 만난 잘난체하는 스타일(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하버드대에서 평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역사에 대해 가르친 잭 케니언과 결혼발표다. 참, 잭은 그녀에게 처음에는 '재수 없는 영감탱이'였지 아마. 두 아이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자신에게 냉랭했던 어머니의 아들인 크리스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폭발해 버린다. 결국 그것을 위해 자기 가족을 메인으로 부른 게 아니냐고 격렬하게 대꾸질에 나선다. 아마 올리브는 그 순간, 연인 잭에게 S.O.S.를 칠 생각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몫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아들 크리스 입장에서 볼 때, 무뚝뚝한 엄마 올리브의 새로운 모습이 낯설어 보이진 않았을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올리브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소설이니 말이다. 생전 사용하지 않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나, 어울리지도 않는 스바루 SUV(사실 잭 케니언의 차였다)를 운전하는 모습이 자신이 아는 고루한 시골 할머니의 스타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고 앤에게 야단 맞는 아들의 모습에서 올리브는 자신이 죽은 남편 헨리에게 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결국 아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부인을 얻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가정사가 언제나 그렇듯 별 것도 아닌 다른 차이로 인해 격전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세계대전을 앞두고 부부싸움을 하진 않으니까. 대도시 뉴욕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마트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담아주는 종이봉투가 뉴욕 출신 아이들의 눈에는 생경하다.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또 자신은 어머니가 사별하고 나서 외로움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선 것에 대해 반감을 유감없이 표출한다. 이게 뭔지? 무언가 공평하지 않잖아! 올리브는 사부인이 최근에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앤을 통해 알게 된다. 결혼으로 이루어진 사돈관계에서 대소사가 서로 교류되는 한국이었다면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 그런 상황이 아닌가. 모든 게 그렇듯, 이런 일들을 통해 올리브는 앤의 처지에 공감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런다고 해서 극적은 무언가를 이루고 그러는 건 없지만.

 

나머지 열두개 이야기의 출간을 기다리다 못해 슬쩍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는 치팅을 해보았다. 역시나 전편과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위스키를 사러 갔다가 경찰에게 과속딱지를 띠는 74세의 역사학 교수님, 오지라퍼답게 베이비 샤워에 갔다가 엉뚱한 아이를 차에 싣고 오는 에피소드 등등. 역시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싶었다. 드디어 책이 내일 나온다 하니 기대해 본다.


[뱀다리] 잭 케니언과의 스토리가 너무 궁금해서 전편을 찾아 들고 출근했다. HBO 드라마는 어디에 두었더라.


[뱀다리2] 올리브는 전작에서 당시 대통령을 정신지체라고 표현했었다. 그보다 더 쎈 얼간이 대통령은 뭐라고 부를지 궁금해라.

 


어제 <다시, 올리브> 페이퍼를 쓰고 나서 다시 <올리브 키터리지>의 몇 인스톨을 읽어봤다. 십년 전에 읽은 책이라 그런지 기억이 가 휘발되어 버린 느낌이랄까.

다시 읽으니 주술처럼 그렇게 기억들을 소환되더라. 이런 맛에 재독을 하는 거이지.

 

올리브의 뉴욕행은 재난이었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에서 올리브는 하버드 출신의 잘난 박사 학위를 두 개나 가진 재수 없는 잭 케니언을 만난다. 둘 다 모두 배우자를 잃었고,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진 노인네들이었다.

 

바로 읽고 싶은데 책을 살 수도 없다. 아직 미출간이란다. 그래서 결국 구글링을 해서 원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네 그래. 그렇게 어렵지 않아 내러티브에 집중하면서 읽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단속, 원서에는 Arrested라고 되어 있던데... 하긴 체포가 되진 않았으니 단속이 더 맞는 표현인 듯. 속옷 때문에 잭은 계속해서 프리포트를 타령을 하던데 옛 기억을 되살려 보니 프리포트에 아웃렛이 있었지. 이렇게 읽다 보면 책이 수중에 들어오기 전에 제법 읽겠는 걸 그래.

 

, 그리고 올리브는 공화당에 절대 투표하지 않는 모양이다. 처음에 잭과 만났을 때 개심한 코카인쟁이에게 잭이 투표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한 걸 보면 말이다. 아마 얼간이 대통령에게도 투표하지 않았겠지. 어디선가 92세 된 미국 할머니가 얼간이 대통령 반대 운동을 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문득 올리브 키터리지가 떠오르더라. 재독하면서 그렇게 기억 속에 잘못 각인된 점들을 교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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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1-10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이비 샤워 얘기 정말 재밌어요!! 어쩜 그렇게 베이비 샤워에서 생기는 일에 대한 표현을 잘 하던지!! 그것 말고도 재밌는 이야기가 그득합니다. 하지만, 저는 올리브가 실존 인물이라면 얼간이 대통령 절대 안 찍고 욕을 해줄 것 같아요. 올리브는 꼰대 같은면서도 젊은 사람보다 더 개방적인 면도 있거든요. (제 의견) 그건 그렇고 요즘 가끔 보이는데, 라떼,,, 어느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인가요? ^^;;

레삭매냐 2020-11-10 10:2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제가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읽고
있는데 전임 대통령을 정신지체라고 부르는
걸 보니 ㅋㅋㅋ

‘라떼‘는 꼰대들이 ˝나 때는 말이지~˝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희화화한 거라네요.
저도 직장 동료들에게 한 수 배웠네요.

단발머리 2020-11-10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이웃 분 서재에서 ‘올리브 키터리지‘ 여태 안 읽은 사람 저 뿐이라는 소식에 좀 슬펐는데 ㅎㅎㅎ 레삭매냐님 방에서도 <올리브 키터리지> 만나니, 이 책은 저에게 운명인가 봅니다.
차근차근 따라가려 해도 어마무시 읽을 책이 많네요. 레삭매냐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0-11-10 13:26   좋아요 0 | URL
아니 여적... 올리브 키터리지를 안 읽으신
분이 다 있다니 ㅋㅋㅋ

저희 달궁 모임에서 예전에 이 책으로 독
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저희 멤버 중
의 한 분이 당대 미국 사회를 비유한 작품
이라는 해박한 분석에 격렬하게 동의했던
시절이 있었습죠.

이 자리를 빌어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신랄한 사회비판을 안고
돌아왔을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