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에 입맞춤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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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리 하우오파.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책 <엉덩이에 입맞춤을>을 쓴 통가 출신의 인류학자이자 작가이다. 1939년 통가 출신의 선교사 부모님 슬하에서 파푸아 뉴기니에서 태어났다. 뉴기니-통가 그리고 피지를 잇는 그야말로 남태평양 토종 작가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아울러 그의 작품을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태평양 출신의 작가가 쓴 글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남태평양에 있는 가상의 섬, 티포타에 사는 오일레이 봄보키 그리고 그의 엉덩이 질환이 주소재이다. 아니 좀 더 에펠리 하우오파 스타일로 까발리자면 똥구멍이 문제라는거다. 하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들도 있을 터이니 앞으로는 항문으로 통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남태평양에 둥둥 떠 있는 조그만 섬 티포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유명인사인 우리의 주인공 오일레이가 정말 남부끄러운 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됐다. 그의 전력은 전 헤비급 챔피언으로 철저한 남성우월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정말 남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병이 났다면 바로 고쳐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티포타 사람들 모두 현대식 병원에 가기를 꺼린다. 그건 바로 병원에 가서 병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우수한 의료진과 약품의 부족으로 담당의사인 타우비 메이트마저 병원에 오는 것을 마다할 정도란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치료사 혹은 치유사라고 불리는 엉터리 주술사들이다. 하지만 어느 의사들도 그리고 도토레(치료사-치유사들의 고상한 표현이랄까)들도 오일레이의 엉덩이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또 티포타 사람들은 어찌나 그렇게 남의 이야기들을 하기 좋아하는지 그렇게 쉬쉬했건만 오일레이의 엉덩이에 대한 비밀은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전국적인 소문이 되어 버렸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정말 포복절도할 만큼 재밌고 신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지은이 에펠리 하우오파는 역시 인류학자답게 곳곳에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남태평양 사람들의 삶에 대한 분석들을 죽 나열해서 보여 주고 있다. 작은 공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걱정들이 그것이다. 이제 핵가족화의 전개로 전통적 지역공동체의 개념이 파괴된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이 그네들의 삶 가운데서는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의술이 아닌 전통신앙에 의존한 치료사 혹은 치유사들에게 병 치료를 구하는 모습도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네들만의 문제가 아니듯이, 정도에 상관없이 일단 아프면 돈이 든다. 하지만 먹을 것조차 변변하지 않은 마당에 남태평양에 사는 이들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이 병원을 찾지 않는 이유는 단지 현대의학이 못미더워서만이 아닐 것이다. 값비싼 진료비와 그에 상응해서 들게 되는 약값을 도대체 감당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뭐 이런 문제는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보이듯이 제3세계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주인공 오일레이가 부인 마카리타에게 청혼하는 과정 또한 남태평양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를 보여준다. 이름나고 이젠 지역유지로 돈 많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은 오일레이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미래의 와이프 마카리타를 만나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마카리타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그네들의 딸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자 마카리타의 부모님들은 엉뚱한 오해를 하면서도, 과히 싫지 않은 내색을 한다. 에펠리 하우오파의 재치와 유머가 반짝반짝 빛을 낸다.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필이면 신체의 많은 부분 중에서 하필이면 작가는 엉덩이를 소재로 삼았을까? 일단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에 의거한다고 한다. 4년간의 엉덩이 질환으로 고생한 그는 자신의 엉덩이가 다 나으면서 엉덩이를 소재로 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신체의 부위 중에서 가장 천대 받는 엉덩이를 위해서 말이다. 그건 바로 은유적으로 세계사적 국면에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남태평양 아일랜더(섬나라 사람들 정도가 되겠다)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남태평양 바다는 강대국들의 핵실험장이 되고, 참치사냥을 위한 낚시터가 되고, 돈 많고 부유한 관광객들을 위한 휴양지가 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네들의 삶의 연속성을 계속된다는 것이다. 엉덩이가 아프고, 그 아픈 엉덩이를 낫게 하기 위해서 굿판을 벌이고 침을 맞고 별의별 짓을 다해도 낫지가 않는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3세계인들은 몸부림을 치지만 그들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하우오파의 그런 재밌는 해학 속에는 이런 반의적이면서 고의적인 숨김 들이 존재한다. 확실히 <엉덩이에 입맞춤을>은 읽기에 재밌는 책이다. 하지만, 살짝 한 꺼풀만 벗겨 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남태평양 사람들의 삶의 애환들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런 뛰어난 작품을 만나게 된 행운에 입맞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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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족을 믿지 말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이선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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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그 방대한 분량에 한 번 놀랐고, 다음으로 이 책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여류작가 리저 러츠의 상상력과 구성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오락적 재미와 더불어서 다양한 캐릭터들의 치밀한 묘사와 속도감 넘치는 진행으로 책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이다. 그리고 1남 2녀의 자녀들을 둔 스펠만 가족들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이들의 직업이다. 그들은 가족단위로 운영되는 사립탐정업을 하고 있다. 주인공 이자벨 스펠만은 올해 28세로 십 수 년째 ‘패밀리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 미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원조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능력의 소유자다. 물론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미성년시절부터 절친 페트라와 더불어 갖가지 비행들을 저지르면서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반면 두 살 터울 위의 오빠 데이비드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모범생 이미지로 시간당 400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촉망받는 변호사로 패밀리 비즈니스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그리고 과거 형사로 일하다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났지만 아내 소피 리를 잃은 삼촌 레이가 있다. 은퇴 전에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레이 삼촌의 이름을 딴 막내 여동생(14세) 레이가 있다. 단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미행을 취미생활로 삼고 있으며 이자벨의 단골 술집인 ‘철학자 클럽’에 들러서 바텐더 밀로를 괴롭히며 진저에일을 마셔댄다.

이런 탄탄한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해서 저자 리저 러츠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리저 러츠는 바로 이런 평범하지 않은 조금은 이상한 가족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현대 가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보다. 근래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은근히 예전에 TV 다이닝에서나 보이는 그런 전통적인 가족의 중요성에 새삼 비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자녀들이 부모들의 속을 뒤집어 놔도, 그들은 언제나 이자벨과 레이에게(모범생 데이비드는 예외로 하자!) 항상 “사랑한다”고 주문을 외운다.

아마도 저자 리저 러츠가 그랬듯이 가족의 이런 든든한 후원이 자녀들을 더 이상의 사회적 일탈행위들로부터 막아낸 원동력이 아닐까. 리저 러츠는 이 소설을 통해 애써 만든 캐릭터들이 아까웠던 모양으로, 시리즈 소설을 쓸 계획 중에 있다고 한다.

물론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다소 진부해 보이는 주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가족사에 더해서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끼워 넣는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 정신을 잃지 않는다. 틴에이저 시절부터 시작된 이자벨의 연애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선뜻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으로 관계를 시작한다. 바로 이런 문제로 인해 그녀의 관계는 지속될 수가 없다. 9번째 남친으로 등장한 대니얼도 그런 장애를 뛰어 넘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온다면 아마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제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중요한 소재로도 사용된 <겟 스마트>같은 TV프로그램들이 언제나 우리나라 소설에도 등장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적합한 가족관계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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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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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근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서울)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연애사건, 살인사건 그리고 기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이번에 자살이라고 하는 어쩌면 금기에 해당하는 주제를 다룬 전봉관 작가의 <경성 자살 클럽>이 출간됐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서 보니, 죽음은 현실에 대한 자각이라는 표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책에서는 모두 해서 10개의 자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수도 경성에 악머구리 끓는 듯한 문제들이 이 주제를 통해 폭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7:3의 비율로 여주인공들의 에피소드들이 압도적이었다. 남자들이 민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한 대의 혹은 입시문제 등으로 자살을 택했다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가 연애와 관계된 정사(情死)였다.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다른 책에서 다룬 연애사건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다산북스에서 나온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과 윤심덕-강명화 그리고 홍옥임 스캔들이 그것이다.

특히 조혼(早婚)과 전래의 인습으로 인해, 자각된 신여성들과 유부남 남성들 간의 연애 그리고 특히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갈등은 새로운 천년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이다. 새로운 학문과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가치관들과 질서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는 그야말로 엄청난 격변의 과정 가운데 내던져진 우리의 꽃다운 청춘들에게 세상살이는 필연적으로 버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억압적인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를 양산해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들이 바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내몬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물론 21세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실연당했다고 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와 요즘의 사랑에 대한 관념이 그만큼 변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우선, 조혼 풍습으로 인해 괜찮은 미혼 남자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실연이라고 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났다. 물론 당시 경성에도 자유연애주의 풍조가 만연해 있긴 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연애는 자신의 일생을 걸만큼 중요한 일이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0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바로 8번째 <입시지옥>이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의식전환으로 인해 모든 조선의 부모들의 교육열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취학연령의 아동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학교의 수 때문에, 예닐곱 살 먹은 미취학 아동들이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런 상황들이 거의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참 답답하기만 하다. 물론 그 당시와는 다른 이유의 과열된 입시경쟁이지만 그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의열단 출신의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비록 그가 목표한 것을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식민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쾌거였다. 그리고 모든 의사 표현 수단을 빼앗긴 약자들의 마지막 저항방법이라 볼 수 있는 테러리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근대 조선의 경성을 거닐며,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멋진 시간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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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더 뉴스 -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오귀환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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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란 직업은 아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는 것”이라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다오우드 쿠탑의 선언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화두처럼 다가온다. 이제는 다분히 권력화된 언론은 사회의 테제를 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우리네 삶에서 불가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다오우드가 말한 언론의 본질에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동안 우리들은 서구의 대형언론사들로부터 기사를 공급받아 왔다. 그래서 어쩔 땐, 우리네 현실에 대한 기사들도 그들의 시각으로부터 녹취한 것들도 다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에서 같이 숨 쉬는 이들의 시선과 이방인의 시선이 일치하지는 않는 법. 이런 세태에 개탄을 하면서, 아시아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10명이 뭉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 <더뉴스>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바로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였던 폴 포트였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세계에 학살자라는 악마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폴 포트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이제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진실을 알 수가 없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린 시절 <킬링 필드>를 야기한 장본인으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사실일까? 이 책에서 지난 30년간 캄보디아 정세에 정통한 일본인 기자 나오키 마부치의 밀착취재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지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도차이나 분쟁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나 앙코르 와트로 우리에게 유명한 캄보디아 근대사가 끌렸다.

자유 수호라는 미명 하에, 캄보디아 독재정권을 수립했던 론 놀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는 동남아에서 베트남 연방을 이룩하려는 베트남이 국경분쟁을 이유로 해서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캄보디아의 큰 악으로 규정했던 크메르 루주를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지원하는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킬링 필드’가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의 숙청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전쟁 중의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을 했던 유수의 언론들에 대해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서 만들어낸 영화 <킬링 필드>가 크메르 루주에 대한 결정타를 날렸다.

베트남군의 철수 이후, 인민농민혁명을 지향하는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의 꼭두각시 정부에서 결국 친위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훈센 총리의 무장투쟁과 정쟁의 과정은 부족한 대로 현대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갈증을 덜어 주기는 했다. 물론 바란 만큼 상세하지 않다는 점이 좀 아쉽긴 했지만.

아랍세계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오사마 빈 라덴도 미국에 대한 9-11 공격으로 인해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한 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침공군에 대항해서 싸우는 자유 무자헤딘 전사로 칭송받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렇듯,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을 만드는데 있어서, 미디어의 역할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직도 9-11 사건 이후, 미국의 주류방송에서 9-11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들을 계속해서 보여 주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자행하고 있는 갖가지 만행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이 두 가지 다른 사건을 공정하게 다뤘다면 아마도 미국사회에서 그렇게 아랍세계는 악, 이스라엘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디어 조작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더뉴스>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조국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고,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초상이다.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우리네 언론재벌들과 그 기자들이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이 책 <더뉴스>를 통해, 우리가 사실이라고 있는 것들이 얼마만큼의 진실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사실’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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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 보스에서 렘브란트까지 그림 속 중세 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세상 중세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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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흥미롭다, 중세의 가을이라……. 먼저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알고 싶어서 위키피디아에게 물었더니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훈족의 침입으로 비롯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5세기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5세기까지 약 천 년간의 시대를 지칭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가을’은 작가 이택환 선생의 말대로 쇠락을 상징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중세하면 기독교 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중세의 그림들에 대부분을 종교화가 차지하고 있다. 현실과 환상 혹은 상상의 세계가 병존하고 있던 중세시대에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보다 오히려 더 세속적 욕망에 충실했었다고 한다. 그런 면면들이 당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작가는 이런 그림들에 대해서, 당대의 시대 문화적 배경들과 도상학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우리들에게 설명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긴 부활이 대명제였던 중세사회에서, 그들이 기대했던 현실세계에서의 부활이 천년이 다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중세인들은 죽음을 그들의 삶 가운데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페스트(흑사병)와 종교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등은 그런 불가피한 상황들을 더욱 촉진시켰다. 책의 전반부에서 중요한 화가로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중세의 몰락이 예언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보스의 그림에서는 정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의거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이교도적인 색채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그가 그린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이미지보다는 종말의 세계에 심판자로서의 역할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피터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같은 작품에서는 쇠락으로 치닫는 중세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엿보인다.

현대의 문화코드로 보면 더 엄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중세에 많은 작가들이 성화 가운데 에로티시즘을 섞어 놓았다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큐피드의 그것으로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비너스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종교적 경건함 가운데 중세인들의 욕망들이 들끓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의 중세 사회의 질서들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행위에는 자본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예전에 화가들의 주 고객들은 바로 영주와 주교들과 같은 지배계급이었다. 상업혁명이 진행되고, 부르주아 계층이 등장하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패트론들은 바로 이들 부르주아 계급으로 대체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때 등장하게 되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보수적인 색채로 기존의 영주들이나 사제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했던 루벤스와 종교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 리버럴리즘을 대표했던 렘브란트의 비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신과 인간이 합일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세시대에서 공동체적 삶이 아닌 개인의 자아를 찾아가게 되면서 중세는 붕괴하게 된다. 중세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신학을 개인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철학이 대체하게 되는 역사적 전진이 이루어진다. 단순하게 중세 예술작품에 대한 소개서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중세 전반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명석한 고찰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작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인 중세를 거닐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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