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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신 DIEU DIEU - 어느 날, 이름도 성도 神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도서관에서 만난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신신>을 읽었다. 빌리기는 오래 전에 빌렸으나 읽지 못하고 뭉개고 있다가, 어제 반납 마감일에 도서관에 들고 가서 못다 읽은 절반 정도를 다 읽고 나서 개운하게 반납했다. 문제는 워낙에 읽다만 시점과 간격이 크다 보니 그전에 읽은 부분들이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흥미로운 이 그래픽노블의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다. 아마 시작이 인구조사를 하면서, 아무런 삶에 흔적을 지니지 않은 신이 등장하지 않던가. 세상에 신의 이미지는 정말 많지만, 아무래도 기독교권의 나라인 프랑스다 보니 여기서 말하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차용하게 되지 싶다. 그는 절대 제대로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대부분 그의 뒷모습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그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근원적 질문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래픽노블의 어디선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을 보게 됐다. 좀 더 심오하게 파고 든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시점에선가 모두가 소멸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이런 시작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
사실 그런 고차원적 문제보다는 신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존재를 증명하러 나선 일단의 과학자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법적 소송 등이 흥미로웠다. 언제부터인가 사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되었다. 굶주린 늑대들처럼 법조인들과 결탁한 일단의 무리들이 신을 재판정으로 소환한다. 이런 부분은 좀 일종의 클리셰이라고나 할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의 존재라고 볼 수 있는 신을,인간이 고안해낸 법정에서 그의 실존을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부터가 무리가 아닐까.
더 흥미로운 건, 신을 소재로 한 책들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갔다는 점이다. 그동안 쓸거리가 없던 문학계에 신의 등장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물 들어올 적에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거의 모두가 나서서 신을 팔아 마케팅하는데 여념이 없다. 상품화가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신은 소위 말해서 팔리는 상품이었다.
보험이 대표적인 불안을 자극하는 장사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신의 이미지를 팔아야 하는 장사치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호재가 또 있을까.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설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사까지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 마르크-앙투안 마티외는 종교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신의 부상에 한몫한 미디어가 마지막에 나서서, 신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라고 사주한다. 대중에게 그렇게 이미지가 소모된 신은 미디어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이상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그렇게 소비된 상품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문제일 뿐. 신의 부상이 극적이었던 것처럼, 퇴장 역시 극적으로 해결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저자가 구상하던 서사의 결을 제대로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복잡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대충 건너 뛰면서 그래픽노블을 읽었다. 당장의 살이에서 제시되는 문제들과 씨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책마저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그냥 나는 쉽게 소비하고 싶은 그런 그래픽노블은 원했지만, 나에게 <신신>은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하지만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과 대면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당장에 뭘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고. 또 그렇게 다음으로 미루면서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언제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