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의 여행 - 모로코, 프랑스, 스페인 스케치 여행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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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얄라얄라님 덕분에 알게 되서 읽게 된 책입니다.]


9년 전, 처음으로 캄보디아로 패키지 여행을 갔었다. 그전에 여행은 모두 철저한 나홀로 솔로여행들이었다. 패키지 여행은 편했고, 숙소들은 만족스러웠다. 고생이 없으니, 곧 권태가 밀려 오더라. 동행 덕분에 외롭지 않아 좋았던가. 가이드 아저씨는 우리에게 곧 며칠 동안 원딸라의 환청이 들려오게 될 거라고 경고해 주셨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곳곳에서 그 말이 무엇인지 곧 깨닫게 됐다. 아 그리고 입국 절차하면서 세관원의 노골적인 뇌물 요구에 아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들에게 1달러도 주지 않았다.

 

미국 미시건 출신 만화가 크레이그 톰슨의 모로코 여행기에서 비슷한 추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기독교 근본가정에서 자란 저자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근본주의자 부모님들 덕분(?)에 일체의 미디어는 검열을 받았다고 한다. 허락된 음악은 기독교 가스펠 정도라고 했던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자유의 땅 미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좀 믿을 수가 없었다.

 

크레이그 톰슨은 관광객의 나라 미국인답게 프랑스로 건너가 숱한 싸인회에서 그야말로 팔이 떨어질 정도로 그림을 그리고 싸인을 해댄다. 만화 그리기가 마냥 창작의 활동만은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국 만화가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신이 출판사를 통해 발표한 만화책들이 잘 팔려야 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알려야 하고, 또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는 너튜브나 SNS가 그 지금처럼 위력을 발휘하기 전이니 발바닥에 땀이 나게 열심히 뛰어야 했으리라.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용이할 지도 모르겠다. 뭐 아닐 수도 있겠고.

 


옛 연인으로부터 실연당한 그녀를 잊지 못하면서 모로코의 마라케시와 동쪽의 사막 언저리, 항구도시 에사우이라 그리고 고도 페스를 여행한다. 포스트비건을 자처하는 크레이그 톰슨은 먹거리에는 자유로운 편이다. 무대포 미국인 여행자와 달리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희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1세계 시민다운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주기도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런 편이 더 솔직하게 다가온다. 인간과 짐승의 배설물로 모코로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피혁을 염색하고 가공하는 장면이 역겹다는 말로 증언한다.

 

정부로부터 인가받지 않은 야매 가이드들의 엉터리 투어부터 시작해서, 관광객들로부터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해 혈안이 된 현지인들에 대한 모습을 저자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쩌면 그런 그네들의 모습을 보면, 힐링과 새로운 풍광을 보기 위해 비싼 비용과 시간을 들려 찾은 관광지로 모로코가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런 편견은 버려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다.

 


결국 언어가 잘 통하는 동료 미국인 혹은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과 서로 마음이 잘 맞는 편이라고 고백하는 장면도 그런 대로 받아들일만 하다. 결국 계급과 인종 그리거 언어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 대 인간의 교류는 어디에서나 쉽지 않은 것 같다. 하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끼리도 그건 쉽지 않으니까.

 

디지털 카메라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오로지 현지에서의 스케치 혹은 기억만으로 이런 멋진 여행의 경험을 만화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만화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소심한 성격처럼 자신의 잡담류가 출간된다는 점을 쑥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또 이것도 하나의 돈벌이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마다할 이유가 1도 없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여행지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였는데, 문득 수년 전에 바르셀로나행 비행기표를 알아 보다가 워낙 비싼 가격에 질려 포기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넉넉한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놈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가우디에 대한 찬사는 이제 더 듣기도 그렇더라. 내가 직접 보지 않고 타인의 경험을 통한 간접체험은 이제 그만. 내 팔자에 바르셀로나에 가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도서관에 간 김에 크레이그 톰슨의 <하비비>도 빌려 왔는데 그 두께에 놀랐다. 뭔 놈의 그래픽 노블이 이렇게 두껍나 하고 말이다. 오늘 <담요>는 미처 빌려 오지 못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 작품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참 위키피디아로 저자를 검색해 봤는데 영화배우 뺨치는 프로필 사진이 걸려 있었다.


[뱀다리] 자신도 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캐다나인 행세를 했다는 고백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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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19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의 리뷰로, 저의 얕은 읽기에 숭숭 체 구멍이 뚫렸다는 걸 알겠네요. 근본주의자(?)를 단어 그대로 읽고 넘어갔는데 작가가 미디어 노출을 완전 차단당하고 성장했다니, 그런 내용은 <담요>에 더 있을까요? 제가 사는 지역, 작은 도서관까지 그 어느 곳에도 <담요>는 없더라고요.

레삭매냐 2022-02-19 19:29   좋아요 1 | URL
크레이그 톰슨 프로필은
은 제가 위키피디아를 통해
알게 된 거랍니다.

어떻게 생격 먹은 작가인지
쫌 궁금해져서요.

저도 아직 <담요>는 만나
보지 못했는데 자전적 요소
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
니다.

저희 도서관에서도 관내열
람만 허용하고 대출은 안된
다고 하네요.

얄라알라 2022-02-19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동료 만화가가 그려준 크레이그 톰슨의 초상을 보면서, 저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EBS 인형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레삭매냐님께서는 훈남을 보셨군요. 그렇다면 저도 위키피디아로 다시 고고고

레삭매냐 2022-02-19 19:30   좋아요 2 | URL
전형적인 양키(?) 스타일로
아주 멋드러지게 생겼네요...

만화에서 보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꼬이는데 아마
그런 부분도 일부 있지 않나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mini74 2022-02-19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있나 검색하니 하비비대신 하비의 혈액순환 이야기 뭐 이런책이 뜨네요 ㅠㅠ저희 동네 도서관은 그래픽노블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ㅜㅜ 잘 생겼네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2-02-19 19:31   좋아요 2 | URL
저희 도서관에서도 그래픽 노블
은 일단 대놓고 안사 준답니다.
만화라구요 ^^

제가 몇 차례 희망도서로 신청
했다가 대차게 까여서 이제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렇게 들
어와 있더라구요. 도대체 기준
이 무언지...
도서관의 엄숙주의 참 문제입
니다.

얄라알라 2022-02-19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영신님의 ˝엄마들˝을 검색하려 했더니 제가 검색한 도서관에서 176권이 떴어요. ㅎㅎ하비ㅡ이 혈액순환이야기라니....ㅋㅋㅋ 갑자기 즐거워집니다. 그래픽 노블에 유난히 박한 도서관도 있다는 걸 저도 북플하면서 알았어요.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그래픽노블은 아무리 유명하고 수상작품일지라도 도서구입신청하면 다 취소시켜주시더라고요. 이유는 명쾌 ˝그래픽노블이라서˝....담요는 중고로 사서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 2022-02-19 19:33   좋아요 2 | URL
저희 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
랍니다.

그래픽 노블하면 일단 만화는
절대 안돼지, 뭐 이런 거 같습
니다.

해당 작품의 작품성이나 다루고
있는 주제 등에 대해서는 1도
관심이 없구요. 참...

저도 오늘 차까지 동원해서 멀리
있는 도서관까지 가서 빌려 왔
답니다. 크레이그 톰슨 덕분에
아주 잘 읽고 있습니다.

라로 2022-02-21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담요>만 읽었는데 좋았어요!! 집에 어딘가 있을텐데,, 그건 많이 안 두꺼워요.^^;;
올려주신 책도 찾아봐야겠어요.
저는 작가를 찾아보지 않았는데 함 찾아봐야겠어요,, 어떻게 생긴 것이 잘 생긴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레삭매냐 2022-02-21 14:29   좋아요 0 | URL
<담요>도 땡기네요. 이건 아마
저자의 자전적 썰이 아닐까 조심
스레 추정해 봅니다만.

영문판하고 달라서인진 몰라도
국내판은 장장 592쪽이나 되네
요 ^^

지금 <하비비> 열심히 읽고 있
는데 미국 작가가 이런 작품을
그리고 썼다는 점이 놀랍네요.
아랍 문화에 대해 조사를 많이
했나 보더라구요.

인물 탐색 고고씽 ~

라로 2022-02-21 17:18   좋아요 1 | URL
담요 두꺼워요,,, 다른 책하고 착각했어요. ㅠㅠ
저는 이 담요가 늘 펀홈이랑 헷갈려요.

라로 2022-02-23 18:22   좋아요 1 | URL
아! 저 방금 책나무님께 댓글 달다가 내가 왜 담요의 두께가 얇다고 생각했는지 깨달았어요!! 물론 펀홈이랑 자주 헷갈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담요를 아이패드로 처음 읽었기 때문이에요!!ㅎㅎㅎㅎㅎㅎ 아이패드로 읽은 모든 책은 아무리 길어도 아이패드 두께,,, ㅎㅎㅎㅎㅎㅎㅎ 이제야 속이 시원해요

레삭매냐 2022-02-23 19:38   좋아요 0 | URL
덧글 달아주신 걸 보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지
싶습니다 ^^

소설도 그러한데 그래픽
노블은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요 ~
 




요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책이나 기타 등등을 잔뜩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아침에 재활용 상자에 담겨 있던 책들을 리사이클링 센터에 내다 놓으러 나갔다가...

몇 권의 동화책들을 발견했다.

 

6권을 들고 일단 차에 싣고 출근했다.

그 다음에 램프의 요정 바코드 리더 시스템을 겁나 문질러 댔다.

 

그 중에서 4권은 매입 불가 판정, 나머지 두 권은 각각 900원 그리고 1,100원이 나왔다.

만날 하는 말, 땅을 파봐라 돈 100원이 나오나...

난 리사이클링 센터에서 습득한 책으로 2,000원을 땡기겠다는 속셈을 안고 룰루랄라 램프의 요정을 찾았다.

 

문제는 내가 바코드 리더로 읽은 것과 현장 매입가는 또 다르다는 것이다.

사전에 바코드를 찍어본 결과에 의하면, 모두 균일가 매입이라고 하는데 검수하시는 분은 겁나 꼼꼼하게 책의 상태를 점검해 보신다. 오 놀랍군 그래. 이거 긴장은 무엇?

 

그리고 대망의 매입가 감정의 순간!

한 권은 예상대로 900원 그리고 다른 녀석도 900원이 찍혔다. 그러니까 나의 예상과 200원 차이가 난다는 거다. 현금으로 땡기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을 찾아 봤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이긴 하나 굳이 사야 싶어서 패스했다. 정 읽고 싶다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볼 생각이다.

 

주말에 팔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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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2-18 1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띠지까지 모아놨다가 책을 팔때 장착시키고 갑니다ㅎㅎ

타지역 모지점에서 감정받은적이 있는데 직원분이 갑자기 다리까지 벌려 짜세를 잡으시더니 제가 본 중 가장 꼼꼼히, 프로페셔널하게 검수하더라구요. 괜히 진땀이 나더군요ㅎㅎ

레삭매냐 2022-02-18 14:18   좋아요 2 | URL
이렇게 꼼꼼하게 검수를 하는데도
가끔 헌책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걸 보면 ㅋㅋㅋ

헌책의 세계는 참 재미진 것 같습
니다.

얄라알라 2022-02-18 1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직원분께서 검수하시는 데 책 사이에서, 제가 예전에 썼던 편지가 나온 적이 있어서 땀 쪼르르 ㅋㅋㅋㅋ직원분께 감사드렸어요 ㅎ

레삭매냐 2022-02-18 14:23   좋아요 2 | URL
오옷, 책을 팔러 갔는데
편지가 나온다면... 저도
당황했을 것 같아요 >.<

직원분 센스쟁이 ~

독서괭 2022-02-18 13: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책 팔려고 보니 균일가매입 1000원이 많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땅 파봐라 100원이 나오나” 하시는 말씀 보니 그냥 팔아야겠다 싶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2-02-18 15:23   좋아요 2 | URL
재작년엔가 산 도쿠가와 이에야스
팔려고 했는데 균일가 1,200원이
라고 해서 망설이고 있네요 ^^

요즘 왠놈의 균일가 가격매입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coolcat329 2022-02-18 14: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치 의사 멩겔레 저도 관심가던 책인데 레삭님이 먼저 읽어주세요~☺

레삭매냐 2022-02-18 15:56   좋아요 2 | URL
넵 오늘이나 내일 도서관
에 가서 빌려 볼라구요 ^^

라로 2022-02-18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거 긴장은 무엇?˝ 에서 빵 터져서 저 지금도 이 댓글 웃으며 달고 있어욥!!!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왜냐면 저도 한 5년 전에 살림에 보태겠다고
여기 엘에이에 있는 중고 매장에 책을 팔려고 가져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아들이랑 남편이랑 들어줘서 엄청 많이 가져갔는데
검수 하시는 분이 정말 꼼꼼히;;;
그떄 그 심정 느껴져서 막 공감되는 한 줄의 문장이
저를 막 웃게 하네요.
저 덕분에 한 5년은 젊어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2-18 19:37   좋아요 1 | URL
워낙 텐션 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라, 고 정도의 텐션
이라면 환영할 만하지 않
을까요 ㅋㅋ

책 판 돈으로 꼬맹이 인절
미 사다 줬습니다. 세상에
떡값도 올랐더라구요. 인
플레가 새삼 -

been young, 콩그레츌레이션 ~

mini74 2022-02-18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주로 인터넷 매입하는데 택배료 안 받아서 좋더라고요 ㅎㅎ ~ 긴장돼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낮은 등급 나오면 뭔가 진 듯한 느낌 들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02-18 20:11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 램프의 요정에서
헌책 매입할 적에 주로 인터넷
택배를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생각한 등급하고
많이 다르더라구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램프의 요정이 회사 근처에
있어서 종종 이용하고 있답니다.
 


 

요즘 황현필 아저씨 너튜브에서 조선 역사 컨텐츠를 줄기차게 보고 있는 중이다. 어제는 이순신과 관련된 임진왜란 이야기들을 시청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임진왜란 당시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이었다는 22세의 항왜 사야가, 모화당 김충선(1571~1642)의 삶을 컨텐츠로 봤다. 일본 사무라이로 22년 그리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던 김충선의 삶은 정말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삼천포로 가는구나. 중종, 진성대군 (이혁:1488~1544)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중종에 앞선 조선의 군주는 바로 악명 높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어 총 12년간 집권했다. 그 중에서 폭정의 시기는 말기의 2년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자신의 계모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귀빈 엄씨와 정씨를 참혹하게 주살하고, 그들이 낳은 이복동생들도 모두 귀양 보내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폭정을 하는 가운데, 연산군은 아마 반란이 일어날 경우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반란군들이 옹립할 것을 경계했으리라. 그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훗날의 중종, 진성대군이었다. 미래의 왕위 경쟁자들은 모두 죽였으면서도 진성대군을 살려둔 것도 미스터리다.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1482~1530)가 낳은 적자였다.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은 바로 문관으로서는 성희안(이조참판) 그리고 무관으로서는 박원종(중추부지사)이었다. 그들은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 형제에게도 반정에 참가할 것을 종용했지만 신수근 브라더스는 거부했고, 결국 그들 삼형제는 반정의 와중에 살해됐다. 반정군이 진성대군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냈을 때, 진성대군은 반정이 실패하고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러 병사들을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조강지처 신 씨가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은 신 씨가 중전이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내쫓기게 되었다.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 왕의 실체가 아닐까. 사가로 내쳐진 신 씨가 인왕산인가 어딘가에 중종이 좋아하는 빨간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는 치마바위 전설의 시작인가 어쩐가.

 

그 후 중종은 두 번째 부인으로 장경왕후를 들여 인종을 낳고, 장경왕후가 죽은 다음에는 문정왕후를 들여 명종을 낳는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그야말로 잘 나가던 조선을 수렁에 빠트린 그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너튜버 황현필 아저씨에 따르면 조선의 16세기는 중종 38년과 명종 22년 치세로 60년 정도를 해먹는다고 한다. 성종-중종 연간에 나온 삼강행실도(?)()동국여지승람 등의 출판물이 나왔고, 삼포왜란으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중종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양명학이 유래되었고, 풍기군수 주세붕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 다음에는 군적수포제도 실시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무슨 제도인지 검색을 좀 해봐야겠다.

 

*** 군적수포제 기존의 불법적으로 운용되던 방군수포제(병역을 행할 수 없는 이들이 부득이하게 병역 대신 한 달에 베 3필이나 쌀 9두를 받는 제도)를 양성화한 제도로, 16개월마다 양인 정남에게 베 2필을 징수하여 용병을 고용하는 제도다.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 36(1541)부터 실시되었다.

 

이전 세기인 15세기에는 폭군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태종과 세조 같은 군주들이 부국강병책을 실시했고, 세종과 성종 같은 성군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세자 교육도 받지 못하고, 공신들의 견제를 받게 된 중종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다. 조광조(1482~1520) 같은 신진 사림들을 기용해서, 훈구파 대신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도덕군자 조광조는 사림의 숭앙을 받는 선비로 그가 계속해서 중종의 신임을 얻어 개혁정치를 실시했다면, 어쩌면 중종은 후대에 성군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기득권 계급인 훈구파의 반발을 무마할 수 없어서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주초위왕(走肖爲王)’이 단초가 된 기묘사화(중종 14, 1519)로 조광조가 실각하고, 귀양보내진 뒤 사약을 받으면서 중종 시대의 개혁은 물 건너가 버렸다. 중종 대에는 역모와 반란에 대한 고변이 빈번했는데, 그것도 아마 자신감이 결여된 군주 자신의 모습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국가 조선이 중흥할 수 있었던 모든 기회를 무산시켜 버린 군주 중종, 38년의 재위 시절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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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7 17: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광조가 그렇게 잘생겼다던데요 ㅎㅎ 아깝죠.

레삭매냐 2022-02-17 17:34   좋아요 3 | URL
공부도 잘하고 청렴결백하여
조선시대 그 엄격한 사림들
의 사조로 추앙을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인물까지 좋았다고 하니...
 


 

차를 타고 간만에 외출을 했다. , 차가 너무 더러워서 세차를 좀 해야 하는데...

주말에 눈 혹은 비가 온다고 하니 세차하지 말란다. 아니 어쩌란 말인가 그래.

암튼 차가 너무 드럽다.

 

차에만 있다 보니 봄 같은 날씨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직 겨울은 물러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여전히 겨울이 다가오는 봄과 치열한 전투 중이지 싶다. 어서 봄이여 빨리 오라. 봄이 온다고 해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코로나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지만.

 


재활용 쓰레기들을 버리러 리사이클링 센터에 갔다.

거기서 찾은 책이다.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녀석은 데려오지 않았다. 한국일보-타임라이프에서 나온 <인 스페이스>였는데 나는 우주에 관심이 없으니까. 예전에도 그랬었다.

 

정말 오래 전에, 청계천 책방거리에 가서 아부지와 월드 워 투 시리즈 가운데 열권을 사서 노끈에 묶어서 집에 낑낑대면서 가져온 기억이 난다. 당시 헌책 값도 상당했던 것 같은데 전철을 타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아마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책들은 수도 없이 읽었고, 본전은 톡톡히 했다. 그리고 지금도 소장 중이다. 책은 모름지기 이 정도 가치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 득템한 책은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나온 책이다. 단가는 40,000. 지금도 사만원 짜리 책은 잘 안사지 않나. 하긴 지금 사만원과 그 당시의 사만원은 완전 다르니까.

 

내가 이 책에서 오른 첫 번째 픽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반란군에게 의연하게 맞선 여성 민병대원의 사진이다. 최근에 읽은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에도 빈번하게 전쟁이 등장해서인진 몰라도 왠지 모르게 사진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그리고 공화국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전선에 투입된 여성 민병대원 상당수가 프랑코 반란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1943년 미영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나폴리에서 동맹군에서 점령군으로 변신한 독일군에 대항해서 수많은 게릴라 전사들이 분연하게 대항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한 학교에서 16세에서 20세 청년들이 20명이나 죽었다고 했던가.



마지막 컷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오판으로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30만 대병력에 포위되었다가 탈출한 성공한 미해병의 사진이다.

 

최근 너튜브를 통해 처참했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동안 잘못 있었던 사실들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어서 내다 버린 책이, 또 다른 누군가에는 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뱀다리] 안드레 애시먼의 <하버드 스퀘어>가 도착해서 읽기 시작했다. 스러져 가는 겨울 말미의 기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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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2-12 23: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왕건이 건지셨네요!
이런 책을 버리다니...그래도 이 책은 더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잘된거겠죠?
축하드립니다. 부럽네요 ☺

레삭매냐 2022-02-13 22:35   좋아요 1 | URL
가끔 재활용 센터에서 득템
할 때가 종종 있답니다.

지난 번에는 갠춘한 책들을
집어다가 헌책방에 팔아
먹었답니다.

라이프 워 타이틀은 정말~

얄라알라 2022-02-17 00:25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종종 들리시는 재활용 센터가 어디냐고 묻고 싶어 촐싹거리는 맘을 눌렀습니다.

우연히 이런 보물을 만나신 날은 정말 흐뭇하시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02-12 23: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 권의 책으로 영역을 확대해가고 잘못 안 역사적 사실도 다시 교정하고...
득템한 책의 좋은 영향인 것 같아요.
저는 ‘하버드 스퀘어‘, 희망도서로 신청했어요.
감상, 기대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13 22:36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
닝겡은 이래서 평생
배우고 살아야 하는가
봅니다.

<하버드 스퀘어>는 평
소처럼 휙휙 읽지 않고
꼭꼭 씹어서 읽는 중이랍니다.

타이틀은 그땐 그랬지로 할까
봅니다.

mini74 2022-02-13 10: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페인 내전 정말 알수록 끔찍한 것 같아요. 어릴 적 은인이라 배운 맥아더가 전쟁광에 돌아이 ㅠㅠ ㅎㅎ 매냐님 득템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2-02-13 22:39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 항상 하는 말이 지난
세기에 많은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은 인류 역사에 상흔이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맥아더는 진짜 꼴통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는 필리핀 전역을 시작
하면서 애꿎은 필리핀 사람들만
죽어 나갔으니 말이죠. 일본군이
가장 많이 죽은 전장도 필리핀
이라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2-17 00:28   좋아요 2 | URL
헉! mini74님과 레삭매냐님 댓글 읽다가, 맥아더 장군?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더 알려고 해본 적 없다는 걸 알겠네요. 두 분 말씀에 우선 귀부터 종긋 해보고 지나갑니다.^^ 고맙습니다

라로 2022-02-13 17: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아!! 저렇게 깨끗한 책을 내다 버리다니,,
그런데 책 가격이 그 당시 사사사...사 만원!!
완전 득템하셨는데요!!
<인 스페이스> 가져 오셔서 당근에 파시징,,^^;;
암튼, <하버드 스퀘어> 읽기 시작하셨다고라??
저도 그럼 후다닥~~.

레삭매냐 2022-02-13 22:4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깐요 ^^ 아마 그럴 만한
사연이 있겠죠 -

아 당근 마켓 생각을 못했네요.
근데 당근 마켓에서 책은 인기
가 없더라구요 헷

<하버드 스퀘어>는 오래 전,
66번 버스와 레드 라인을 추억
들을 되새기며 찬찬히 읽어 볼
랍니다.

바람돌이 2022-02-13 17: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늘 여기 부산은 봄날씨 같아요. 외투 없이도 나갈 수 있는.... 이러다가 꽃샘추위 한두번쯤 오고 봄이 오겠네요. 저정도 책이면 저같으면 절대 못버릴거 같은데... 진짜 오늘 득템하셧네요. 축하드립니다. ^^

레삭매냐 2022-02-13 22:49   좋아요 2 | URL
바다에 가본 지가 제법 되었네요.

어제 오늘 날이 너무 좋아서
바다 생각이 절로 나는 그런 시간
들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집
에만 있어서 그랬지만요...

벌써 봄이 온 줄 착각할 뻔했네요.

책의 상태는 너무 좋았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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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폰 작가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던 모든 순간에 행복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만난 윌라 캐더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처럼 엔딩에 가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폰 작가처럼 멋진 문장으로 책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신은 나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해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울 뿐이다.

 

<바람의 그림자> 후반전에는 메인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훌리안 카락스의 숙적 푸메로 경감이 등장해서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의 종결에 나선다. 다니엘 셈페레가 <바람의 그림자>의 비밀과 그 소설의 저자 훌리안 카락스에게 다가갈수록 위험은 폭증된다. 이제는 자신의 목숨과도 기꺼이 바꿀 수 있게 된 베아와의 위태로운 사랑도 지켜내야 한다.

 

도대체 사폰 작가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얼개를 어떻게 시작한 걸까? 미래의 천재작가 훌리안은 결국 사랑하는 페넬로페 알다야와 생이별을 하고 파리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아니 그는 페넬로페와 함께 파리로 도주할 계획이었다. 산 가브리엘 학교에서 만난 친구 미켈 몰리에르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훌리안은 한 때 자신의 후원자였던 리카르도 알다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아마 파리 망명생활이 장장 17년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활동에 착수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다니엘과 페르민이 진실이 밝히기 위해 이전투구 끝에 얻어낸 것들이다. 그 와중에 예전에 악연으로 얽힌 푸메로 경감이 페르민을 그야말로 죽기 전까지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폭력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 자신에게 다니엘은 그만 좌절한다.

 

그 장면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네들이 전쟁이라고 부르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푸메로가 페르민에게 용접용 토치로 가한 고문의 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잠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에 앞서 1936717일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킨 파시스트들이 193941일 반란군의 마드리드 점령까지 3년에 걸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정의가 불의와 부당한 폭력에 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다니엘의 집요한 추적에 진실의 끄트머리만 살짝 보여준 누리아 몽포르트 여사가 그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니엘에게 담긴 원고를 통해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누리에타가 구술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을 통해 사폰 작가는 독자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내 생각에 사폰은 거의 음악으로 치면 교향곡 작곡가에 비견할 만한 그런 수준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작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 훌리안 카락스. 사폰은 더블 페르소나로 자신의 한쪽 분식은 카락스에게 그리고 나머지 분신은 다니엘에게 맡긴 게 아니었을까. 이 둘은 서로 쫓고 달아나는 그런 길항적 존재들이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로는 이해하게 된다. 아니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푸메로 경감이 훌리안 카락스에게 품고 있던 복수의 정념은 무자비하고 집요했다. 오늘 어느 사설에서 보니 사랑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바로 복수라고 하더라. 푸메로는 복수의 순간을 위해 수십 년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극적 긴장감을 엔딩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빌런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라인 쿠베르라는 미치광이가 출몰해서 훌리안 카락스가 남긴 모든 책을 불태우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책들은 오히려 인기가 치솟았다. 이 또한 사폰 작가가 정교하게 만든 하나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죽은 뒤에 비로소 그의 책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처럼, 파리에서의 망명과 결투 그리고 스페인 내전 발발 초창기에 미스터리한 죽음이 그의 책들에 대한 시장 가치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절판본 성애자인 것처럼 말이지. 같은 책쟁이로서 110%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의 티비다보 애비뉴에서 벌어지는 엔딩 시퀀스는 정말 이 화려한 미스터리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복수의 종지부를 필두로 해서, 분노의 혈투 그리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자기희생의 현현까지 문학적 상상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사폰 작가는 그야말로 쥐어짜내는데 성공했다.

 

영화도 아닌 책을 보고 이렇게 감동하기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이래 처음이었다. 그냥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빌런과의 사투 끝에 잠시 스틱스강을 건넜던 다니엘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부활에 성공한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로 흐를 수 있는 <바람의 그림자>에서 개그맨 역할을 맡은 페르민의 활약으로 반전된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이런 걸 탁월한 균형감각이라 부른다지. 페르민은 하신타를 찾는 과정에서 산타 루이사 보호소의 늙은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로시이토와 함께 그곳을 찾는다. 그렇지 세상의 모든 약속들은 지켜져야 하는 법이지,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고 해도. 독자가 감동의 도가니탕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잊은 것들도 작가는 그냥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마지막 장까지 탐욕스럽게 읽은 뒤, 나는 도대체 어떤 사유와 창작의 과정을 거쳐야 이런 작품이 탄생할 수 있게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탁월한 작가가 빚어내는 언어의 지옥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니 그가 남긴 책들을 사냥해서 읽는 수밖에. 바로 <천사의 게임>을 읽기 시작했다.

 

당신이 책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어볼 것을 간곡하게 권한다. 지에브알. 그리고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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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2-10 1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롸잇 나우~~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와 함께 이 책을 담습니다^^

레삭매냐 2022-02-10 11:29   좋아요 3 | URL
제가 왠지 책팔이가 된
그런 느낌이랄까요 ㅋㅋ

버뜨 강추합니다.

청아 2022-02-10 1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교향곡 같은 느낌!!!
레삭매냐님 이렇게나 몇번씩 극찬하시니
저도 꼭 읽어볼래요^^*

레삭매냐 2022-02-10 11:30   좋아요 2 | URL
이 소설을 못하는 게 없
는 넷플릭스에서 맹글어
준다면 정말 ~

왜 이제사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고저 후회막급
입니다.

<천사의 게임>도 진도
쑥쑥입니다. 진정 책쟁이
들을 위한 책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coolcat329 2022-02-1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읽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10 14:56   좋아요 2 | URL
말이 필요 없습니다, 증맬루.

라로 2022-02-10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읽었는데 하나투 기억 안 나니까 다시 읽어야겠어요, 증맬루.

레삭매냐 2022-02-10 17:14   좋아요 1 | URL
읽고 잊기에 대해 제가 죽을 때
까지 써먹는 구절이 있답니다.

김용 선생의 <의천도룡기>에서
무당파의 두목 장삼봉이 절체절
명의 위기에서 명교 교주 장무기
에게 태극권을 전수하는 장면이
랍니다.

영맨 장무기는 태사부가 알려주
는 초식을 보는 족족 까 먹어버
리죠. 그런데 그것이 까먹은 거
이 아니라 내적 흡수라고나 할까
요.

우리 책쟁이들에게 수없이 읽고
까먹고 또 다시 읽기의 무한반복
이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받고, 다시 한 번 고고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