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달 전인가 퇴근하고 나서 동네 산책에 나섰다. 도서관 부근에 동네책방이 하나 있다. 슬쩍 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토론을 하고 있더라. 나도 당장 들어가서 털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날은 조용하게 후퇴를 했다.
인스타로 검색해 보니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화요일 모임에 첫 소설모임을 한다는 피드를 만났다. 지난 3월엔가 우리 달궁에서 이미 한 번 턴 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더더욱 참전해야 하지 않을까.
평일 저녁 8시, 사실 쉽지 않은 시간이다. 장거리 운전을 해서 퇴근한 다음 씻고 부지런히 책방으로 갔다. 이날따라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역시나 첫 만남은 어려워~ 뉴비를 위한 각자 소개는 하지 않고 패스한다. 쿨하군 그래. 마음에 든다.
모인 분들과 책을 한 페이지씩 연독한다. 아, 이런 거 정말 신선하구만 그래. 독서모임이란 항상 책을 다 읽고 만나서 턴다고 생각했었는데 색달랐다. 첫만남은 그렇게 정신 없이 지나갔다. 그 다음 모임에는 이른 속초 여름휴가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화상영이라 패스. 두 시간 동안 영화볼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그날 장마비까지 내려서리. 참 핑계도 다양하다 그치.
그리고 어제 두 번째 출격을 하게 됐다. 소설 읽기 대신 이번에도 역시나 인문서적으로 컴백했다. 방식은 동일했다. 참석 인원은 책방지기 양반과 줌으로 참석한 회원 포함해서 총 7명이었다.
(어제 책방 주인장이 제공해 주신, 시원한 카모마일 냉차의 빈 잔이다.
연독을 하다 보니 입이 버적버적 마르더라.)
어제 모임에서 연독하고 나눈 책의 제목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이다. 개인적 소회지만, 나는 이미 너튜브가 책을 집어 삼켰다고 생각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으로 문자 텍스트 중심의 읽고 쓰기가 근대인의 상징이었지만, 21세기 인류는 읽고 쓰기라는 전통적 방식 대신 "보고 찍기"라는 새로운 텍스트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새로운 텍스트인 동영상 콘텐츠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도태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다.
책은 리터러시,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문해력 정도로 번역되는 부분을 두 명의 학자가 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반 진입 장벽이 좀 빡세긴 하지만, 그 다음으로 갈수록 흥미가 엘리베이팅되는 그런 느낌이다.
전통의 신문부터 시작해서, 피씨통신 인터넷 그리고 작금의 너튜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나는 그런 획기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변혁의 시대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누는 부분에서는 나보다 윗 세대분들의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리터러시 이슈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었는데(디지털 문맹), 앞으로 어떤 식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지 모르는 마당에 나는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제 독서 토론에서 내가 꽂힌 부분은 권력으로성 리터러시에 대한 사회경제적 토대라는 표현이었다. 예전의 386세대는 산업화 시대 이후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양질의 교육 세례를 받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신들이 생산한 리터러시를 문화적 자산으로 삼아 사회의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그런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초반에 문자 텍스트의 출현으로 세계를 텍스트로 인식하기 시작한 근대인들의 '과도한 주체성' 문제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앞에서 말한 386세대의 과도한 주체성 이슈는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그들에게 어쩌면 이런 과도한 주체성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지식 생산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 책에서 강조하는 '다양한 맥락들(varying contexts)'에 대신 일종의 도그마랄까 생산자 자신의 읽기와 해석만이 유일하다는 그런 특정한 프레임에 다수 대중을 욱여넣으려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기득권화된 예전 386세대가 대중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견 수긍이 갔다.
미디어 권력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동영상 콘텐츠 텍스트가 기존의 문자 텍스트 기반을 허물고 있는데, 계속해서 문자 텍스트 베이스의 시험이 우리 젊은 세대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고. 이거야말로 문자 텍스트 해석을 독점한 이들의 권력이 아닌가. 무언가 새로운 개혁과 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왜 우리는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걸까. 모임에 마침 고3 학생이 있어서 나는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학생의 대답은,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정도로 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서글펐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의한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적어도 짱똘을 들지 않았던가. 우리는 뭘 했나 자문해 본다.
연독은 마침, 내가 그전에 딱 읽은 부분까지 마쳐서 다행이었다. 요즘 이 책 저 책 시작만 하고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혼자서 읽기와 연독의 차이에 대해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기도 했다.
책방 연두에서의 독서모임은 무엇보다 집에서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서 매주 2차례 모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비오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는 길에는 잠시나마 참 소울이 충만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기분이가 좋더라.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가기 전에는 힘들고 어쩌구 그런 다양한 이유들로 갈등하지만 막상 참석하고 나서는 이렇게 유용하고 기분 좋고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나중에 근처에 사시는 책동지분과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새로 나온 뉴비가 소설 안 읽는다고 안 나오는 건 아닌지 했다는 말에 속으로 빵 터졌다. 우리 달궁에서도 만날 뉴비를 영입해야 한다고 만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어느 독서모임에서나 하는 대개 비슷한 고민이구나 싶었다.
[뱀다리] 책방에 진열된 책 중에서 내가 읽었거나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내가 요즘 두루미에 미친 남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책에 빠졌는데, 아마 책방에는 없겠지. 책이 혹시 있나 싶어서 물어 보려다가 말았다. 중고책방에서 사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