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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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의 블랙유머는 언제나 진리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어젯밤에 열심히 읽던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가방에 넣으면서, 바로 곁에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도 덤으로 넣었다. 출근길 버스에서 카렐 차페크의 복간된 책을 읽는 대신 나의 선택은 <닥터 키보키언>이었다. 그리고 보니 로맹 가리의 <그로 칼랭>도 후보였다. 두꺼워서 패스.

 

책은 오전 중에 다 읽었다. 책의 쪽수는 모두 105. 2007년에 작고하신 커트 보네거트는 내가 십수년 전 이 업계(?)에 발을 디딜 적에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을 때, 역시 작년엔가 코로나로 작고하신 루이스 세풀베다와 함께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지.

 

사실 이 책은 지난달에도 읽었지 아마.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리뷰를 쓰지 못했다. 역시나 닥터 잭 키보키언을 내세워 임사체험을 빙자해서, 푸른 터널 운운하며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작가의 발상은 참으로 발칙하면서도 동시에 깜직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은 아마 커트 보네거트만이 구사할 수 있는 그런 유머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슈나우저 강아지를 지키기 위해 핏불테리어에게 맞서다가 사나운 녀석에게 물려 심정지로 돌아가셨다지. 자신의 반려견을 위해 장렬하게 죽은 그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베트남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커트 보네거트 유머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셰익스피어도 보네거트 선생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할 판이다. 한 때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영감을 얻어 맏는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미국에서 대히트를 친 적이 있다. 아마 그 시절의 인터뷰인 모양으로, 셰익스피어의 성적 취향에 대해 짖궂은 질문을 던지는 커트 보네거트. 셰익스피어는 대가답게 자신의 글을 인용하며 요리조리 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다 그런 거지, 왜 그렇게 예민한 질문을 던지는 거야 그래. 다 알면서!

 

우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만큼 유명한 마틴 루터 킹에 대해서는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암살범 제임스 얼 레이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다. 그는 무려 1998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사후세계에서 제임스 얼 레이는 N 워드를 들먹거리며 킹 목사가 그렇게 유명하게 될 줄 알았다면 자신의 낡은 총알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라며 후회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이 대리석에 금박 글씨로 후대에 영원히 전해지게 될 줄 알았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나.

 

벤저민 프랭클린만큼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토머스 제퍼슨의 위선에 대해서도 보네거트 선생은 혹평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흑인 노예를 부린 게 토머스 제퍼슨이 아니냐고 묻는 방식이다. 올바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인의 말들이 어떤 가치과 효용성도 가지지 못하는 최근의 모습들을 반영한다고나 할까. , 노예제도가 미국에서 합법적이었던 것처럼 홀로코스트 역시 나치 집권 아래 있던 독일에서 합법적이었다는 냉혹한 사실을 보네거트는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아이구 친절하시기도 하여라.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은 정말 작정하고 읽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그런 분량의 책이지만 다 읽고 나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그리고 여운을 깊게 남겨 주는 그런 책이다. 하긴 너무 긴 책들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들을 모두 파악해 낸다는 게 어쩌면 곤욕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독서가 즐거움이 되어야지, 하나의 숙제나 강박이 되어서는 안될 테니까 말이다. 푸른 터널 저 너머가 먼저 가 계신 커트 보네거트 선생도 우리 독자들이 그러길 바라시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한다. , 커트 보네거트 선생이 생각하는 인도주의의 본질은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라고 한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그가 말한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를 지닌 깨시민인가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조금은 갈고 닦아야하지 않나 싶다.


[뱀다리] 그 유명한 메리 W.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마 원전이나 영화를 보지 않은 이라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십대 초반의 메리 셸리가 쓴 호러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우리는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런데 보네거트는 그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진짜 괴물은 괴물을 창조해내고 자기 가족들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셀프파멸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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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26 12: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5도살장 재미있게 읽었어요. 개죽음 이야기 웃긴데 슬프네요 ㅠㅠ 훌륭한 시민의식과 보편적 품위 ㅠㅠ 저도 갈길이 머네요 ~

레삭매냐 2022-01-26 13:06   좋아요 3 | URL
커트 보네거트의 오래 전 책들도
어서 다시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죽음 이야기, 참 그렇죠...

미미 2022-01-26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기대하던 책인데 (그런데 잊고 있었던ㅠ) 역시 재밌겠군요!
어제마침 도서관에 갔을때 커트 보네거트의‘고양이 요람‘ 원서가 있길래 눈여겨 보고왔는데 반갑네요^^*

레삭매냐 2022-01-26 15:22   좋아요 2 | URL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재밌습니다.

<고양이 요람>은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그렇게혜윰 2022-01-26 15: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 줄의 진리다를 지린다로 읽은 1인^^;;;;

레삭매냐 2022-01-26 17:25   좋아요 2 | URL
그것도 사실입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2-01-27 02: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은 보관함에 넣어놓고 깜박하고 지나간 책이군요. 커트 보네거트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암요. ^^

레삭매냐 2022-01-27 10:04   좋아요 2 | URL
작년 12월에 이어 이 책을 세 번
이나 읽었네요.

그 때 리뷰를 쓰지 못해서 부랴부랴
썼네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페크pek0501 2022-01-28 14: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네요. 저는 다른 책을 읽었어요. 제목은 독서 노트를 봐야 알겠군요. ㅋ
유머가 있고 능청스럽게 글을 잘 쓰는 작가죠. ^^

mini74 2022-02-10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축하드려요 ~~

레삭매냐 2022-02-10 18:00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 책값을 벌어 주다니...
잘 사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니님 ~

그레이스 2022-02-10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02-10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2-10 1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립니다~!! 주식 적립금 생기셨네요 ^^

서니데이 2022-02-10 2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2-02-10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네거트가 그렇게 재밌나요? 아휴 왜 이리 읽을 책이 많은가요 ㅜㅜ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러블리땡 2022-02-1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2-1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