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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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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을 마저 다 읽을 계획이었는데 사무실에 책을 두고 가는 바람에 급회전에서 2년 전 동네 책축제 때, 창비 정기구독을 하면서 서비스로 받아온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을 읽게 됐다. 창비 설렉션 중에서 내가 이 책을 고른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얄팍한 두께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창비만의 독특한 표기법이 눈에 거슬렸지만, 뭐 책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가뿐하게 무시해 버리면 되니까. 굉장히 무거운 주제였는데 술술 익히는 바람에 하루 저녁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모든 책을 이런 속도로 다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너무 다르다.

 

소설은 초반에만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도쿄 외곽에 사는 못 도매상이자 기흉환자인 가 기흉 치료를 위해 만난 의사 스구로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촌마을 의사 스구로의 실력이 의심되지만, 공기 주입을 위해 주삿바늘을 찌르는 그의 냉철하면서도 정확한 솜씨에 의사로서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묘하게 교차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평온한 일상 가운데 주변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에는 지금과는 다른 얼굴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나레이터가 깨닫게 되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자 역시 전쟁에 참가하긴 했지만, 끝무렵이라 난징대학살 같은 가증스러운 전쟁범죄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레이터 나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 스구로가 전쟁 중에 살아있는 미군포로를 생체해부한 전범이었고, 그 죄로 전후에 징역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나레이터에서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닥터 스구로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그 후 나레이터의 역할이 소멸되면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야말로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외과학부생 스구로는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대학병원에 소개된 무료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다. 특히 자신이 처음으로 맡은 아지매에 대한 애착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다. 이미 이때부터 자본의 힘은 사람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편, 미군의 계속된 공습으로 인근 F(아마도 후쿠오카로 추정된다)가 전소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젊은 의대 학부생 스구로의 양심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의학부장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는 교수진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의술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독자에게 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물며 독자도 이럴진대,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청년 스구로의 양심은 오죽했을까. 의학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타베 부인 수술을 진행하던 하시모토 교수의 실수로 환자가 사망하자, 교수는 더 큰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아마 그들도 그 당시에 그런 결정이 후에 어떤 파국을 초래할지 몰랐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만. 그 결정은 포로로 잡힌 미군을 상대로 정말 끔찍한 생체실험을 하겠다는 것이다. 군의관과 군부까지 개입된 이 사건으로 전후에 열린 재판에서 관련자가 모두 처벌받고 주임교수는 자살했다고 신문기사는 전하는데, 엔도 슈사쿠 작가는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독자의 추론에 맡긴 것 같다.

 

한편, 제목에 등장하는 바다는 규슈 앞의 그것이다. 쉴 새 없이 쓸려오는 검푸른 빛깔의 바다라는 자연은 얼떨결에 생체해부팀 합류를 결정한 스구로의 양심을 묵직하게 타격한다. 그토록 자신이 살리려고 노력했던 아지매는 시바타 조교수의 결정으로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성공확률이 지극히 낮은 수술에 동의하고 결국 폭격 와중에 자연사하고 만다. 동료이자 친구 고베 출신의 토다는 소설 후반에 드러나게 되지만, 이미 스구로가 갈등하는 양심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어쩌면 토다야말로 모두가 죽어가는 참혹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그리고 양심보다는 수치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인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비양심으로 무장된 토다는 자신의 절도를 다른 친구에게 뒤집어씌우고, 사촌과 간통하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하녀의 위험천만한 소파수술을 직접 집도하고 내쫓아 버리는 냉혈한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포로들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에도 벌벌 떠는 스구로를 대신해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바다로 형상화된 자연이 스구로로 대변되는 양심을 대변한다면,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이라는 핑계로 양심을 마취시키고 비인간적 활동을 합리화시키는 일단의 의사들과 군부는 제목에 등장하는 독약이다. 어쩌면 전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같은 아시아 민족을 위한다는 대동아전쟁의 실체는 결국 침략전쟁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스구로 같은 개인이 그런 치명적인 독약이 조종하는 거대한 움직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고백은 어쩐지 비겁한 변명처럼 들렸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같이 읽고 있는 나탈리아 긴츠부르크의 <가족어 사전>이나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이 그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스구로의 양심을 그렇게 괴롭히던 규슈 앞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엔도 슈사쿠 작가의 <침묵>에서 기리스탄과 후미에 서사를 통해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을 만났다. 현실을 너무나 닮은 <바다와 독약>에서는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 홀로 남은 인간의 양심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침묵>부터 다시 한 번 읽어야할 것 같다. 너무 무거운 주제에 한숨부터 나온다.

 

[뱀다리] 이 소설이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 번 보고 싶다. 냉혈한 토다 역은 와타나베 켄이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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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6-3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에서 나온 일본문학책을 몇 권 주문했는데 (여기서밖에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이라) 일본어 표기법이 저도 거슬려서 왜 굳이 다르게 표기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레샥매냐님 리뷰를 보고 반가웠어요. 엔도 슈사쿠는 처음인데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레삭매냐 2016-06-30 21:37   좋아요 0 | URL
창비는 왜 국어표준 표기법을 따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대표작으로 권해 드리고
싶지만, <바다와 독약>이 좀 더 무난하지 않을까 하네요.
 
매직 스트링
미치 앨봄 지음, 윤정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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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 건 화자가 바로 음악그 자체라는 점이다. 음악은 신처럼 전지전능하며 그가 사랑하는 제자의 삶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꿰고 있다. 그래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천재 기타리스트 프랭키 프레스토의 파란만장한 삶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들려 준다. 또 한 가지 서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탄생에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것도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무대에서 죽은 가히 기타의 신이라고 할만한 사나이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어쩌면 미스터리 소설 찜쪄 먹을 정도의 프랭키가 구사하는 속사포 기타 연주 같은 그런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을수록 독자가 빠져 들지 않을 재간이 있나 그래.

 

서두에 포레스트 검프를 언급했는데 로버트 저메키스의 감독의 영화에서 약간 어리숙한 우리의 주인공 검프가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했다면, 소설에서 프랭키 프레스토 역시 미국 팝역사의 굵직한 대표선수들과 자웅을 겨룬다. 캐나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신해서 무대에 섰으며,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밀항한 영국에서는 두손가락의 천재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에게 한 수 배운다. 듀크 엘링턴과도 만났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도시인 디트로이트와 내슈빌 그리고 뉴올리안스를 전전하며 당대의 대스타를 만나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엮어낸다. 그것은 마치 촌에서 강호로 나온 초짜가 고수들과 대결을 통해 비전의 무공을 배워 마침내 강호를 평정했노라는 무협지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프랭키에게 진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한다 하는 그런 아티스트들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비야레알에서 만난 장님 기타리스트 엘 마에스트로였다. 연주하기 전에 먼저 들으라는 그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드럽게 기타줄을 다루라는 주옥 같은 명언들을 프랭키는 가슴 속 깊이 간직한다. 팝음악이라는 강호에서 고수가 되기 위해 엘 마에스트로의 레슨이 필요했다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었다. 미치 앨봄 작가는 그런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프랭키가 평생을 바친 연인 오로라 요크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마치 검프의 제니에 대한 숭고한 사랑의 음악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절묘하게도 그렇게 영화와 소설은 다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사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태어나 어머니를 잃고, 그를 키운 양아버지 바파 루비오마저 정어리공장 직원들의 밀고로 잃은 프랭키는 엘 마에스트로의 도움으로 독재자 프랑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와 물질이 넘치는 나라 미국으로 밀항하는데 성공한다.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 시절만 해도 그렇게 국가 간의 왕래가 자유로웠다고 치부해 두자. 고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지내던 프랭키는 오직 기타 하나와 자신의 천부적인 재주로 음악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여전히 자신이 꿈꾸는 애인 오로라를 언젠가는 찾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소설은 프랭키 프레스토의 일대기와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명사들이 회고하는 그의 단편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지면서 엔딩으로 치닫는다.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 주는 건 바로 음악이다. 한편 프랭키는 자신의 실력으로 바닥에서 치고 올라가 마침내 정상에 올랐지만, 인생사가 그렇듯 갑자기 찾아온 성공과 행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어렵게 찾은 오로라마저 떠나보내고 히피시대의 정점이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연주와 더불어 끔찍한 자해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 프랭키는 어떻게 다시 반등할 것이며, 결말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반전은 또 무엇일까.

 

책을 읽다가 문득 어쩌면 작가가 영화화를 고려해서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스케일과 촘촘한 이야기의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인생을 밴드에 비유해서 쉴 새 없이 가족이라는 밴드, 공동체라는 밴드, 친구라는 밴드, 연인이라는 밴드 같이 살면서 알게 모르게 유기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관계를 밴드에 비유하는 장면도 정말 멋졌다. 어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감정과 관계의 유효기간이 소멸하면 밴드는 해체되기 마련이고 또다른 만남을 향해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렸다. 게다가 한 시절을 풍미한 멋진 노래들까지 등장하니, 할리우드에서 이런 소재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을 것 같다. 감동 넘치는 인생 파노라마에,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뉴질랜드까지 커버하는 로케이션, 좋았던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까지 나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아마도. 좀 엉뚱항 상상이긴 하지만, 프랭키와 포레스트 검프가 만나는 설정은 어떨까. 프랭키 프레스토와 함께 한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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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생애 - 베르톨르 브레히트 카툰 클래식 1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기획집단 MOIM 글, 정성호 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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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에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가지고 독서모임을 했다는 칼럼니스트의 글을 읽고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사실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하도 많은 글과 정보들을 접하다 보니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침 서해문집에서 나온 카툰클래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다 읽었다. 내가 읽은 브레히트의 희곡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유일했는데(오래 돼서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두 번째 책으로 이탈리아 출신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삶을 다룬 책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카툰클래식의 제목은 <갈릴레오의 생애>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46세가 되던 해부터의 일대기를 브레히트가 희곡으로 만들었다. 카툰을 보면 두 사람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 역시 희곡으로 무대에 올려 상연하는 것으로 전제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에서 천체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학문연구의 자유가 있었지만 학문연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에는 공화국의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연구자가 연구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곤궁했던 모양이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브레히트는 그 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네덜란드에서 이미 발명되어 판매되고 있던 망원경 아이디어를 가로채 연구자금을 공화국으로부터 뜯어내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베네치아에서 계속해서 연구활동을 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는 피렌체로 이주해서 든든한 궁정후원을 받으며 연구에 전념한다. 문제는 갈릴레오가 살던 17세기가 여전히 교황청이 주도하는 종교의 강력한 영향과 규제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15세기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한 이래,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 반하는 모든 주장은 이단이자 신민들을 현혹하는 사악한 학설로 공격받았다. 이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학자들의 가설을 통한 규명이 이루어졌지만, 가톨릭 도그마를 중시하는 신학자들은 그런 주장들을 일절 무시했다. 뛰어난 천문학자였던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이용해서, 지구가 하늘에 붙박혀 있지 않고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자전한다는 사실을 규명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에 어긋나고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종교 지도자들은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리라. 과학(이성)이 권력에 도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구가 금지된 태양의 흑점연구를 지속하지만 결국 로마로 소환되어 종교 재판관에 서게 됐다. 같은 베네치아 출신으로 천문학자이자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자로 규정되어 화형당한 지오다노 브루노의 길을 따라 과학의 순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학자로서의 굴욕을 견디고 살아남아 연구를 계속하고 기록을 남기느냐 하는 갈래길에서 빈손보다는 더럽혀진 손을 택했다. 어쩌면 갈릴레오는 이성을 대변하는 자신의 제자 안드레아의 말처럼 세속의 권력과 타협하는 대신, 진리의 순교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선택은 달랐다. 그 결과 외동딸 비르기니아의 약혼자 루도비코가 파혼을 선언했고 자신 역시 재판 결과 종신 가택연금과 저술활동에 대한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됐다.

 

브레히트가 쓴 이 희곡의 하일라이트는 갈릴레오의 제가 안드레아가 연금 중인 갈릴레오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를 인도하리라고 생각한 청년 안드레아에게 생존을 위해 지동설을 철회한 스승의 변명이 어쩌면 구차하게 들렸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피렌체에 퍼진 죽음의 흑사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 연구를 하는 기개도, 이미 알려진 망원경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자신의 발명인 것처럼 꾸며 천체연구에 몰입하는 교활함도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라는 화형과 종교 재판의 고문 앞에는 유한한 인간의 초라한 모습일 뿐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 그가 남몰래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공식기록이 아닌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과학정신의 승리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갈릴레오를 로마 교황청에서 신원하는데 걸린 시간이 자그마치 350년이라고 하니 놀랍다.

 

마르크스주의자답게 희곡의 작가인 브레히트는 과학의 발전에 따른 이성과 사유의 진보를 억압하는 주체로 당대 기득권을 대표하는 사제와 종교지도자들을 배치한다. 기존질서를 해치는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설사 규명된 진리라 할지라도 그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도 동시대인들에게 통용되는 이탈리아말이 아니라 학문 용어인 라틴어를 지껄여 대는 지식인들의 허위와 위선을 갈릴레오는 통렬하게 공격하기도 한다. 과학적 지식이 과학자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모든 인류의 복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대사는 정말 대단하다. 브레히트는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가동된 맨해튼 프로젝트라 불린 핵무기 과학기술 프로그램이 결국 인류를 파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인문학적 통찰에 도달했을 지도 모르겠다. 카툰을 읽을 적에는 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었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원전 희곡을 읽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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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을 어린이 위인전으로 편집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
 
제49호 품목의 경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7
토머스 핀천 지음, 김성곤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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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토머스 핀천의 작품을 읽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그나마 가장 대중에게 쉬운 편이라는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전혀 이해하기 쉽지도, 주인공 에디파 마스를 따라 약음기가 달린 우편 나팔이 상징하는 트리스테로의 비밀을 찾는 여정도 생각처럼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은둔의 저자 토머스 핀천이 29세의 나이에 두 번째로 발표한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중력의 무지개>(1973)의 전주곡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는 글을 읽고 소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언제 읽을지 모르는 걸작에 대한 경외감에 압도됐다고나 할까.

 

특이하기 짝이 없는 이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소개된 논문을 참조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조언이 정말 이해가 갔다. 소설이 쓰인 1960년 중반은 세계를 제패한 미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번영하던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미국의 생산력은 세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1964년 대선과 의회선거에서의 민주당의 압승과 동시에 진행된 흑인인권운동을 필두로 해서, 페미니즘 운동, 확전일로에 있던 베트남 전쟁, 록 혁명, 마약문화의 범람 등의 진보적 흐름이 대세였다. 바로 그 시절에 우리의 주인공 에디파 마스는 전 애인 피어스 인버라리티의 유언 집행인이 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에 나서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이 주체적 자아로 진실을 추구하게 되는 주인공의 자각을 인도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중고자동차 거래를 하다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남편 무초 마스의 아내로 전업주부였던 에디파는 아이젠하워 보수정권 아래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거주지는 무려 캘리포니아다.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부족한 것이 없는 그야말로 젖과 꿀 그리고 무한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지상천국 캘리포니아! 그런 그녀에게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자유의 물결이 넘쳐나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신경증을 유발시켰을 지도 모르겠다.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환각 증세를 유발하는 약물(LSD)의 효과에 묻는 그녀의 담당 정신과 의사인 힐라리어스야말로 에디파의 신경증을 유발하는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피어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샌나르시스(역시 그리스 신화 나르시소스를 연상시킨다)를 찾아간 에디파는 공동유언 집행자인 변호사 메츠거와 만나 스트립 보티첼리 게임을 하며 자연스레 공공연한 불륜관계를 갖게 된다. 뭐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소설의 주인공 에디파의 이름은 분명 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이디푸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자기 출생의 비밀과 숙명을 알게 되는 오이디푸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에디파도 중부유럽에서 발생한 우편조직인 <툰과 탁시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트리스테로의 비밀을 파헤치게 되는 운명이 주어진다. 고작 화장실에서 한 번 본 약음기가 날린 우편나팔의 상징을 쫓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에디파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 대중이 느끼는 공포와 소외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 같은 후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보면 평면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설정이 1966년에 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에디파가 처한 상황은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인식세계에서 탈피해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새로운 정보들을 분석하고 취합해서 판단하라고 강제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스터리와 새로운 인물들과의 접촉은 독자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긴 수백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중력의 무지개>에 비하면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워밍업 정도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토머스 핀천이 구사하는 서사 구조는 갖가지 상징과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서 이현령비현령 식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들 정도다. 현재까지도 작동하는 지하 우편조직 트리스테로의 존재는 정보의 전달을 담당하는 미합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우편제도에 맞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에디파는 우연히 접하게 된 연극 <전령의 비극>을 통해 트리스테로 비밀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하위문화가 사람들의 무의식 세계를 대변한다고 가정해 보면 연극 무대에 나온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다고 에디파는 판단한 걸까. 까면 깔수록 그 정체를 알 수 양파처럼 트리스테로의 비밀은 미스터리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시대를 휩쓸던 마약 이슈에서부터 서브컬처 연극 그리고 맥스웰의 수호정령이라는 이름 아래 엔트로피 이론과 열역학 제2법칙까지 과학까지 아우르는 연결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게다가 프리메이슨 뺨치는 트리스테로라는 비밀결사 조직까지 등장하니 작가가 도대체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를 추적하는 가운데 소외를 상징하는 모든 것에 약음기가 달린 우편나팔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매카시즘이 판치고, 보수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보통사람 에디파도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새로운 시대에서 소외된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트리스테로의 상징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일까. 에디파 외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남성들인데 에디파와 접촉한 남성 타자들은 하나 같이 기인한 결말을 맞게 된다. 이미 유언장을 남긴 피어스는 죽었고, 남편은 자신이 떠난 LSD 중독자가 되었고, 나치에 협력했던 과거가 드러난 힐라리어스 박사는 총기난동을 부린다. <전령의 비극> 연극 대본의 비밀을 알려준 남자 역시 대서양 바다로 투신을 해버렸고, 메츠거는 나이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가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 경매에 등장하는 인물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착시현상을 갖게 만들어주지만 결국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죽었다고 알려진 피어스 인버라리티가 꾸민 일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을 것 같다.

 

솔직히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도움을 받은 박은정 씨의 논문에 따르면 이야기의 원래 목적인 경험의 교환과 조언이라는 유용성이 그런대로 작용하고 있던 사회가 지식과 정보의 전달을 담당한 공식적인 우편제도의 등장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훨씬 더 문명이 발전되어 정보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들을 선별해낼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퇴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어쩌면 토머스 핀천의 이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온갖 상징과 은유로 범벅이 된 작품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구도자로서 에디파의 이미지가 현실을 사는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그만큼 매력적일 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독서모임에 나가서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털어 놓았지만 여전히 진실의 벽은 저 멀리 있다는 느낌이다.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내게 도전의 대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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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 프레야 시리즈
매튜 로렌스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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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판테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현대판 만신전의 출발은 정신병원이었다. 우리 불굴의 여전사이자 사랑의 여신 프레야는 새라 버내디라는 아주 평범한 이름의 소녀로 변신해서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다. 모름지기 멋진 소설이 되려면 주인공을 열심히 따르는 사이드킥이 필요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게다가 주인공이 여신이라면 더더욱. 소설을 읽으면서 파악한 사실 중의 하나는 모든 신은 인간이 만들어냈으며, 필연적으로 신들을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신도가 필요하다. 신들은 수많은 신도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흡수해서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이런 매튜 로렌스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신들의 영역이 어떤 면에서 정치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대표자로 선출하는 정치인 역시 유권자들의 한 표를 받아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오르지 않는가.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더가 온통 그쪽으로만 돌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여신 프레야는 자신의 훌륭한 신도 나단 켄스를 거느리고 한때 최강의 전사였던 실력을 발휘해서 느닷없이 등장해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가렌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정신병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여기까지가 정신병원과의 인연은 끝인데, 제목에 붙은 ‘정신병원’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프레야가 나중에 취업하게 되는 ‘테마공원의 신데렐라 프레야’로 제목을 지었다면 독자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진 못했겠지만.

 

수십 년간 정신병원에서 고립되어 지내다 보니 프레야는 좀 시류에 뒤떨어지긴 한 모양이다. 새라 버내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서 꿈과 환상의 올랜도에 정착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가렌의 추격은 끈질기기만 하다. 결국 가렌에게 생포되어 피넴디라는 온갖 신들을 컬렉션하는 시설에 갇힌 프레야는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고, 자신의 열혈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피넴디와 협조하겠노라는 서약을 하기에 이른다. 현실적으로 같이 체포된 나단의 신병이 걱정되기도 했다. 복수의 여신이기도 한 프레야는 피넴디 코퍼레이션의 신들을 노예처럼 부리겠다는 흉악한 음모에 맞서 모든 시설을 파괴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하와이 여신 트리오와 격리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세크멧의 도움을 받아 피넴디의 거대한 음모에 맞서게 된다.

 

주인공 프레야는 다중적인 측면에서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여신이면서 자신의 신관이라 부르는 인간 나단 켄스에게 애정을 느끼기도 하고, 오랜만에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게 된 신도 나단의 안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또 한편으로는 피와 복수를 부르는 발키리를 다스리지 못해 스테이크 칼을 휘두르는 성정을 슬쩍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여신답게 모바일폰을 이용해서 최신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잡기도 하지만, 피넴디를 파괴하기 위해 동료 여전사 세크멧과 전쟁을 치를 적에는 피묻은 칼날을 자신이 아끼는 블라우스에 쓱쓱 닦기도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캐릭터인가! 한편 초반에 그녀의 상대로 등장하는 가렌은 반인반신의 캐릭터로 순간이동하는 능력은 물론 신을 모조리 없애겠다는 각오로 피넴디에서 부여한 여신 체포를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냉혈한이다. 그 이면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 낸토수엘라 부활 프로젝트가 숨어 있긴 하지만, 매튜 로렌스 작가는 단순하게 선과 악이 대결이라는 단순한 2차원적 설정이 아닌 좀 더 중첩되는 사건들을 교차편집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아무래도 신들의 전쟁이 주를 이루다 보니 인간 나단 켄스의 배역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인간대표 선수로 나단 역시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한다. 어쨌든 나단은 사이드킥이 아닌가.

 

인간과 신의 상보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만나게 되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신들의 면모도 흥미롭다. 프레야가 신화라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 아니라는 점도 참신하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인간에 의해 채색되고 변용된 이미지가 오늘날의 신이 되었노라는 작가의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게다가 모든 정보를 구글링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사랑의 여신으로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겹친다는 아프로디테에게 험한 말을 던지는 장면은 정말 유쾌했다. 프레야에게 들이대는 신으로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 어느 순간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휘발해 버려서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프레야가 새로운 직장으로 테마공원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신도들의 에너지를 얻어 과거의 강력했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테마공원처럼 불특정 다수의 추종자들을 전 세계에서 모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겠냐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결말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매튜 로렌스 작가는 <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를 시리즈로 구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신도에서 도제 단계에 들어선 나단이 또 어떤 마법과 주문을 배워서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있는 사랑과 전쟁의 여신을 부양하게 될지 그리고 또다른 강력한 신들과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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