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달 전인가 퇴근하고 나서 동네 산책에 나섰다. 도서관 부근에 동네책방이 하나 있다. 슬쩍 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토론을 하고 있더라. 나도 당장 들어가서 털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날은 조용하게 후퇴를 했다.

 

인스타로 검색해 보니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화요일 모임에 첫 소설모임을 한다는 피드를 만났다. 지난 3월엔가 우리 달궁에서 이미 한 번 턴 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더더욱 참전해야 하지 않을까.

 

평일 저녁 8, 사실 쉽지 않은 시간이다. 장거리 운전을 해서 퇴근한 다음 씻고 부지런히 책방으로 갔다. 이날따라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역시나 첫 만남은 어려워~ 뉴비를 위한 각자 소개는 하지 않고 패스한다. 쿨하군 그래. 마음에 든다.

 

모인 분들과 책을 한 페이지씩 연독한다. , 이런 거 정말 신선하구만 그래. 독서모임이란 항상 책을 다 읽고 만나서 턴다고 생각했었는데 색달랐다. 첫만남은 그렇게 정신 없이 지나갔다. 그 다음 모임에는 이른 속초 여름휴가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화상영이라 패스. 두 시간 동안 영화볼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그날 장마비까지 내려서리. 참 핑계도 다양하다 그치.

 

그리고 어제 두 번째 출격을 하게 됐다. 소설 읽기 대신 이번에도 역시나 인문서적으로 컴백했다. 방식은 동일했다. 참석 인원은 책방지기 양반과 줌으로 참석한 회원 포함해서 총 7명이었다.

 


(어제 책방 주인장이 제공해 주신, 시원한 카모마일 냉차의 빈 잔이다.

연독을 하다 보니 입이 버적버적 마르더라.)


어제 모임에서 연독하고 나눈 책의 제목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이다. 개인적 소회지만, 나는 이미 너튜브가 책을 집어 삼켰다고 생각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으로 문자 텍스트 중심의 읽고 쓰기가 근대인의 상징이었지만, 21세기 인류는 읽고 쓰기라는 전통적 방식 대신 "보고 찍기"라는 새로운 텍스트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새로운 텍스트인 동영상 콘텐츠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도태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다.

 

책은 리터러시,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문해력 정도로 번역되는 부분을 두 명의 학자가 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반 진입 장벽이 좀 빡세긴 하지만, 그 다음으로 갈수록 흥미가 엘리베이팅되는 그런 느낌이다.

 


전통의 신문부터 시작해서, 피씨통신 인터넷 그리고 작금의 너튜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나는 그런 획기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변혁의 시대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누는 부분에서는 나보다 윗 세대분들의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리터러시 이슈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었는데(디지털 문맹), 앞으로 어떤 식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지 모르는 마당에 나는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제 독서 토론에서 내가 꽂힌 부분은 권력으로성 리터러시에 대한 사회경제적 토대라는 표현이었다. 예전의 386세대는 산업화 시대 이후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양질의 교육 세례를 받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신들이 생산한 리터러시를 문화적 자산으로 삼아 사회의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그런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초반에 문자 텍스트의 출현으로 세계를 텍스트로 인식하기 시작한 근대인들의 '과도한 주체성' 문제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앞에서 말한 386세대의 과도한 주체성 이슈는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그들에게 어쩌면 이런 과도한 주체성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지식 생산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 책에서 강조하는 '다양한 맥락들(varying contexts)'에 대신 일종의 도그마랄까 생산자 자신의 읽기와 해석만이 유일하다는 그런 특정한 프레임에 다수 대중을 욱여넣으려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기득권화된 예전 386세대가 대중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견 수긍이 갔다.


미디어 권력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동영상 콘텐츠 텍스트가 기존의 문자 텍스트 기반을 허물고 있는데, 계속해서 문자 텍스트 베이스의 시험이 우리 젊은 세대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고. 이거야말로 문자 텍스트 해석을 독점한 이들의 권력이 아닌가. 무언가 새로운 개혁과 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왜 우리는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걸까. 모임에 마침 고3 학생이 있어서 나는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학생의 대답은,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정도로 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서글펐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의한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적어도 짱똘을 들지 않았던가. 우리는 뭘 했나 자문해 본다.

 


연독은 마침, 내가 그전에 딱 읽은 부분까지 마쳐서 다행이었다. 요즘 이 책 저 책 시작만 하고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혼자서 읽기와 연독의 차이에 대해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기도 했다.

 

책방 연두에서의 독서모임은 무엇보다 집에서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서 매주 2차례 모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비오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는 길에는 잠시나마 참 소울이 충만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기분이가 좋더라.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가기 전에는 힘들고 어쩌구 그런 다양한 이유들로 갈등하지만 막상 참석하고 나서는 이렇게 유용하고 기분 좋고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나중에 근처에 사시는 책동지분과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새로 나온 뉴비가 소설 안 읽는다고 안 나오는 건 아닌지 했다는 말에 속으로 빵 터졌다. 우리 달궁에서도 만날 뉴비를 영입해야 한다고 만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어느 독서모임에서나 하는 대개 비슷한 고민이구나 싶었다.

 


[뱀다리] 책방에 진열된 책 중에서 내가 읽었거나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내가 요즘 두루미에 미친 남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책에 빠졌는데, 아마 책방에는 없겠지. 책이 혹시 있나 싶어서 물어 보려다가 말았다. 중고책방에서 사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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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7-17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동네에 책방이있고 일주일에 두 번 모임이 있다니 너무 부럽네요 ^^

레삭매냐 2024-07-17 11:12   좋아요 2 | URL
그러니깐요 :>
저는 그동안 소설 모임만 했었는데,
여기는 인문 서적이 주력이더라구요.
그래서 색다른 느낌이랄까요.

stella.K 2024-07-17 1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두. 이름 예쁘네요. 울동네도 이런 모임 있으면 좋을텐데. 근데 일주일에 두번이면 넘 빡세지 않나요?
책이 유튜브에 잠식된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책 얘기하는 유튜브도 있잖아요. TV 나오면 극장 문 닫을거다 했는데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거죠 뭐.

레삭매냐 2024-07-17 13:08   좋아요 2 | URL
일주일에 화 금 두 번 독서모임
을 갖습니다. 저는 화요일 하루
정도 가는 것으로.
말씀해 주신 대로 이틀은 빡셉
니다 고저.

문제 텍스트 소비하는 방식이
확실히 예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라로 2024-07-17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책에 진심이시고 멋짐 뿜뿜 레삭매냐님! 동네책방 독서모임까지!! 👍👍

레삭매냐 2024-07-17 13:57   좋아요 0 | URL
그동안 적적했습니다 라로님.

책 사기 보다 책 읽고 쓰기를
진심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책방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오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 운치가 있었답니다.

자목련 2024-07-17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네책방에서 독서모임이라니, 좋은 시간 보내고 오셨네요.
책방 <연두> 이름도 예쁘고요. 궁금해 검색도 살짝~~

레삭매냐 2024-07-17 14:36   좋아요 1 | URL
연독 경험은 또 처음이라 신선
했답니다.

아주 자그마한 동네책방이자
문화 진지 같은 느낌이랄까요.

페넬로페 2024-07-17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도 읽기 어려운 호메로스, 사기열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연독했거든요.
같이 읽으니 좋더라고요.
요즘 저희들도 뉴비를 영입하는데 내공 있는 좋으신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독서 모임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 뿌듯해요^^

레삭매냐 2024-07-17 22:38   좋아요 2 | URL
<호메로스>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땡기는군요.

연독 파워 !

페넬로페님의 독서 모임 대흥행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그레이스 2024-07-22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네책방 넘 부러워요
어느 동네인지 이사가고 싶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4-07-22 23:20   좋아요 2 | URL
제가 사는 동네는 촌으로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그런
마을인데, 희한하게도 독립
서점이 두 군데나 있다는.

게다가 독서모임까지.
 
신 신 DIEU DIEU - 어느 날, 이름도 성도 神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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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만난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신신>을 읽었다. 빌리기는 오래 전에 빌렸으나 읽지 못하고 뭉개고 있다가, 어제 반납 마감일에 도서관에 들고 가서 못다 읽은 절반 정도를 다 읽고 나서 개운하게 반납했다. 문제는 워낙에 읽다만 시점과 간격이 크다 보니 그전에 읽은 부분들이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흥미로운 이 그래픽노블의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다. 아마 시작이 인구조사를 하면서, 아무런 삶에 흔적을 지니지 않은 신이 등장하지 않던가. 세상에 신의 이미지는 정말 많지만, 아무래도 기독교권의 나라인 프랑스다 보니 여기서 말하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차용하게 되지 싶다. 그는 절대 제대로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대부분 그의 뒷모습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그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근원적 질문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래픽노블의 어디선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을 보게 됐다. 좀 더 심오하게 파고 든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시점에선가 모두가 소멸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이런 시작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

 

사실 그런 고차원적 문제보다는 신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존재를 증명하러 나선 일단의 과학자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법적 소송 등이 흥미로웠다. 언제부터인가 사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되었다. 굶주린 늑대들처럼 법조인들과 결탁한 일단의 무리들이 신을 재판정으로 소환한다. 이런 부분은 좀 일종의 클리셰이라고나 할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의 존재라고 볼 수 있는 신을,인간이 고안해낸 법정에서 그의 실존을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가 아닐까.

 

더 흥미로운 건, 신을 소재로 한 책들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갔다는 점이다. 그동안 쓸거리가 없던 문학계에 신의 등장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물 들어올 적에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거의 모두가 나서서 신을 팔아 마케팅하는데 여념이 없다. 상품화가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신은 소위 말해서 팔리는 상품이었다.

 

보험이 대표적인 불안을 자극하는 장사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신의 이미지를 팔아야 하는 장사치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호재가 또 있을까.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설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사까지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 마르크-앙투안 마티외는 종교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신의 부상에 한몫한 미디어가 마지막에 나서서, 신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라고 사주한다. 대중에게 그렇게 이미지가 소모된 신은 미디어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이상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그렇게 소비된 상품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문제일 뿐. 신의 부상이 극적이었던 것처럼, 퇴장 역시 극적으로 해결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저자가 구상하던 서사의 결을 제대로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복잡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대충 건너 뛰면서 그래픽노블을 읽었다. 당장의 살이에서 제시되는 문제들과 씨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책마저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그냥 나는 쉽게 소비하고 싶은 그런 그래픽노블은 원했지만, 나에게 <신신>은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하지만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과 대면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당장에 뭘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고. 또 그렇게 다음으로 미루면서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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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운명 1 창비세계문학 98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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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그로스만의 이 대작이 드디어 출간된다니 믿을 수가 없다. 떨리는 손구락으로 일단 1권 주문.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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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2 - 비무초친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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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조영웅전>에 푹 빠져 산다. 마침 60부작 드라마 <사조영웅전 2024>가 상영 중이라, 드라마도 보면서 기존의 2017 사조영웅전과 비교도 하고 또 원작도 보는 삼박자 합이 기가 막히다. 이번 드라마 시리즈에서는 곽정의 몽골 행적이 몇 컷으로 처리되고 드러내 버렸는데, 원작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몽골 부분에 할애하고 있었다. 7년 전, 드라마도 현재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작에 충실하게 담아냈다.

 

물론 허구의 이야기겠지만, 곽정이 테무친 대칸의 몽골 통일에 한몫한다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테무친 대칸이 어릴 적 맹우이자 라이벌이었던 자무카와 왕칸을 격멸하고 결국 몽골의 지배자가 됐다. 이렇게 실제 역사에 가공의 인물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 무협소설의 재미를 배가하는 기술을 김용 선생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 천년 전의 일에 대해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훗날 대칸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테무친의 4남 툴루이를 곽정의 의형제로 삼고, 대칸의 막내딸 화쟁의 부마가 되는 과정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결국 그에 대한 보상으로 대칸이 곽정에게 많은 금품을 하사하는데, 곽정이 중원 장가구에 등장해서 마구 돈을 쓰는 장면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소설을 보고 나니 바로 이해가 됐다. 도대체 꼬마 소년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지? 그리고 영웅하면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탈것 아닌가. 한혈보마의 내력을 지닌 소홍마를 등장시켜 곽정의 파트너로 만들어준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벤틀리나 람보르기니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장가구에서 곽정은 운명의 연인 황용(이하 용아)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용아는 동해 도화도에 칩거 중인 동사 황약사의 딸로 무공 실력은 고수들에 비해 모자라지만, 어려서부터 익힌 여러 지식과 잡기 그리고 임기응변에 능한 그런 캐릭터로 그려진다. 연인 곽정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불속에라도 뛰어들 그런 기세를 지닌 주인공이다. 용아는 왠지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장취산의 짝 은소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이런 방식으로 슬쩍 베끼면서 소모하는 걸까.

 

몽골 파트를 제외하면, 새로운 드라마는 원작과 거의 유사한 궤적을 그린다. 장가구에서 비무초친에 나선 목역(양철심)과 목염자 부녀를 만나고 또 이 작품에서 악역을 자처하는 완안강(양강/소왕야)과의 악연도 시작된다. 자신을 돕다가 라마승 영지상인의 독사장에 당한 왕처일 선배를 구하기 위해 조왕부에 용아와 뛰어든 곽정은 한바탕 소동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 가운데 완안강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양철심-포석약 부부는 18년만의 꿈같은 해후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의 행복한 만남은 해피 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말이다.

 

강남칠괴 사부들은 곽정을 중원에 내보내면서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고수들이 넘실거리는 강호에 철부지 어린아이를 내보내는 심정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지만 또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로소 강호에 나가봐야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에 강호에 출진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라는 말을 제자에게 남긴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병법에도 삼십육계가 나와 있는 것처럼 실전에서 내가 상대하는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만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자신의 실력이 상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대결에서 물러나면 살 수 있겠지만 만약 살수로 공격하는 고수를 상대하다가 애꿎은 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의 눈은 정확했다. 10년을 곽정에게 무공을 전수했지만, 아둔한 이 청년이 깨친 무공 실력은 강호에서 데뷔전을 치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강호에 나오자마자 바로 완안홍열 휘하에 포진한 다수의 고수들과 목숨을 건 혈투에 휘말리게 되었다. 몽골 사막에서 체력 단련을 하고 강남칠괴 선배들에게 수련을 쌓은 게 1단계 수업이었다면, 이제부터 실전 2단계 수업이 시작된 셈이다. 뭐랄까 이건 마치 게임에서 미션 클리어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조왕부에 잠입한 곽정이 양자옹이 애지중지하던 각종 보양식을 먹이면서 12년간 기른 뱀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단박에 내공치가 올라가 버렸다. 이건 또 일종의 치트키라고 해야 할까. 작가가 준비한 치밀한 빌드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간 양자옹이 곽정의 피를 빨겠다고 덤비는 장면은 그야말로 코미디처럼 다가왔다. 아니 지가 무슨 뱀파이어도 아니고 말이지. 문득 여기서 착안한 뱀파이어 무협 드라마는 어떨까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조왕부 산하 네 고수와 백타산 바람둥이 구양극까지 가세해서 곽정과 용아를 위기로 몰아가던 순간, 조왕부 마른 우물 지하에 숨어 있던 완안강의 비밀 스승 매초풍(매약화)이 등장하면서 밀리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주화입마에 빠진 매초풍을 돕던 곽정은 우연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매초풍의 손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숨막히는 무공 대결에 이은 이런 극적인 상황전환까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드라마에 등장한 귀운장 육승풍에 대한 이야기를 매초풍이 들려준다. 황약사의 제자들은 모두 풍자 돌림이고 죽은 자신의 남편 진형풍과 매초풍이 황약사의 2-3번째 제자이고, 육승풍이 4번째 제자였다고 알려준다. 죽은 남편 진형풍과 사랑에 빠져 스승의 구음진경 하권을 들고 오지 몽골로 튀어서 비전을 수련하다가 강남칠괴들과 곽정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나라 장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라는 조왕 완안홍열의 존재 역시 허구의 설정이다. 몽골 사신으로 파견되어, 부족간의 이간책으로 몽골인들의 분열을 획책했고 일찍이 테무친의 몽골사단이 훗날 금나라의 위협이 될 거라는 점도 파악했다. 자무카와 왕칸을 부추겨서 테무친의 배후를 치게 한 것도 알고 보면 결국 조왕의 계략이었다. 송나라의 충신 악비가 남긴 병서인 무목유서를 찾으라고 완안강과 수하들에게 닦달해대고, 또 자국에 대항하는 송나라와 몽골의 동맹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쇄하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 바로 완안홍열이었다. 그리고 보면 양부 홍열과 양자 강의 콤비가 빌런 2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재미라면, 원작은 드라마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보완하는 교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곽정의 무공이 어디까지 도달하게 될지 그리고 곽정-용아 커플의 모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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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27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점은 세 개네요.
아직도 중국에서는 60부작도 있군요. 예전 80년대만 해도
드라마 100회한다면 막 서로 축하하고 난리였는데
지금 미니시리즈 16회도 너무 길다하여 12회로 끝나는 드라마도 많이 있더군요.
주말 드라마도 30부가 최장이구요.
김용 번역연구회가 있다니 대단한가 봐요. 읽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ㅠ

레삭매냐 2024-07-17 10:48   좋아요 1 | URL
드라마 팔로우업하다가 책의 진도가
늦어져서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해
버렸네요.

드라마는 갈수록 재밌어지네요.

철혈단심 30부작 가운데 22회까지
따라갔답니다.

stella.K 2024-07-17 11:02   좋아요 1 | URL
ㅎㅎ 이제야 답글을 다시다닛! 그래도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4-06-30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한다는 홍보는 봤는데,,, 너무 길어서 시도 못했습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4-07-17 10:49   좋아요 1 | URL
일주일에 다섯 편씩 방영 중인데
너무 재밌어서 어제도 새벽까지
봤답니다 :>

못본 편들은 만화로라도 봐야 하나
어쩌나 싶습니다.
 
사조영웅전 1 - 몽고의 영웅들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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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우연히 신필이라 알려진 김용 선생 탄생 100주기를 맞아 다시 제작되었다는 <사조영웅전> 시리즈를 보게 됐다. 세상에나, 그 옛날에도 읽지 않고 버티던 무협지 <영웅문>을 이제 다시 읽게 될 줄 누가 알았나 그래. 고려원에서 그 시절에 나온 영웅문 1탄의 부제가 아마 <몽고의 별>이었지. 왜 그렇게 제목을 붙였는지 원작을 보면서 알게 됐다.

 

일단 드라마를 5편까지 다 보고 나서 도서관에 가서 원작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와 원작의 시작점은 상당히 달랐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곽정의 탄생 비화와 몽골에서의 활약에 대한 비중이 상당했지만, 드라마는 몇 컷 정도로 죄다 걸러 버리고 중원에 데뷔한 시점에서부터 다룬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부분들은 모두 플래시백으로 처리해 버린 점이 원작과 상이했다.

 

이래서 원작을 봐야 한다고 하는 걸까? 원작은 연대기순으로 남송 임안부 우가촌에 살던 곽소천/이평 부부와 양철심/포석약 부부의 비극적 삶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진칠자 중의 한 명인 구처기 도사가 송 조정의 세작들과 내통하려던 금나라 밀사들을 처치했지만, 그 때 구처기에게 습격당한 금나라 장종의 6번째 아들 완안홍열이 포석약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해한다. 그리고 그는 송의 관리 단천덕을 조종해서 곽소천/양철심 의형제의 집안을 박살내고 포석약을 납치해서 금의 수도 연경으로 향한다.

 

이 때, 이평과 포석약은 각각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구처기는 각각의 아이들에게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간 정강지치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곽정과 양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곽정은 몽골 초원으로 흘러가 그곳에서 자라게 된다.

 

그 전에 구처기 도사와 강남칠괴로 알려진 강남의협들의 대결도 벌어지는데,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적은 분량으로 다뤄졌다. 이평을 인질로 잡은 단천덕은 구처기의 추격을 피해 법화사 초목대사의 슬하에 숨어 있었는데 오해가 빚어지는 바람에 구처기 도사와 강남칠자들의 대결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서로간의 오해를 풀고, 강남칠괴는 곽정을 맡고 구처기는 양강을 맡아 18년 뒤에 가흥의 취선루에서 무예 대결을 하자는 내기를 한다.

 

한편 몽골에서 자라게 된 곽정은 당시 몽골 초원을 휩쓸던 테무친(훗날 징기즈칸) 대칸과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것 또한 송--원나라로 이어지는 격변의 정세를 겨냥한 김용 선생의 소설적 장치가 아닌가 싶다. 한족 출신 소년이 몽골에서 발흥 중이던 테무친 부족의 일원처럼 행동하면서 남다른 의협심을 기르며 언젠가 아버지의 원수 단천덕을 죽여 복수하겠다는 아주 클리셰이의 전범적 진행이 아닌가 말이다.

 

역시 주인공답게 곽정이 다른 건 몰라도 불우한 이웃을 돕고, 강호의 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무공을 익혀 천하오절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 바로 곽정 아니겠는가. 드디어 몽골 초원에 등장한 강남칠괴로부터 무공 수련이 시작되고, 테무친의 4남 툴루이와는 의형제로 맺어질 정도로 끈끈한 관계가 잇달아 등장한다.

 

테무친의 몽골 부족 통일전쟁이 계속되던 긴박하면서 흥미로운 전개도 역사성과 더불어 통속무협 소설의 감칠맛처럼 작동한다. 사조 3부작 가운데 마지막이었던 <의천도룡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주원장 같이 실제 역사에 등장하던 인물들을 적절하게 섞으면서 가독성을 높이는 신필 선생의 작법이 다른 건 몰라도 역시나 재미 하나만큼은 최고조로 뽑아내는구나 싶었다.

 

훗날 테무친의 4영걸로 알려진 철별(제베)를 곽정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전쟁터에서 테무친의 목에 화살을 먹인 원수 철별을 모두가 잡아 죽이겠다고 나선 살벌한 상황 속에서 어리버리한 곽정이 돕겠다고 나서 대칸의 주목을 끄는 장면으로 이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 정도 관계 설정을 해놔야 나중에 중원에 대한 몽골 침략이 본격화되었을 때, 대칸과 곽정이 맞짱을 뜬다는 극적인 판이 짜여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풍쌍살/동시철시로 알려진 매초풍-진현풍과의 무시무시한 대결도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고, 강남칠괴와 곽정이 동시 진현풍을 죽여서 매초풍과는 원수 사이라고만 들었는데 원작을 보니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이 부분을 만화로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사투에서 강남칠괴와 곽정의 분전으로 진현풍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5형제 장아생이 한소영과 곽정을 구하려다가 장렬하게 산화한다.

 

곽정의 무공 수련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느닷없이 전진교의 장문인인 마옥 도사가 등장해서 곽정에게 호흡하는 법, 잠자는 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곽정의 수련이 배가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에도 등장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가 되었다.

 

일찍이 김용 선생의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지나친 중화중심주의에 대한 지적이 있었는데, 아직 초반이라 그런 진 몰라도 그런 부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경계하고 책을 읽는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저러나 다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역시나 통속 무협소설답게 재미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구나. 읽는 속도가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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