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라트 산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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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라트 산



23년 수능이 있는 날이다. 하늘이 많이 흐리다. 아주 오래전에는 입시 한파라는 게 있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변해가는 세월만큼이나 날씨도 참 변화무쌍하지라, 날씨마저 한쪽으로 간략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어보인다. 흐린 날이 지나고나면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어쨌든 긴장해서 떨리는 마음들이, 한파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져 좋은 결과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은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날인가. 자식이무언지.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명명되어지는 삶이란. 참 오묘하고, 참 어렵고, 또 참으로 거스를 수 없는, 그렇게 먼저 신이 예비해둔 길 같기도 하다.



72페이지의 시집을 읽어내기가 버겁다. 이토록 얇은 시집이 또 있을까. 겉으로 다가오는 시집의 분위기는 얇고 가벼우며 아담하다. 그러나 실은 거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루이즈 글릭의 시집 중 두 번째로 읽어본 작품은 ‘아라라트 산’이다. 아라라트 산은 어디에 있는 산일까. 역자 정은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아라라트 산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신의 노여움으로 생긴 홍수로 표류하다 가닿은 산이라고 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가 아는 노아 할아버지는, 산에 가닿기 전에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보냈지 아마. 아니. 순서가 틀렸다. 까마귀를 먼저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 대신 비둘기를 보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는 배신의 이미지, 그리고 푸른 잎을 입에 물고 돌아온 비둘기는 사랑과 보은의 이미지로 굳어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까마귀는 나름의 생존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을 했을 뿐, 그것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비둘기는 왜 인간에게 다시 돌아갔을까. 애초에 신이 비둘기에게 다시 돌아가라 가르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라라트 산’ 이라는 글릭의 시는 단순히 시집만을 읽었을 때와 역자의 해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우스갯소리이겠지만, 시집은 해설집과 나란히 옆에 두고 읽어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난해함을 가시처럼 품고 있는 시집이다.

역자의 해설에서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자면, ‘아라라트 산’이 출간된 시점은 1990년이었고, 지난주에 먼저 읽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이 출간된 시점은 1980년이었다. 물론 십년이라는 텀 그 사이에도 시인의 작품집은 계속 출간되었다는 것. 그리고 90년 이후 21년까지 그녀의 작품 활동은 현재행인 듯했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사유는 계속 달려가는 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먼저 접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 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 ‘아라라트 산’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생이라는 ‘중간’지점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 육체를 떠나가는 영혼들을 끌어안는 어느어느 시선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느낀 변화라면 그 시선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려오는 모습’에서 깊은 우물과 같은 곳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내적 자아의 모습이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면, ‘아라라트 산’ 에서는 전작보다는 더 넓은 시선을 보여준다고 느끼게 된다. 시인과 아버지. 시인과 어머니. 시인과 여동생. 그리고 시인의 아들과 시인의 조카. 마지막으로 어려서 죽은 언니까지.


시집은 어쩌면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라 했던, 역자 정은귀의 해설에 공감하게 된다.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시인은,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모습을, 그 아버지를, 아버지를 덤덤하게 떠나보내는 반쪽뿐인 어머니를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랑하게 되는가 싶다. 여기서 반쪽분인 어머니의 이미지는 죽은 언니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 그로 인해 어머니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시인의 유년시절 자아와 그 맥락이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뭔가가 바뀌었다:언니가 죽자,

엄마 심장은

아주 차갑고, 아주 딱딱해졌다.

자그마한 철 목걸이처럼.

내 언니의 몸은 자석이라고

그런 것만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엄마 심장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자라도록 말이다.

--------------------------- 아라라트 산 ‘잃어버린 사랑’ 일부 p23



내가 잘하는 게 하나 있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착해지려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죽은 아이한테서 엄마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그렇게 했다.

난 마음껏 아이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그렇다,

멈추었다 갈 수는 있지만 방향은 바꾸지 못하는 장난감 같다.

----------------------------아라라트 산 ‘이모’ 일부 p29



조금. 조금만 이야기의 흐름을 넓게 뛰어보자. 너무 한 곳에 몰입해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이다. 환기가 필요한 시점인가. 한편 시인은 매우 혼란스럽고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듯 긴장감을 보이지만, 결국 그녀는 혼란의 강을 스스로 잘 건너가 종단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반듯하게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기어이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시집 ‘아라라트 산’에서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곳은, 혼란과 암울 혹은 역경이 아닌 그 난관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느 하나의 긍정적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좀 희망적인가. 그러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그녀의 시집을 단 두 권밖에 보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단 두 권의 시집으로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역자 정은귀는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 ‘최초의 기억’을 언급하며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수동적인 사랑이 아닌 능동적인 사랑으로 이해 해석하면 좋을법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

한편, 개인적으로 감히 역자의 이야기에 보태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여겨 본 텍스트는 ‘최초의 기억’ 바로 앞전에 실린 작품 ‘천상의 음악’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화자. 이 화자의 이야기 안에 담긴 고백 같은 바람들. 어쩌면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진솔한 면면들이지 않을까.....



현실에서, 우리는 길가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본다;

이따금씩, 새소리가 정적을 뚫는다.

바로 이 순간, 우리 둘 다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죽음에도, 고독에도 편안하다는 사실을,

내 친구는 땅에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애벌레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친구는 늘 온전한 무언가, 아름다운 무언가, 자기를 빼고도 삶이 가능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쓴다.

우린 아주 조용하다. 여기 말없이 앉아 있으면 평화롭다, 구도는 변함없고, 길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대기는 서늘해지고, 여기저기서 바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건 바로 이 고요함이다.

형식을 사랑하는 건 끝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라라트 산 ‘ 천상의 음악’ 일부 p69



인간이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혼돈의 경계를 뚫고 결국 나아가고자 하는 곳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이데아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것까지 신이 준비해둔 무엇이라고 생각을 돌려보면 그나마 이내 마음이 편해지려나. 어쩌면 노아가 떠나보냈던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도, 까마귀를 믿지 못해 대신 날렸던 비둘기가 돌아온 것도 신의 뜻이요.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개체마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자위의 측면이 강해지는 가 싶다. 중구난방식 말도 안 되는 자위와 자조라고 해야하나.



마지막이다.

죽음에도, 고독에서도 편안할 수 있다는 시인의 말.

모든 것이 고요해질 수 있다는 시인의 마지막 말이 긴 울림으로 자리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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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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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모습



오랜만에 글로 남긴다. 두어 달을 더 넘겼다. 계절은 빠르게 변해가는 중이다. 여름 막바지 어디쯤. 그 무더운 더위가 아직 겨드랑이 깊은 축축했던 고랑에 매달려 있을 것만 같은데, 이제는 코앞으로 다가온 차가운 계절의 이름을 서둘러 불러보는가 싶다. 내일은 아마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을까 싶다.



공백은 길었을까. 아니면 짧았을까. 공백이 만들어낸 무지의 터널은 크고 넓었을까 아니면 비좁고 음침했던가. 가벼이 흩날리는 생각조차 없이 시계의 초침은 쉼없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는 일이 반복되더라. 그런데 결국에는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나라는 사람은 참 어리석기 짝이 없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지만 밖으로 방황하다 돌아왔어도 책은 언제나처럼 곁에 있었다. 말없이 어긋나기로 작정을 한 이런 나까지 내치지 않고 기다려준 오랜 지기가 있어 살아가는데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릭의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한권 더 읽어보려는 찰나이다. 차가워지는 계절에 시집이 읽고 싶었던가보다. 그녀를 알지 못해서 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편의 시집이 나왔다하던데, 이다지도 어색할 줄이야. 이다지도 생경스러울 줄이야.

이런 어색함이란 졸아들어가는 삶의 어느 궁색함을 덮어버리는 치졸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각설하고 처음 만난 그녀의 작품관이나 표현들은 적잖이 나라는 존재를 벼랑으로 내몰아가곤 했음을 고백한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연 얼마나 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제일까.



시집은 루이즈 글릭의 시집과 함께 역자 정은귀의 ‘옮긴이의 말’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처음 시인의 시집을 읽고나서,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대조하면서 읽고, 다시한번 시집을 읽었다. 이쯤되면 생각이 정리가 될 듯해서. 그런데 나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고통’ 내지는 ‘고통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이미 고통이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표현으로 깊이감 있게 전달해낼 수 있을까. 한 시절. 우리는 그런 말같이 않은 생각들로 고민을 만들어 사서 고생을 하곤 했었다. 과연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 또다른 감정선인 기쁨과 환희의 무게를 읽어내고 잴 수는 있을까. 한명 한명의 인간은 과연 그 모든 것을 다 감내할 수 있게 만들어졌을까.



시집에는 역자도 언급했듯이 신이 등장하고, 가족이 등장하고, 때론 알지 못하는 정령?들을 포함해 죽은 이의 맑은 영들도 등장하는 듯했다. 어떤 죽음은 객관적 죽음을 그리고 있으며 또 다른 어떤 죽음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되, 고민하고 번뇌하는 화자의 시선이 그려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 시집 ‘내려는 모습’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죽음과 영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어쩌면 말이다.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단지 죽음은 암울하면서도 무겁게 슬프다는 개념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는 듯했다.



죽음은 현실과의 동떨어짐이 아닌 현실에서 이어지는 삶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삶 속에서 피고 지는 꽃과 같다. 루이즈 글릭, 그녀가 언급하고 있는 정원의 푸르름과, 꽃들과, 환한 빛들과, 그늘과, 어둠 역시 모두 인간의 삶이 그려내는 그림들 속에 안착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안착만이 편안한 안식을 불러오는 것일까. 남녀의 사랑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리고 주어진 삶을 영위하는데서 생겨나는 희노애락의 흔적들과 그 결정체인 죽음의 의미가 인간을 한 단계 위로, 아니 어쩌면 신이 바라는 어느 단계로? 성장시키는 발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딴은 이 얼마나 말 같지 않는 논리인가. 죽음마저 인간성숙에 있어 일정부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나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감정과 이성에서 흔들리고 있는 걸까. 질척이는 어리석음의 늪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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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장의 두려움 The Fear of burial

아침이면 텅 빈 들판에서,

육신은 호출되기를 기다린다.

넋은 그 옆,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다시 형태를 갖추려고 오는 것은 없다.

육신의 외로움을 생각해 보라.

그림자로 주변을 단단히 묶고

한밤에 추수 끝난 들판을 질주할 때

그토록 긴 여정.

멀리 있는, 마을의 떨리는 불빛들은 벌써,

행렬을 살피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있는 것 같은가,

식탁 위에 묵직하게 놓인

빵과 우유들, 나무 문들.


(내려오는 모습.p17 작품 ‘정원’의 일부 인용 )



지극한 사담이지만, 문득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던 대목이다. 육체에서 홀연히 벗어난 소년의 영혼이 비로소 자유롭게 움직였던 그 장면. 자신의 육체가 썩어들어가다가 급기야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작고 작은 영혼.

‘넋은 그 옆.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다시 형태를 갖추려고 오는 것은 없다.’ 라는 글이 더 처연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빛은 꺼지지 않고, 식탁 위에는 남은 이들의 삶의 연속성을 보여주듯, 묵직하게 놓인 빵과 우유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눈은 또 얼마나 따뜻한가. 진솔한 위로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을 때, 이제 글로 남길 때 영감을 주었던 음악을 기록으로 남긴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때론 누군가에게는 경건한 순간의 기록으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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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사냥 스토리콜렉터 108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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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사냥


 

23. 8. 24일의 기록이다. 책 제목은 악의 사냥크리스 카터의 작품이다. 얼마 전 우연히 챗봇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 크리스 카터를 아는가, 라고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 챗봇이 생각보다 많은 인물들을 나열했지만, 작가 크리스 카터에 대한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 끝에 질문을 바꿨다. 작가 크리스 카터를 아는가? 챗봇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크리스 카터는 꽤 유명한? 작가인 듯했다. 뭐랄까. 범죄 스릴러를 다루는 장르소설에서 그는 이미 인정을 받은 듯했다.

 


스릴러 분야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작품이 딱 한가지가 있다.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이다. 다양한 작품을 접해보지 못했고, 또 일정부분 개인의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음을 기꺼이 고백하게 되는 지금에도, 개인적으로는 양들의 침묵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토마스 해리스의 작품은 스토리가 탄탄하고 구성에서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뜬금없는 소리겠지만, 이제 두 작가, 두 작품을 비교할 수 있을까? 가만히 짐짓 망설이는 까닭을 생각한다. 이건 작품 분석을 위한 레포트가 아니기에, 학평의 시간 역시 아니기에....


 

크리스 카터의 이번 작 악의 사냥은 범죄자와 그를 쫓는 형사와의 두뇌싸움 혹은 심리게임과 같은 플롯을 갖고 있다. 두 인물은 과거 대학시절 어느 한 지점에서 친구로 지냈었다. 그리고 현재는 쫓기는 자(루시엔)와 쫓는 자(헌터)의 자리에서 대립각을 이룬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범죄자의 특성이 사이코패스 성향임을 감안해 루시엔의 성향을 조금 더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작품 안에서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바로죄책감에 대한 두 인물, 아니 루시엔의 대사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오히려 주변 이들에게 죄책감을 전이시켜 느끼게되는 무언의 압력을 형성하는 것. 그것으로 인해 쾌감을 느끼는 것. 그러면서도 작품 속 루시엔은 꽤나 복잡한 심리상태를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내 계획은 네 삶과 항상 함께할 죄책감을 네 안에 불어넣는 거였어. 로버트. 내면에서부터 너를 집어삼킬 죄책감. 네가 절대 없앨 수 없고 죽는 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책감-p468

 


-헌터는 알았다. 루시엔이 스스로 벌인 짓을 통해 자신의 정신을 숨 막히는 죄책감으로 가득 채웠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루시엔의 믿음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p469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하고, 서로가 마주해야 했던 두 인물은 사실 생각보다 가볍게 만남과 헤어짐으로 끝을 낸다. 나는 왜 생각보다 가볍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는 생각의 차이라는 전제조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소설은 일정부분 긴장감이 떨어지는 듯, 다소 산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인물의 사이코패스 성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체적 흐름에서 타이트하지 않고 늘어지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택시를 타고 어디어디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그렇다해도, 옷을 완전히 벗고 헤엄을 칠 것을 강요하는 과정과 같은 장치들이 굳이 사이코패스 성향을 설명할 때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뭐랄까. 나는 조금 더 심도 있는 심리전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그 어떤 무엇?

물론 작품에서도 좌절과 슬픔과 죄책감. 이 모든 것이 혼합된 미묘한 흥분과 같은 감정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흩어져 있는 것을 끌어모으는 힘이 부족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작품과는 별도로 여담으로 적는다. 따지고 볼 때 창작물이고 만들어진 플롯으로 들여다보면 또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긴 하지만 범인이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의도처럼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유발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점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역시 개인마다 다른 문제일까?

우리 사회에서 사이코패스의 성향이나, 소시오패스나..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고 있는 것은, 사실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통의 인간집단에서 함께 생활해가고 있다가 어느 순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 심리학자나 정신분석 학자들에 의하면, 때로는 어느 이들은 자신의 성향을 겉으로 과시하듯 잘 드러나게 행동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암울한 뉴스는 진행형으로 전파를 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각설하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것이면 다 된다. 그리고 말이다. 인간의 어리숙한 본성이 소설을 현실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짧게 하면서 중구난방 중얼거림을 마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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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 1867 - 대만의 운명을 뒤흔든 만남과 조약
첸야오창 지음, 차혜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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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 1867

 

오랜만에 읽고 쓴다. 한동안 쓰는 일에 등한시했더니,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아침나절까지 비가 내렸다. 요란한 태풍이었던가. 남부지방에 태풍의 흔적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유비무환이다. 아들이 말하는 엄마가 좋아하는 말그 유비무환 말이다. 그렇기는 한데 책과 더불어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인생이, 한 민족의 역사가, 늘 유비무환의 공식으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실 씁쓸한 일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또 한없이 수긍해야 할 일인가도 싶다.

 

간만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은 첸야오창의 소설 포르모사 1867’였다. 개인적으로 대만 출신 작가를 만나는 게 이번이 두 번째인가 싶다. 그러나 역사소설 분야의 작가는 처음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소설에 기대치가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가 대만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 걸까. 고작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 관련 일들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중국 본토와 떨어져 있는 대만.

 

책은 대만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픽션 위에 논픽션이라고 썼다가 다시 고쳐 쓴다. 작품 포르모사는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자리에, 픽션이 적절하게 자리를 잡은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가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인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독자들의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법한 일이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역사적 논픽션이 더 짙게 배어든 작품을 선호하는가도 싶다.

작품 포르모사 1867’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정이 가는 작품이다. 누워서는 그 무게로 힘이들어 볼 수 없을 정도로? 꽤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은, 에필로그 포함 687페이지로 편집됐다. 종이의 무게감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얇지는 않아서 더 두꺼워진 것도 같다.

 

이제 작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작품의 배경은 1867년 대만(포르모사)의 어느 해안가에 조난 당한 선박 사건에서 시작된다. 바로 소설의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로보호 사건이다. 이때 선장의 부인과 몇 명의 선원이 당시 해안가에 있던 원주민 (생번)들에 의해 피살당한 역사적 사실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끌어안는 중심 사건으로 대두된다.

작품은 포르모사를 외지에서 보는 시각(양인의 시각), 내부에서 강조되는 시각(다양한 원주민들의 시각)에서 비교하며 분석해보면 좋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제국주의의 시초로 인해 강대국의 시선에서 내려다보이는 포르모사와, 반대로 섬 안에서 변혁의 시절을 살아가게 되는 일반 민초들의 생활사와 그들의 삶의 모습을 같은 선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인가 싶은 거다.

 

특이한 점은 포르모사의 지역적 특성상 다양한 구성원들의 집합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각각의 집단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생번(고산지대) 혹은 토생자(평지)로 구분하고 있으나, 더 세밀하게 들어가자면 객가인, 북노인들의 등장까지 꽤나 복잡한 집단이 등장하곤 한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면서도 함께 공존하기 위해 안위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어찌보면 중국 대륙조차 여전히 다양한 소수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물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지나친 스포일러 인듯해서 서둘러 여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야 할 것 같다.

 

각설하고, 소설은 중대한 사건을 함께 해결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력충돌. 바로 양인과 포르모사 사이의 전쟁이다. 어려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인물들을 배치하고, 각각의 인물에 걸맞는 행동을 부여하는 작가의 사상과 의지가, 나름 확고하게 보인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나를 언급하자면 어쩌면 시종 개인의 잡견일 수도 있겠지만, 이쯤에서 포옹과 화해그리고 '통합'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고 싶다.

 

-이제 접매는 스스로 사료 사람이 되었다고 여긴다. 송자는 앞으로 태어날 자녀는 토생자의 피와 북노인의 피, 객가인의 피, 생번의 피가 골고루 흐를 테니 모든 사람이 친척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p617

 

그들이 서로간에 반목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은, 포옹과 화해가 아니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감상적 정서라는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감상평이다. 그렇긴 해도 이 대목이 좋아보이는 건 사실이다.

이제 마무리다. 포르모사 1867’은 소설 작품으로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대만의 잊혀진 혹은 감추어진 역사를 다시 한번 배우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다준 책이다. 소설로서의 매력도 함께 갖추고 있어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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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머문자리
임려원 지음 / 프로방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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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머문자리


 

세상의 인연을 생각한다. 인연을 생각하다가 다시 우연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린다. 모든 순간은 인연일까. 아니면 낯선 우연의 순간일까. 우리는 인연 속에서 우연을 만나고, 우연을 거듭하면서 인연을 만들어간다.

 


실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처음의 마음도, 읽는 도중에 생겨난 일도 다 복잡한 심리에서 기인한 것들이었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기 시작한 지는 꽤 됐지만, 이상하게도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위로받고 싶었던 옹졸함이 자꾸 투정을 불러들였었던가 보다. 그렇게 나는 꽤나 짜증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있나 보다.

이른 아침 비가 내린 후 수줍게 해가 드는 지금, 이처럼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인연인지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순간을 채워주는 평온함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생각에 잠시 잡념을 내려놓는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안녕하신가요.

 


책을 읽으면서 줄곧 여러 가지로 분절되는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또다시 분노했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가도 그렇구나, 라며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인간의 감정이 이처럼 본래 수만 가지였던가. 정말이지 다양한 감정의 변화였다.

저자는 글은 무척이나 차분하다. 저자 본인의 이야기. 내담자였을 누군가의 이야기. 다양한 자료와 책 인용 이야기 등등. 너울거리는 감정의 파도를 누르고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눈과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법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책을 읽는 이의 심리상태에 따라 공감의 정도는 서로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책 속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는 분명 따스하다.


 

딴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책 읽기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감정의 파도는 여전히 요란하고, 거품을 토하며 달려드는 거친 파도를 잔잔하게 할 내면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저자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쯤이야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씁쓸한 일이다. 완벽한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계속 징징거리고 있으니 힘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말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본인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말에 힘을 내본다.

 


개인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 스트레스를 잘 맞이해야 한다는 이야기.p57/ 예민함의 이유를 이야기를 언급하는 대목p93이 와닿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외에도 내면의 자아와 마주할 만한 이야기가 많이 실렸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공감과 소통을 찾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은 참 씁쓸하다. 내일은 좋아지려나. 좋아지겠지. 좋아질거야. 저자의 이야기 중에서 힘이 되었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옮겨본다.


 

속상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분노 감정이 쌓이기 전에 가볍게 표현해보는 것도 좋다. 마음의 건강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자신에게 찾아온 감정은 나쁜 게 아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봐주어야 한다.”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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