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불짜리 글쓰기 습관 - 아이의 글쓰기 실력이 미래를 좌우한다
박은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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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불짜리 글쓰기 습관

-글쓰기. 느끼고 생각하기

 

 

    

말하고 싶은 건 이런거다. 믿음의 힘. 끝까지 믿어주는 신뢰감이 가져오는 에너지는 무한하다. 부모는 아이들을 믿어주고 또 개인은 스스로의 자아를 믿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외면하거나 쉽게 단정짓지 말자는 것이다.

백만불짜리 글쓰기 습관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은 것, 변변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꾸준함의 힘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을 생각해보자. 무엇보다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글의 성격도 달라져간다. 조금 더 진지하고 조금 더 따뜻하며 크든 작든, 무겁든 혹은 가볍든지간에 넓게 품어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의 책들이 좋아진다. 그런 개인의 취향을 딱히 차치한다고 해도 이 백만불짜리 글쓰기 습관은 따뜻한 기운과 시선이 가득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책은 글쓰기의 힘, 글 쓰는 아이, 글쓰기가 아이를 성장시킨다.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서 글에 대한 저자의 다양한 생각들이 저술되어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가장 확실한 맥락은 독서의 힘이 바로 글쓰기의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글쓰기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우선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독서로 안정적인 자리를 마련한 이후에 글쓰기의 재미를 알아가는 게 중요하고, 그 재미를 스스로 발견해서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도서관 근처로 이사를 갔고, 늘 책을 읽어주었으며, 하루에 몇 분씩 짧게 짬을 내서라도 성실하게 글을 쓰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독려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이를테면 비난의 창은 잠시 내려놓고 칭찬의 선물을 무한으로 안겨주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이가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이야기에서 무언지 모를 따뜻함과 위로를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세상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위해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완수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바로 연습의 중요성이었다. 책은 글을 잘 쓰기 위한 환경적 요소와 글쓰기에 필요한 준비과정 내지는 워밍업 비슷한 내용을 소개한다. 시작부터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이들에게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글이란 진정성이 담긴 글이라는 생각을 한다. 표현이 다소 거칠어도, 문맥이 삐걱거려도 그 사람의 맑은 영혼을 글에서 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정성은 솔직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자신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것처럼, 글을 쓸 때는 솔직해야하고 자기만의 목소리가 담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 그 목소리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런 어른 글 흉내내기로 시작하는 글쓰기 지도는 아주 잘못이라고 본다. 아이들에게 자기 스스로 보고 듣고 생각한 것, 행한 것을 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글이 된다. ”

작가가 인용한 이오덕 선생의 글을 기록으로 남긴다.

 

나는 여전히 끄적이는 일상을 살아간다. 카톡에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짧은 분량의 감상을 끄적이며, 다시 장문의 글은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다. 그날그날 일상의 모습을 글로 적는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책을 보았는지, 무슨 일로 괴로워했는지,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나는 나의 시간과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저자의 글을 보고 있으면 글쓰기는 진정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과 같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을 관찰하고 경험하며 생각한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계기를 갖게 된다. 그 결과물인 책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독자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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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꽃들
V.C. 앤드류스 지음 / 한마음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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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꽃들

-성장하고 또 다시 성장하는 존재들

 

책은 꽤 유명한 책이었다. 그런데 나만 몰랐던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었던 게 다였다. 어째서 내 관심을 끌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이 책을 그렇게 오래도록 외면했던 것일까.

어느 누군가 말했다. 이 책은 단행권이 아닌 여러 권으로 구성된 책이며 읽다보면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건넸다. 강열한 이미지의 스포일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금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읽으려고 하니 힘이 들었다. 94년 1월 초판 15회 발행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누렇게 변한 종이에서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캐한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다락방의 꽃들이라는 제목만을 가지고 생각해본다면 무언가 낭만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딴은 침침하고 음습한 공간과는 상대적으로 아름다움 혹은 연약함과 향기로운 꽃향기, 유혹, 사랑 등으로 상징되는 꽃의 등장은 분명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한국영화 ‘올드보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왈츠로 알려진 그 음악 쇼스타코비치 왈츠를 오래도록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영화와 소설은 닮은꼴이 많아보이였다.

 

영화 속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의해 납치를 당하고 감금된다. 납치와 감금은 나 혹은 주인공의 의지와는 별개로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 소설에서는 제목에서 나오는 다락방이 있는 하나의 방이 강금의 장소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나간다. 사고였다. 남겨진 가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낯선 땅, 낯선 집,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이들의 감금상태는 어머니의 서글픈 계획내지는 집요한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왜 계획과 계략이라는 두 단어를 같이 쓰고 있는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아이들은 지혜로웠으나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했다. 아이들은 사랑이라는 것의 정서적 교감과 모성애와 어머니라는 의미가 지니는 무한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는 정작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인물로 변해간다. 네 명의 아이들 크리스토퍼, 캐시, 쌍둥이인 캐리와 콜리는 조부의 죽음을 기다렸다. 그 결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부자가 되어 자신들을 방에서 꺼내줄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다락방이 딸린 외진방에 갇혀 3년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틴다.

 

소설이 갖는 중요한 포인트로 근친상간의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해받기 어려운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다. 이 두 사람은 세간의 비난과 날선 이목을 피해 성을 바꿔 아이들을 낳아 평범하게 살았지만 결국 가문에서 버림받는 신세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네 아이들은 처음부터 저주받은 아이들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출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온몸에서 감정이라는 이름의 모든 찌꺼기가 빠져나간 듯한 무감각하고 냉정한 사람인 조모로 나오고 있다. 냉혈함으로 갑옷을 두른 듯한 이 인물은 끊임없이 네 명의 아이들과 적대감을 형성해간다. 소설은 남편이 죽고 생활이 곤고해진 까닭에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어머니가, 시간이 갈수록 조모의 모습을 닮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닮아가거나 배워가는게 아니라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그녀의 진짜 모습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니 태생부터 조부모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믿고 따랐던 자신의 네 명의 아이들을 희생시키게 된다.

 

소설은 갇힌 존재인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작은 아이들의 시선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거짓과 모순 그 자체였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간 심리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기심과 비열한 열망과 같은 인간의 어두운 이면이 가져오는 이중성을 어머니와 조모를 통해 비판한다. 이를테면 보편적이거나 통상적인 생각의 틀을 비틀어버린 채 등장하는 어머니의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작품에서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을 독자는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방에 들어갔던 아이들은 네 명이었으나, 다시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들은 세 명뿐이었다. 왜 그들은 조금 더 빨리 닫힌 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을까.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아이들을 그곳에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자 했던 어머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달 5월에... 그것도 어린이날이 낀 연휴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어야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희생이 먼저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동창생이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 앞에는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내 말에, 그는 희생이 따르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이십여 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사랑이란 이름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감사의 이름과 기쁨의 이름이, 슬픔의 이름과 함께 누군가를 책임지도록 만들어가는 그 희생의 이름이 또 깨달음과 성찰의 이름까지 모두 담겨진 것은 아닌가.

그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든 성장한다. 그래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인간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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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비밀 집공부
손지숙 지음 / 봄풀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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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비밀. 집공부

-소통과 이해를 위한 든든한 지혜

 

곰 같은 덩치에 새끼 강아지 같은 성격을 지닌 아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비버 같이 귀여운 체격에 호랑이 같이 으르렁거리는 성격의 딸도 있다. 아이들은 모두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생긴 변화는 아이들 보다 엄마에게 먼저 생겼다. 엄마는 사실 시작부터 겁이 났다. 초등학교와는 다른 중학교 생활에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을까? 무언가를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불안과 걱정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5월이 시작됐으니 아이들도 신학기에 익숙해진 시기인데,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로지 엄마라는 생각이 드는 생각은 비루한 자괴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씁쓸한 것이다. 학교는 아이가 다니고 있는데 왜 이러한 잡다한 생각과 고민을 엄마가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모순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란 말이다. 그 때 만난 책이 저자 손지숙의 집공부에 관한 책이었다.

 

책은 공부 즉 학업적인 부분과 학업 이외에 학교생활 전반에 관한 가이드 라인을 잘 잡아주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총괄적인 가이드 라인을 잡아주는 책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나와 있는 책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책은 기타 비슷한 부류의 책들과는 다른 메리트를 발산한다.

먼저 전문성과 함께 진정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교육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꺼내놓은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거의 다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식상하다, 라는 느낌으로 책을 내려놓은 경험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이고, 또한 전문성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비슷한 느낌, 식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볼 때 나는 감히 그 까닭을 깊이감 있는 진정성의 유무에 있다고 말하려 한다.

 

물론 진정성이란 어찌보면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에서부터 출발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개인의 일방적인 주관적 요소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 진정성이란 감성이 어느 순간, 혹은 어느 지점에서 대중을 향해 커다란 울림과 반향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저자 손지숙의 경력을 살펴보면 1983년부터 2012년까지 교사로 재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랜시간동안 학교와 학생 학부모를 위해 강사, 컬럼니스트와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왔고 저자의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학교에서 경험했던 사례를 들어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교사였기에 자연스럽게 만들어갈 수 있었던 아이들과의 교류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또한 교사인 동시에 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자신의 두 아이들 이야기도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는 부분도 함께 읽어볼만한 부분이다.

 

집공부는 무엇일까. 저자는 집공부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강요만 하는 학습 분위기가 아닌 부모가 동참하는 열린 분위기를 만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공부 습관은 집에서 그러니까 각 가정에서 만들어주는 것이지 학교에서 단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이 질문하면서 스스로 깨달아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줄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도록 격려하며 독려하는 분위기 안에서 ‘자기주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동시에 어른이 실수하기 쉬운 방목과 방관의 차이를 설명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책에서 ‘선생님 놀이’로 표현되는 복습활동은 이미 많은 학자와 비슷한 부류의 책들에서 거론된바 있지만 다시 강조해도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기에 책을 읽는 독자들이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집공부가 특별히 어떤 공부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혹여나 어떤 비밀스런 방법을 찾고자했다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또 하나의 집공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복습, 과제, 예습의 습관화를 이야기하면서 집공부의 비법은 지속성 즉 반복이 필수요소로 작용하는 개인의 꾸준함이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책은 보통의 학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과 고민들을 위한 가이드도 포함되어 있다. 예습과 선행의 정도라든지, 특목고 뿐만 아니라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 필요한 입시 관련된 정보도 알차게 싣고 있으며 비교과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함께 싣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부모에게 내 아이와 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믿어줄 것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 홈페이지를 잘 활용하며 학교와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한다. 책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참고할만한 정보도 유용하게 실려있다. ‘내 자녀 바로 알기’ 서비스라든지, 각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수행평가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팁을 싣기도 했다.

 

딱딱하지 않고 전문성에서 나오는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닌 책이어서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선생님인 동시에 상담사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보통의 엄마이고, 또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책은 따뜻한 진정성과 함께, 저자 손지숙만의 오랜 경험에서 전해지는 전문성까지 더해져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이자 메리트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중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서로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꽤 괜찮은 책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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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 제4막 - 이병주 뉴욕 소설
이병주 지음, 이병주기념사업회 엮음 / 바이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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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제 4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답다.

 

-너무나 불쌍한 여자가 또 하나 너무나 불쌍한 여자를 보고, 아아 이 불상한 것이라고 울먹일 때, 역시 너무나 불쌍한 이 사나이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싶어서였다.-238

 

소설은 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동시에 슬퍼하면서 다시 기뻐하고, 늙어가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하는 인간의 대 서사시가 바로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설이나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완벽하리만큼 인간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인간세상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 이병주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내가 처음 그를 알았을 때는 학생시절이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작가 이병주. 놀라운 것은 느낌이란 것이다. 기억과는 또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느낌.

이병주라는 이름 앞에서 순간 많은 것들이 멈춰버린 것에 대한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내용도 솔직히 눈곱만큼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 묘한 감정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만난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생각하는 중이다.

 

이제 소설 이야기를 해보자.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다. 신상일이라는 남자는 한국에서 사기를 당하고 그 여파로 처자식과 사별을 하고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을 나락 끝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을 쫒아 미국행을 선택한다. 일단 그의 선택은 무심했다. 복수 그리고 죽음.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 가진 것 없이 무작정 복수만을 위해 멀리 타국까지 왔으나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순간에 그는 검은 천사 헬렌을 만나게 된다. 밤마다 남자를 만나 몸을 팔아 돈을 벌어오는 검은 천사는, 남자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도 또 한명의 여인은 냉시 성이 등장한다.

세 명의 인물은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각자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지니고 아파하던 그들은 서로 위로자 혹은 소울 메이트가 되어 서로의 곁을 지켜주게 된다.

 

사람에게서부터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상처받은 인간은 또다른 인간으로부터 상처를 극복하고자하는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여기 한 남자와 두 명의 여인의 삶을 보면서 그 말을 상기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강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허드슨 강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강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려본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허드슨 강과 정신적 교류를 통해 스스로의 의지를 다잡으며 시련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작품에서 허드슨 강은 단순히 배경을 차지하는 요소가 아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는 작가 이병주의 계획된 의도 중 하나다.

작가는 인물들이 강을 통해 자아를 깨닫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허드슨강의 이미지는 희망이자 사랑, 역경에 반하는 극복에 대한 멘토와 같은 존재가치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눈으로 따라가노라면 한 가지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있는 힘껏 꽉 움켜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혹은 미련 없이 흘러보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어봐야 하는 의무감. 누구나 한번쯤은 이 낯설고 어설프면서도 당혹스러운 질문 앞에 서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나이, 혹은 국적, 성별, 인종을 떠나서 모두 동일하다. 여기에서 동일하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서 동일하다는 말이다. 각자의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 마지막을 향해 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것 또한 동일하다. 예술가로서의 삶이든, 홈리스의 삶이든, 부유한 삶이든, 가난한 삶이든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의 감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딴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장소는 눈에 보이는 번쩍거리는 불빛이나 화려한 색채만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채울 수 없는 그들만의 색채가 담긴 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인생의 4막처럼 말이다.

 

작품은 스토리가 명확하고 전개가 빠르다. 이미지나 감성 중심으로 혹은 어떤 사건만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 아니라 탄탄한 구성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스토리 전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읽는데 속도감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지막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종희의 글은 왜 이 시대에 다시 이병주를 논해야하는가에 대한 논지를 싣고 있다. 설사 김종희의 지적처럼 그러한 문제 때문에 잊고 있었던 작가를 소환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고백하건데 개인적으로 작가 이병주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것까지.

딱 거기까지 책에 대한 소심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야할 듯하다.

 

-허드슨이여! 그 모든 것을 긍정하는가, 뉴욕을 긍정하는가.

긍정한다. 그 선(善)도 그 악(惡)도, 마천루도, 시궁창도 모두 긍정한다. 록펠러센터도 긍정하고, 윌스트리트도 긍정하고, 그리니치빌리지도 긍정한다. 왜냐? 인생은 백 년을 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 속에 못할 짓이 무엇이 있겠는가. 부정할 여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수천 년을 이렇게 흐르고 있다가 보니 드디어 허망을 알게 되었다.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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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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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영원함과 유연함의 미래. 사피엔스

 

인간의 상상력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대한 이야기 역시 일정부분 남아있는 유물과 역사학자 혹은 과학자들이 꺼내놓은 신비스런 이야기에 많은 부분 의지한, 일종의 상상의 결과물이다, 라고 한다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식상한 멘트일까.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니다. 그 표현만으로는 책의 가치를 평가하기에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부족해보인다. 책은 인간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라고 정정해야 한다. 책은 인간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거치며 인류 사피엔스의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면서도 세심한 시선으로 꼼꼼하게 살펴내고 있다. 학문으로 나누어 볼 때도 그 분야와 내용은 방대하다. 따라서 책의 인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나는 쉽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책 사피엔스는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낸 거대한 백과사전이다, 라고 준비가 되어 있다.

 

아주 오래전 첫 인류가 탄생했다. 그들은 비슷한 종들의 생물학적 결합과정 혹은 그들만의 갈등과 같은 몇 가지 사유로 현 인간의 조상격인 사피엔스 한 종으로 정리가 되었다는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생각해보자. 내가 아니 나의 먼 과거의 조상인 어느 누군가가 네안데르탈인의 족속이 아닌 사피엔스의 족속으로 태어난 것은 행운일까. 아니면 불행인가.

그런데 사실은 인류를 딱 부러지게 분리해서 나눌 수 없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유전자에서 사피엔스 이외의 다른 종의 유전자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저자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몇 년 전인가 나는 어느 인류학자의 실험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피부색과 유전자 혹은 사는 지역에 따라 갈리고 있는 인종들을 모아서, 먼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조사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계 조상이 있는 흑인남성, 남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여성, 전형적인 영국계 혈통과 독일계 혈통으로 자신의 조상을 알고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시작은 그랬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가 다르다고 인식하는 조건은 그들의 조상, 살았던 지역, 자신의 피에 흐르는 혈통과 같은 것으로 서로를 다른 인종이라 구분지었던 것을 동영상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 이 결과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매우 당황해했으며 때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는지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이 책 유발 하바리의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게 되리라 확신한다.

실험자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그들은 지금 현재 그들이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했다. 전형적인 백인여성의 유전자 계보를 살펴보면 그 가운데 흑인의 유전자가 들어있었음은 물론이고, 때로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결과를 볼 때 어느정도 유측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먼 옛날 인류 사피엔스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지역에 정책해 살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혈통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아시아 쪽에서 세력을 형성한 세력인 호모 에력투스와의 소규모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이는 것이다. 결국 인류가 단일한 종, 혹은 단일한 혈통으로 번성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흥미로운 일이다. 인종과 인종의 조화 내지는 그 반대의 상황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사피엔스가 전형적인 인종 사피엔스로 생존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진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저자 유발 하라리의 생각처럼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사피엔스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다른 종이 생겨나고 사피엔스의 지혜와 진화가 아니었더라도 그 빈자리는 다른 어느 종에 의해 채워져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인류의 조상은 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생존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다른 종들)가운데 유독 사피엔스가 다른 종에 비해 지혜로왔으며, 때로 그들만의 유혈투쟁도 있었지만 때로는 지역을 광범이하게 넓혀가며 유혈충돌 없이 토착세력을 흡수하여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부터 인류를 뭐랄까 월등한 유전자의 유전법칙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에 의해 생존과 멸종이라는 두 가지 길을 가게 된 것이리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피엔스가 지역을 옮기며 살아가는 시기 어느 중간쯤에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계급이 발생하는 것을 두고 저자는 농업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 기점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한다. 한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신석기 혁명과 비교할만한 부분이다. 유랑생활을 접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조상은 주거지를 정하게 되고, 농사를 지으며 사유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그에 따라 이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생겨나고, 관리를 받는 이들이 생기게 되고, 그들은 나름의 규칙과 방식에 의해 조직을 꾸려나가게 된다. 농업혁명은 식량면에서 많은 이득을 인류에게 안겨다 주고 있지만, 이를 통해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기에 비해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 부분에서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집도 지어야 하고, 가축도 길러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는 등 나라는 인간 한 사람이 해야 할 일도 많아지고 챙겨야 할 일도 많았으며 걱정거리가 늘어났을 거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어느어느 혁명이라 하며 일컫는 거대 전환점이 인간에게 비단 긍정적인 요소로만 작용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된바 있듯이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혁명은 농업혁명을 시작으로 인지혁명과 과학혁명까지 이어진다. 각 혁명에 대한 이야기 안에는 농업혁명을 거치며 조직이 거대해지고 마을과 국가의 개념이 생겨나며 세계의 개념이 생겨나는 과정과 그들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책은 비단 역사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류문화학적인 관점, 세계사, 경제학, 종교학, 철학 그리고 과학분야까지 광범위한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국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처음 지구상에 출현한 시점에서부터 각각의 대변동이었던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적응해가는지, 어떤 것을 추구해가며 살아가기를 원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 속에는 다양한 인류의 모습 중 종교, 학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많은 종교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제국주의에 의해 처참히 사라진 독특한 문화(아스텍, 잉카문화)의 이야기를 통해 번영과 변화라는 거창한 허울에 가려진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과 그로 인한 상처의 현장을 고발하기도 하고, 비난한다.

 

이 가운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예를들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이념들이 우리가 말하는 과학혁명과 어떻게든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실패한 주의(공산주의)도 있고,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는 주의(자본주의)도 있다. 제국주의라는 표현은 이미 쓰지 않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는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기도 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정치과 경제 그리고 자본의 힘과 같은 복잡한 관계가 한 무리의 인류가 다른 한 무리의 인류를 멸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 데 명분을 세워주고 있다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인 동시에 과학혁명의 가려진 그림자의 일면이다.

 

사피엔스를 쓴 저자 유발 하라리 그는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썼을까. 그 의문은 뒷부분에서 그가 쓴 글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인류의 행복. 사피엔스의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인류가 어느정도 자발적인 혁명을 통해서도 발전해왔겠지만, 보통의 인류는 시간이 흘러가는 그대로, 어쩌면 문화의 흐름에 의해 과학의 진보에 의해 자연적으로 살아왔던 시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왜? 라는 질문과 함께 무엇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저자는 행복이라는 단어로 이 방대한 이야기의 최고점을 찍으려 한다. 마지막 장에 다시 등장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 관련 이야기 역시 어찌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심내지는 자기만족 즉 각자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려하는 노력들이라는 것을 볼 때 결국 인간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며 환경을 바꾸고 미래지향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 역시 삶의 만족, 즉 행복을 마지막 정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만족감과 행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 역시 여러 페이지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기타 종교에 비해 불교에 대한 저자의 식견이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한권의 책에 가득 실린 저자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는 당당하며 논리적이었던 반면 유독 불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조심스러워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세계의 종교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도 그랬었고 마지막 장에서 사피엔스의 삶의 의미, 진정한 삶에 대한 생각을 피력할 때 역시 다른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호흡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각설하고 나는 그의 걱정과 염려를 과감하게 차치하고자 한다. 이것은 당면한 과제를 두고 외면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사피엔스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 정도라고 해두자. 저자가 걱정하는 인류 스스로의 패망에 대한 우려가 비록 현실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하더라고

저자가 말했듯이 인류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또다른 것에 대한 갈망과 해결책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으로 믿는다.

 

상상력 역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긍정의 상상이 있고, 부정의 상상이 있는 법이다. 설사 지금 보이는 것이 부정적이다 하더라도 단정은 하지 말자. 사피엔스가 현 인류로 살아가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종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여전히 행복하게 살았다, 로 편집을 바꿔 마무리를 짓고 싶은 것이 일개 독자의 욕심이다. 그리고 진정 그렇게 아니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인간, 유연한 인간 사피엔스의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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