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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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모습



오랜만에 글로 남긴다. 두어 달을 더 넘겼다. 계절은 빠르게 변해가는 중이다. 여름 막바지 어디쯤. 그 무더운 더위가 아직 겨드랑이 깊은 축축했던 고랑에 매달려 있을 것만 같은데, 이제는 코앞으로 다가온 차가운 계절의 이름을 서둘러 불러보는가 싶다. 내일은 아마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을까 싶다.



공백은 길었을까. 아니면 짧았을까. 공백이 만들어낸 무지의 터널은 크고 넓었을까 아니면 비좁고 음침했던가. 가벼이 흩날리는 생각조차 없이 시계의 초침은 쉼없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는 일이 반복되더라. 그런데 결국에는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나라는 사람은 참 어리석기 짝이 없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지만 밖으로 방황하다 돌아왔어도 책은 언제나처럼 곁에 있었다. 말없이 어긋나기로 작정을 한 이런 나까지 내치지 않고 기다려준 오랜 지기가 있어 살아가는데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내려오는 모습’ 루이즈 글릭의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한권 더 읽어보려는 찰나이다. 차가워지는 계절에 시집이 읽고 싶었던가보다. 그녀를 알지 못해서 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편의 시집이 나왔다하던데, 이다지도 어색할 줄이야. 이다지도 생경스러울 줄이야.

이런 어색함이란 졸아들어가는 삶의 어느 궁색함을 덮어버리는 치졸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각설하고 처음 만난 그녀의 작품관이나 표현들은 적잖이 나라는 존재를 벼랑으로 내몰아가곤 했음을 고백한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연 얼마나 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제일까.



시집은 루이즈 글릭의 시집과 함께 역자 정은귀의 ‘옮긴이의 말’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처음 시인의 시집을 읽고나서,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대조하면서 읽고, 다시한번 시집을 읽었다. 이쯤되면 생각이 정리가 될 듯해서. 그런데 나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고통’ 내지는 ‘고통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이미 고통이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표현으로 깊이감 있게 전달해낼 수 있을까. 한 시절. 우리는 그런 말같이 않은 생각들로 고민을 만들어 사서 고생을 하곤 했었다. 과연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 또다른 감정선인 기쁨과 환희의 무게를 읽어내고 잴 수는 있을까. 한명 한명의 인간은 과연 그 모든 것을 다 감내할 수 있게 만들어졌을까.



시집에는 역자도 언급했듯이 신이 등장하고, 가족이 등장하고, 때론 알지 못하는 정령?들을 포함해 죽은 이의 맑은 영들도 등장하는 듯했다. 어떤 죽음은 객관적 죽음을 그리고 있으며 또 다른 어떤 죽음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되, 고민하고 번뇌하는 화자의 시선이 그려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 시집 ‘내려는 모습’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죽음과 영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어쩌면 말이다.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단지 죽음은 암울하면서도 무겁게 슬프다는 개념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는 듯했다.



죽음은 현실과의 동떨어짐이 아닌 현실에서 이어지는 삶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삶 속에서 피고 지는 꽃과 같다. 루이즈 글릭, 그녀가 언급하고 있는 정원의 푸르름과, 꽃들과, 환한 빛들과, 그늘과, 어둠 역시 모두 인간의 삶이 그려내는 그림들 속에 안착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안착만이 편안한 안식을 불러오는 것일까. 남녀의 사랑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리고 주어진 삶을 영위하는데서 생겨나는 희노애락의 흔적들과 그 결정체인 죽음의 의미가 인간을 한 단계 위로, 아니 어쩌면 신이 바라는 어느 단계로? 성장시키는 발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딴은 이 얼마나 말 같지 않는 논리인가. 죽음마저 인간성숙에 있어 일정부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나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감정과 이성에서 흔들리고 있는 걸까. 질척이는 어리석음의 늪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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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장의 두려움 The Fear of burial

아침이면 텅 빈 들판에서,

육신은 호출되기를 기다린다.

넋은 그 옆,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다시 형태를 갖추려고 오는 것은 없다.

육신의 외로움을 생각해 보라.

그림자로 주변을 단단히 묶고

한밤에 추수 끝난 들판을 질주할 때

그토록 긴 여정.

멀리 있는, 마을의 떨리는 불빛들은 벌써,

행렬을 살피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있는 것 같은가,

식탁 위에 묵직하게 놓인

빵과 우유들, 나무 문들.


(내려오는 모습.p17 작품 ‘정원’의 일부 인용 )



지극한 사담이지만, 문득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던 대목이다. 육체에서 홀연히 벗어난 소년의 영혼이 비로소 자유롭게 움직였던 그 장면. 자신의 육체가 썩어들어가다가 급기야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작고 작은 영혼.

‘넋은 그 옆.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다시 형태를 갖추려고 오는 것은 없다.’ 라는 글이 더 처연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빛은 꺼지지 않고, 식탁 위에는 남은 이들의 삶의 연속성을 보여주듯, 묵직하게 놓인 빵과 우유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눈은 또 얼마나 따뜻한가. 진솔한 위로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을 때, 이제 글로 남길 때 영감을 주었던 음악을 기록으로 남긴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때론 누군가에게는 경건한 순간의 기록으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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