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 찬란한 생의 끝에 만난 마지막 문장들
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주제가 그러한즉 이야기의 시작도 어째 무겁기 그지없다. 책이 물었다.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죽음이 죽음을 묻지 않고 외려 삶에 대해 묻고 있다. 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죽음을 건너 온전한 삶을 이야기하는 걸까.

죽음에 대해 무엇을 언급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던 것 같다. 나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 걸까. 피상적으로? 혹은 본질에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일까.



죽음을 이야기할 때면 죽음이 품고 있는 내면의 그 어떤 것을 생각하기보다,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강조하는 면면들을 보곤한다. 그런데 가끔은 약간의 억지를 좀 부려보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이를테면 삶과 죽음의 연결선을 무시하고 오로지 죽음만을 떼어 생각해보고 싶은? 혼자만의 생각 같은 것이라고 할까. 아니다. 사설이 길었다. 너무 몰입하면 머리가 아프다. 개인적인 잡념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겠다.



한스 할터의 책이었다. 이번 책 말이다. 사실 생각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 방성향을 갖고 있어 어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할지 잠시 아니 조금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책은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 정치인, 철학자, 배우, 과학자,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 종교인, 역사적 인물들까지 한스 할터의 시선에 담겨진 인물들의 죽음이, 마지막 순간에 언급했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스 할터. 그는 왜 이 많은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언급하고 싶어했을까. 단순히 그들의 죽음을 소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저자의 의도를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찌보면 힌트는 제목에 걸려있다. 생각의 차이겠지만, 이 책은 제목이 제 기능을 충분히 그리고도 또 과할정도로 넘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딴은 작가의 깊은 상념과 의도를 내가 너무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의심을 가져보다가도, 개인적으로는 더 깊은 깊이감을 원했었는지.... 생각을 다시 재정리하곤 했었던가 보다. 물론 취향의 문제로 볼 일이다.



책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지위를 막론하고 남녀와 노인을 떠나서(책에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다루지 않는다) 모든 죽음은 평등하다는 것. 사람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다 그 순간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고 싶어 집어든 책이건만, 모두의 죽음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들 각자의 삶의 모습을 나직이 반추하게 되는 순간이 더 컸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이런 면면들이 작가가 진정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개인의 취향으로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짧게 남긴다.

책 안에서 독일의 시인. 소설가로 소개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서에 실린 글이다. 부인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나의 모든 친구들이 길고 긴 밤 뒤에

찾아오는 붉은 해를 볼 수 있기를.

그러나 무엇보다 참을성 없는

나는 그들보다 먼저 떠난다네.”p221



가볍거나 혹은 무겁거나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무게’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경건하게 다가서는가 싶다. 문득 내게 남겨진 시간의 초침 소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 올바르게 느껴지지 않고 뭔가 빠져있다면 - 마음을 치유할 심리치료사의 핵심 아이디어
프랭크 탤리스 지음, 손덕화 옮김, 김정택 감수 / 더로드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 올바르게 느껴지지 않고 뭔가 빠져있다면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오랜만에 문장 인용으로 부제를 적어본다. 무척이나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모든 게 다 이해되고 용서가 될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문장이 지니는 힘인지. 그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욕 때문인지 잘 알지 못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문장에 무한으로의 위로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정말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문제일까. 열길 물속보다 더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심리학 관련 책을 보고나니 어째 말투가, 아니 그보다는 빈 여백을 채워가는 문장의 흐름마저 책의 분위기를 따라가는가 싶다. 이런 건 또 뭐라 명명할 수 있을까.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에 지나치게 잘 휩쓸리는 사람? 바로 전에 읽은 책의 어조나 전체적인 느낌을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까지 말이다.


그리고 문득 질문들이 생겨나곤 했었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각자의 혼돈을 극복하고? 명징하게 진실만을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 심리학의 시작일까, 하는 의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때로는 프랭크 탤리스의 이번 책을 읽으면서 광범위한 철학서적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그의 책을 읽으면서 철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종행무진으로, 마치 잘 조직된 코스로 달리기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던가 보다.


한편으로는 책 제목이 생각보다 너무 길었던 것은 좀 아쉽다. ‘삶이 올바르게 느껴지지 않고 뭔가 빠져있다면’이라는 문장이 주는 느낌은 시종 공허함이었다.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아지는 걸까. 어쩐지 내 생활이 그런 것 같은데.

다소 긴 제목의 설정은 어쩌면 그만큼의 동질감과 위로의 작용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구성을 좀 살펴보자. 책은 결론을 포함한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백한 저자의 의도였을 법한데,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소개의 글로 에리히 프롬의 글(자유로부터 도피)이 무려 30페이지 정도 실렸다. 이런 장문의 소개의 글을 본 적이 근래에 또 있었던가. 그렇기는 한데 왜 저자가 에리히 프롬의 글을 소개의 글로 정했는지. 이쯤에서 한번은 생각해볼 일이기도 하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13가지로 구성된 심리학 분야의 명제들과 그 안에 저자가 붙인 부제로 순서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장들이 종합적으로는 심리학으로 이어지고 있는 하나의 맥락이긴 하지만, 13개로 구성된 명제들의 이야기는 또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지녔다고 본다. 그 덕분에 어쩌면 관심이 더 가는 부분부터 읽어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 모든 책을 처음 목차부터 마지막까지 읽어가지만, 연필을 들고 우선적으로 관심 가는 장을 체크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3장 통찰: 마음먹음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5장 정체성: 분열된 자아’, ‘9장 열등감: 부족함이 주는 위로’, ‘11장 역경: 뿌리 깊은 슬픔’처럼, 개개인마다 유독 시선이 머무는 명제들이 분명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개인적인 심리 상태가 확연히 드러나는 듯해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심리학 혹은 정신 분석학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이어져왔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조금씩 배웠던 기억을 반추하며 프로이드와 융.. 그런 사람의 이름만을 중얼거릴 뿐이다. 책에는 수많이 심리학자들이 등장한다. 더불어 그들의 이론과 실제 사례(저자의 상담사례 포함)와 심리학과 정신분석 분야에서 어떻게 정착되고 발전해갔는지 소개한다. 각각의 장마다 주제를 정한 까닭도 어찌보면 다양한 학자들과 그들이 주로 연구했던 분야를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이번 프랭크 탤리스의 책이 다양한 학자들과 이론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시선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심리학은 프로이드의 이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심리학의 시작이 역사적으로 볼 때, 프로이드가 시초가 아니었더라 하더라도 저자의 인식 안에 자리하고 있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역사는, 프로이드에서 시작되고 프로이드에서 정착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는 듯하다. 저자가 마지막 결론의 장에서 다시금 언급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프로이드였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책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성욕. 소유욕과 물욕. 정체성과 불안한 자아. 나르시시즘 혹은 죽음과 인간 존재와 같은 심오한 이야기들이 실렸다. 철학, 심리학, 종교학, 혹은 예술을 바탕으로 하는 미학이나 문학이든, 어떤 학문으로의 접근이든지 간에 이러한 주제의 접근과 탐구는 꽤나 치열하고 또 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그의 책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미술작품(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대한 분석과 사고 역시 심리학의 이색적인 접근방식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기실 모든 학문의 접근을 수용하고 있는 심리학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인상을 받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늘 불안 속에서 좌절하고 흔들리지만 수용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흔들려야 하는 것들로부터 다시 일어섰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의 다양한 표현들이 생각난다. 불안한 자아와 마주할 수 있을 때(그것은 진정한 용기이다) 진보할 수 있는 방향성은 꾸준하게 제시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제 마지막이로 사설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부루노 베텔하임’과 ‘알프레드 아들러’ 두 학자의 이론에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쓰고 싶어진다. 그들의 이야기에 더 몰입하고 싶어졌나보다. 사실은 책 한권에 수십 개의 인덱스를 붙였건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프랭크 탤리스의 책에 대한 경건함 마음을 기꺼이 담아본다.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미덕은 다른 지적 전통에서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측면을 기꺼이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p99


-아들러는 우리에게 용감하고 실패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중요한 것은 노력하는 것, 단순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약하고 결점이 있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p2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을 죽인 여자들


소설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다. 내가 언제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의 작품을 또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강한 것들이? 다가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왜 나는 남미 출신 작가들은 으레 조금씩은 그러하지 않을까(무엇이 그러하다는 말인지-.-!)라고 지레짐작 하는 것일까. 못난 추측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딱히 뭐랄까. 그저 불성실한 개인만의 추측 때문은 아니고, 이번 소설은 조금은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접해왔던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과는 또 살짝 다른 성격의 작품이지 않을까.

보통의 범죄 스릴러, 혹은 호러 장르를 생각할 때 따라오는 요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의 평범하지 않았던 가족사, 성장과정에서 주인공을 괴롭혀왔던 고통과 장애물, 개인과 집단의 심리적 접근(교집합적인 문제)을 포함한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문제적 인물들의 사회 부적응과 같은 불안적인 요소와 함께 이를 끌어안고 걸러낼 수 있는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의 자정작용이 부족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는 묘하게 다양한 요소들을 배치한 피라미드 위 최상단에 종교적 문제를 배치하고 있다. 범죄와 종교라.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예수는 제자들을 물리고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아버지께 애원의 기도를 올렸던 것을 성경에서 본 적이 있다. 아니 그렇게 배우고 일평생 기억하며 살도록 들어왔던 것 같다.

피할 수 있으면 비껴가게 해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처절한 애원, 혹은 삶의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대목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어떤 비범한 존재로 인식되는 딱딱한 시선을 다소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끝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며 다시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작품에서 함께 생각해야 할 요소들은 인간적인 예수의 고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게서 거두어 달라는 말 보다는, 이어지는 뒷문장에 더 큰 무게감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닌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작가는 작품에서 이 부분을 왜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 중 이를테면 가장 중심인물로 보여지는 인물인 홀리안과 카르멘에게 종교는 어떤 차원의 세계였을까.



소설의 사건은 30년 전 열일곱의 어린 여학생 아나의 토막 사건으로 시작되고 있다. 소녀는 왜 죽어야 했을까. 왜 범인은 사체를 토막내어 불태워야 했을까. 이 모든 알 수 없는 의문의 행위들과 절대적 신념의 종교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딸의 죽음을 끝까지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사건으로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매. 그리고 인간적 사랑을 쫒아 신과의 언약을 깨는 홀리오와 아나의 진정한 지지자이자 친구였던 마르셀라를 통해 소설은 이어진다. 책은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과 같은 이야기를 실은 구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책을 읽으면서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던 부분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잘못을 신은 그저 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용서 할 수 있을까. 죄를 범하는 이들의 주장처럼 이 또한 신의 뜻이니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죄 역시 신의 뜻이란 말인가. 범죄와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이 결국 숨을 곳은 신의 그림자와 신의 날개 밑이라면, 인간이 그토록 신께 의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응당 흔들려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작품 안에서 만나는 인물인 홀리안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암시를 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 그와 함께 피해당사자였던 아나의 첫째 언니인 카르멘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데 당연해 보인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자기 합리화의 덫에 안착하려고 하는 것일까. 작가는 왜 두 인물을 이렇게 그려낸 것일까. 이는 예수가 자신의 나약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고백의 무게를 자신의 아버지인 신께 돌리려 했던 순간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신실한 종교인에게는 반감을 살지도 모를 이야기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이므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잠깐의 인용이다. 홀리안의 생각들 중 일부를 들여다보자.

-그(아들 마테오)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지금도 그를 찾고 있지만, 나는 아무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나가 죽은 후로 아내가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중간생략) 카르멘이 불임이 된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는 두려웠으나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믿었던 신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소극적이면서도 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홀리안, 적극적이면서 결단력 있는 행동을 옮기는 카르멘. 무엇을 연상할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한다. 문득. 에덴동산에 살았다던 아담과 이브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든 죄를 자신의 여인 이브의 탓으로 돌렸던 그는 어쩐지 아담과 닮아있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가 그러했던 것일까. 작가 역시 성경 창세기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제 정리를 해야한다.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를 매우 정교하게 그려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연계도 그렇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성격과 작품 안에 녹아드는 인물들의 특징들이 매우 상징적인 동시에 작품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소 비중이 적은 인물인 마테오의 설정 역시 작가의 전체적 의도 안에 잘 안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작품 안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들이 등장한다. 대성당 역시 그 중 하나다. 작품을 완독한 이들이라면 작가가 의도하는 대성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왜 제목이 ‘신을 죽인 여자들’이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생각 중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 보인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자주 언급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드는 지금이다. 복잡한 것들일랑 다 내려놓고 들여다보자. 어쨌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마다 자기만의 아름다운 대성당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 대입 수시 - 혼잡한 입시에서 승리하는 방법
김혜남 지음 / 지상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 대입 수시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아직도 진행 중인지 잘 모르겠다. 합격자 발표는 아직 진행 중인가. 최종 결과는 1월이 되어야 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려운 관문이 이어지고 있는가보다.

아이가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지역도서관에 간다고 전화를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지 않는 이 아이는,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한 달 정도 남겨둔 시점부터 지금까지 도서관이 문을 닫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가고 있다. 철이 들었나. 아니면 부모 눈치가 보이나. 그도 아니면 다 귀찮아진 걸까.


먼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아이는 수험생이라는 자리가 코앞이고, 나는 수험생 학부모라는 가열찬 속도로 무장한 두뇌싸움전의 열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이다. 이제 곧 큰 아이가 고3. 둘째가 고1. 오빠가 예비 수험생인데 둘째는 보란듯이 자기 앞가림을 하는데 여념이 없다. 미대에 가고 싶으니 입시 미술 학원에 등록해달란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나는 자꾸 이런저런 궁리만 하고 있다. 전업주부 이십여 년을 정리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하나. 큰 아이에게 뭐라도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


부모 마음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꽤 오랜만의 공백을 깨고 들여다본 책이다. 아이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 시기에 뭐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부담감 등이 나를 부추겼던 것도 사실이다. 무능하나 무지한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나를 책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동기부여는 그러한 모양새였다. 이제 책으로 좀 들어가 보자. 책은 25년도 입시를 앞둔 아이들 즉 내년에 고 3이 되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모은 책이다. 다양한 입시 방법? 중에 교과와 종합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논술의 중요성과 함께 꼭 참고해야 할 것들을 집약해 놓고 있는 것도 언급할 일이다.


세부적으로 볼 때 무엇보다 이번 책의 메리트라면 학교마다 제시하는 교과전형 입시 기준과 학생부 종합전형 입시 기준에 대한 비교 분석과 그 예시일 것이다. 학교는 서울 시내 자리하고 있는 ‘서울권 대학’과 경기도 권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수도권 대학’ 그리고 지방의 국립대학으로 ‘지방거점 국립대’로 분석하는 수순이다.


1부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지원전략에서는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들. 확실하지 않았던 정보들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시행하고 있는 학부모 대상 진로 입시 상담 컨설팅 시간에서 들었던 것들과, 외부에서 영입한 컨설팅 전문가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소급해 기억을 되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학업이든 활동에서든 진로역량에서 자기 주도적 활동과 노력. 그리고 과정에서의 문제해결력과 결과물을 생각해 볼 일이다. 여기에서 수반되어야 할 것들은 비단 학업 성적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독서와 함께 동아리 활동 내지는 전공과 연계해 진로 선택과목과 비교과 영역에서의 성실도(성취수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내 아이가 이과계열이고 본인이 학생부 종합전형을 생각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종합 위주로 살펴보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교과전형까지 살폈던 것 같다. 아직 무엇하나 정해진 것은 없고, 언제든 상황에 따라 혹은 성적에 따라 선택권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었던가 보다.


책은 24년도와 25년도 입시에서 달라진 점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어서 비교하기 쉽고, 표와 함께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큰 장점으로 읽힌다.

책은 최저등급 적용과(미적용 대학정보), 서류전형과 면접 관련, 자연계 및 인문계 논술평가 관련 내용처럼,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으면 좋을 내용들을 대거 포진시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일반고와 특목고, 혹은 자사고 외고 학생들과 경쟁할 때의 합격률을 제시하고 있어 막연한 수치 싸움에서 조금은 현실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내 아이가 원하는 전공과 학교를 잘 파악하고, 어떤 입시전형으로 원서를 지원할 건지 미리 생각해보면서 참고하면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12월의 마지막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오늘이다. 아이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지 고민에 빠져있는지 알 길은 없고, 나는 불안한 마음을 책으로 달래며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먼 훗날 어디메쯤. 이 순간을 돌이켜보며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어쨌든 다가올 일 년은 고되게 보내야 할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라라트 산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라라트 산



23년 수능이 있는 날이다. 하늘이 많이 흐리다. 아주 오래전에는 입시 한파라는 게 있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변해가는 세월만큼이나 날씨도 참 변화무쌍하지라, 날씨마저 한쪽으로 간략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어보인다. 흐린 날이 지나고나면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어쨌든 긴장해서 떨리는 마음들이, 한파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져 좋은 결과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은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날인가. 자식이무언지.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명명되어지는 삶이란. 참 오묘하고, 참 어렵고, 또 참으로 거스를 수 없는, 그렇게 먼저 신이 예비해둔 길 같기도 하다.



72페이지의 시집을 읽어내기가 버겁다. 이토록 얇은 시집이 또 있을까. 겉으로 다가오는 시집의 분위기는 얇고 가벼우며 아담하다. 그러나 실은 거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루이즈 글릭의 시집 중 두 번째로 읽어본 작품은 ‘아라라트 산’이다. 아라라트 산은 어디에 있는 산일까. 역자 정은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아라라트 산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신의 노여움으로 생긴 홍수로 표류하다 가닿은 산이라고 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가 아는 노아 할아버지는, 산에 가닿기 전에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보냈지 아마. 아니. 순서가 틀렸다. 까마귀를 먼저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 대신 비둘기를 보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는 배신의 이미지, 그리고 푸른 잎을 입에 물고 돌아온 비둘기는 사랑과 보은의 이미지로 굳어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까마귀는 나름의 생존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을 했을 뿐, 그것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비둘기는 왜 인간에게 다시 돌아갔을까. 애초에 신이 비둘기에게 다시 돌아가라 가르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라라트 산’ 이라는 글릭의 시는 단순히 시집만을 읽었을 때와 역자의 해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우스갯소리이겠지만, 시집은 해설집과 나란히 옆에 두고 읽어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난해함을 가시처럼 품고 있는 시집이다.

역자의 해설에서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자면, ‘아라라트 산’이 출간된 시점은 1990년이었고, 지난주에 먼저 읽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이 출간된 시점은 1980년이었다. 물론 십년이라는 텀 그 사이에도 시인의 작품집은 계속 출간되었다는 것. 그리고 90년 이후 21년까지 그녀의 작품 활동은 현재행인 듯했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사유는 계속 달려가는 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먼저 접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 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 ‘아라라트 산’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생이라는 ‘중간’지점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 육체를 떠나가는 영혼들을 끌어안는 어느어느 시선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느낀 변화라면 그 시선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려오는 모습’에서 깊은 우물과 같은 곳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내적 자아의 모습이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면, ‘아라라트 산’ 에서는 전작보다는 더 넓은 시선을 보여준다고 느끼게 된다. 시인과 아버지. 시인과 어머니. 시인과 여동생. 그리고 시인의 아들과 시인의 조카. 마지막으로 어려서 죽은 언니까지.


시집은 어쩌면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라 했던, 역자 정은귀의 해설에 공감하게 된다.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시인은,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모습을, 그 아버지를, 아버지를 덤덤하게 떠나보내는 반쪽뿐인 어머니를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랑하게 되는가 싶다. 여기서 반쪽분인 어머니의 이미지는 죽은 언니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 그로 인해 어머니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시인의 유년시절 자아와 그 맥락이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뭔가가 바뀌었다:언니가 죽자,

엄마 심장은

아주 차갑고, 아주 딱딱해졌다.

자그마한 철 목걸이처럼.

내 언니의 몸은 자석이라고

그런 것만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엄마 심장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자라도록 말이다.

--------------------------- 아라라트 산 ‘잃어버린 사랑’ 일부 p23



내가 잘하는 게 하나 있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착해지려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죽은 아이한테서 엄마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그렇게 했다.

난 마음껏 아이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그렇다,

멈추었다 갈 수는 있지만 방향은 바꾸지 못하는 장난감 같다.

----------------------------아라라트 산 ‘이모’ 일부 p29



조금. 조금만 이야기의 흐름을 넓게 뛰어보자. 너무 한 곳에 몰입해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이다. 환기가 필요한 시점인가. 한편 시인은 매우 혼란스럽고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듯 긴장감을 보이지만, 결국 그녀는 혼란의 강을 스스로 잘 건너가 종단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반듯하게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기어이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시집 ‘아라라트 산’에서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곳은, 혼란과 암울 혹은 역경이 아닌 그 난관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느 하나의 긍정적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좀 희망적인가. 그러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그녀의 시집을 단 두 권밖에 보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단 두 권의 시집으로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역자 정은귀는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 ‘최초의 기억’을 언급하며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수동적인 사랑이 아닌 능동적인 사랑으로 이해 해석하면 좋을법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

한편, 개인적으로 감히 역자의 이야기에 보태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여겨 본 텍스트는 ‘최초의 기억’ 바로 앞전에 실린 작품 ‘천상의 음악’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화자. 이 화자의 이야기 안에 담긴 고백 같은 바람들. 어쩌면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진솔한 면면들이지 않을까.....



현실에서, 우리는 길가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본다;

이따금씩, 새소리가 정적을 뚫는다.

바로 이 순간, 우리 둘 다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죽음에도, 고독에도 편안하다는 사실을,

내 친구는 땅에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애벌레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친구는 늘 온전한 무언가, 아름다운 무언가, 자기를 빼고도 삶이 가능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쓴다.

우린 아주 조용하다. 여기 말없이 앉아 있으면 평화롭다, 구도는 변함없고, 길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대기는 서늘해지고, 여기저기서 바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건 바로 이 고요함이다.

형식을 사랑하는 건 끝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라라트 산 ‘ 천상의 음악’ 일부 p69



인간이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혼돈의 경계를 뚫고 결국 나아가고자 하는 곳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이데아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것까지 신이 준비해둔 무엇이라고 생각을 돌려보면 그나마 이내 마음이 편해지려나. 어쩌면 노아가 떠나보냈던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도, 까마귀를 믿지 못해 대신 날렸던 비둘기가 돌아온 것도 신의 뜻이요.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개체마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자위의 측면이 강해지는 가 싶다. 중구난방식 말도 안 되는 자위와 자조라고 해야하나.



마지막이다.

죽음에도, 고독에서도 편안할 수 있다는 시인의 말.

모든 것이 고요해질 수 있다는 시인의 마지막 말이 긴 울림으로 자리하는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