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 풀꽃 시인 나태주 등단 50주년 기념 산문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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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나태주 시인의 산문이다.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차분함이 고스란히 전달이 된다.

몇몇 작가들의 에세이나(수필) 일기를 본 적이 있지만, 사실 거의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에세이를 한동안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였는지. 요즘 에세이가 나와 잘 맞지 않아서 그런지 그나마 최근에 읽은 이야기 중에서는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가 제일 정감이 가는 듯하다.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내 옛날 생각이 났다. 시인처럼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조용히 끄적이는 일을 멈추지는 않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책을 낸다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내놓을 책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하여 책임감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늘 자기검열이 가장 두려웠던 것을 기억한다. 내게 겉멋만 들었다고, 본의 아니게 의지를 꺾어놓으려던 남편은, 살림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만능 아내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유가 필요한 일은 아닌 듯하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 일이니까. 막중한 책임감에 대한 무게감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내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이제는 새침해질 필요도, 속상해할 필요도, 우울해할 필요도,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청이 있었으며, 문학소녀와 소년이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저 동시대 혹은 전시대를 살아가고 살아냈던 이들의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 싶을 뿐이다. 이제는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은 교직생활을 하는 동시에 시를 써왔다고 했다. 그의 글들을 바라보면 따뜻한 봄볕 같은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욕심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어가는 그런 평범함 속에서 살아나는 속 깊은 이야기들이 가슴을 덥힌다. 병원생활 이야기며, 어릴 적 추억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예순 가까이 살아오면서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시 그려내는 것만 같다.

둘러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새삼스레 이름을 붙여 명명하고, 다시 새롭게 이해하며,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종교적인 의미의 순종과 함께 삶에 대한 겸손의 의미로 다가오는 순종의 가치가 시인의 글 안에 촉촉하게 배어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조적 시선의 여유로움이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을 때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장이나 생각할 거리가 있는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늘 연필을 사용한다. 더불어 책 귀퉁이를 살짝 접는다거나, 혹은 정말 좋았던 부분은 색색들이 작은 포스트잇을 붙이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시인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내게 더 가까이 부드럽게 와 닿았던 부분은 첫 시집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쌀 한가마니에 만원 하던 어렵고 고단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교원 월급이 넉넉지 않아 주위에서 빌리기까지 해가며 시인이 첫 시집을 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시집을 읽고 해주신 이야기를 시인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시집을 읽어보신 뒤, 반짇고리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태주야, 내가 네 시집을 첫 번째로 사주마.”

 

시집 뒷면에 정가로 찍힌 700원.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 돈이 얼마나 내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돈이었던가!- p241

 

문득 어느 날 언젠가에. 내 아이들이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가지고 왔을 때 나 역시 시인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시인은 말한다. 늘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라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한결같이 부드러울 수 있을까마는, 이렇게 혹은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어제를,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다보면 깨닫는 것도 있기 마련이 아닌가. 젊은 청춘들에게는 청춘의 시련이 있기 마련이고 중년에는 또 그 나름의 시련이 있으며 노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 것도 같더란 말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가을이 언제부턴가 을씨년스러워 조금씩 싫어지더니 이제는 나도 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p179)고, 고백하는 시인의 말에 ‘저도 그래요’ 라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11월이다. 겨울이 성급하게 후드둑 얼굴 바로 앞까지 달려드는 걸 느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훨씬 전부터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두터운 옷가지를 입고 나가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서 혼자 도드라지지 않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동안 잠잠하던 기침이 다시 시작된 지 다섯달 째 접어들었다. 반복되는 기관지염이 천식으로 가는 이유는 계절 탓도 있을 것 같다. 기관지 확장제와 천식 스프레이 그리고 몇 가지 약들이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인이 말하기를 ‘언제든 봄은 거저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무언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봄은 왔다’고 하더니만(p179) 내게도 봄은 거져 오지 않으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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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0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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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혁명 그리고 가족-

 

지난번 읽었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이후 두 번째 접하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이다

생각해보니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보다 이번 작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더 많이 들어왔던 것도 같다. 그런데 왜 읽어보려 하지 않고 책장에만 꽂아두었을까. 어쩌면 한두 페이지를 읽어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장에 꽂아두고서 애틋하게 들추어보지 않는 많은 책들에게 일일이 변명을 붙여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흔하게 역자타령을 늘어놓고 있을 게 뻔했을 법하다. 이다지도 게으른 내게 축역본 ‘아버지와 아들’이 찾아왔다.

일반적으로는 축역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보통의 축역본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나 허전함 같은 느낌없이 몰입해서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지난번 사냥꾼의 수기에서 경험했던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어쩐지 이번 축역본 시리즈에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서두는 그렇다는 말이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무겁지 않게 가볍게 풀어가보자.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야 할까,를 고민했었다. 실은 심각하게 혹은 너무 진지모드로 가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중이다.

우선 살짝 줄거리를 소개하면 니힐리즘을 추종하는 젊은 두 사내. 두 집안의 아들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부모, 숙부 등 가족이 등장하고 몇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가족소설인가하면 비슷하면서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연애소설인가? 라고 다시 묻는다고해도 이번에도 아니다, 라는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격변기였던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축역본 전집을 끌어오고 있는 진형준 교수의 해설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농노해방을 시행하기 전 후의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당대 러시아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 즉 지주 혹은 귀족사회(혹은 집단)와 농노(노예 집단)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귀족과 농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갈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즉 기밀하고 친근하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특수적인 가족이라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조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내부적 갈등을 다루면서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이해를 담아내는 이타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갈등을 조작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혼돈을 일으키는 듯하지만, 작품에서 무엇보다 전제적으로 깔려져 있는 감정은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가장 숭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애이며 사랑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감정을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한정 짓기보다는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애틋하면서도 헌신적인 사랑에 주목해보고 싶다.

 

‘니힐리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젊은 세대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념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내 ‘바자로프’.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친구 ‘아르카디’. 두 젊은이는 서로의 집에 머물면서 이를테면 이상과 현실이 가져오는 괴리감에 대해 끊임없이 언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묘하게도 작가 투르게네프는 두 인물을 각자가 상징하는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는 충분히 작가의 의도된 결과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치한 감정놀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도 그 스스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바자로프는 실패한 니힐리스트인가? 바자로프를 스승으로 삼아 추종해왔으나 결국 카차라는 여인에게 청혼을 하게 되면서 바자로프와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는 인물 아르카디 역시 실패한 니힐리스트였던 것일까?

 

사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패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군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의 무덤 앞을 쓸쓸히 오고가는 늙은 부모조차도 말이다.

굳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자식들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비굴한 속내를 꺼내 개인이 만들어내는 어떤 타당성으로 묶으려하지 않아도 딴은 괜찮다 괜찮다. 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차피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이해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공평한 까닭은 인간을 유한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해석은 개인의 몫이다.

딴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살펴볼 때 의외로 인간적이고 평범한 삶을 쫒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연인들의 사랑, 늙은 부모가 지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 형제간의 충정과 신뢰로 그려지는)보통의 모습들이 그 어떤 개혁의 급변하는 사상보다 더 값치가 있으며 더더욱 소중하다는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하나의 생각을 갖게 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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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 박민형 소설집
박민형 지음 / 경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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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작가 박민형은 1996년부터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고 한다. 책날개에 소개된 그의 이력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어쩌면 그가 비단 소설 창작뿐만 아니라 희곡과 드라마, 악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문학성을 포함해 작가로서의 작품성과 그 안에 존재하는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 부분을 알아가는 과정도 독자에게는 중요한 순간으로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작품집 안에는 모두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렸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오래전 창작한 작품도 수정하지 않았다, 라는 고백을 한다. 처음 가졌던 신념 내지는 처음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뜨거운 그 어떤 것. 뭐라고 할까. 아마도 쓰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열정을 다시한번 스스로 느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작품은 90년대부터 2000년대의 모습을 담아낸다. 마지막 작품 ‘별똥별’의 소재가 2014년 세월호 사건임을 기억하면, 박민형의 이야기는 근 이십여년 동안 시간이라는 이름 안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적이고 낡은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자면 이런 류의 소설을 정의할 때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배웠던 것 같다. 사실 최근 2000년대 이후의 소설류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까닭에 아는 게 별로 없지만, 대략의 흐름이란 것이 장르의 다양화 즉 인터넷 소설의 유형에서 오는 소설 장르의 파괴? 등과 같은 빠른 변화가 있어왔음은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 기준을 2000년대로 삼아서 유감이다. 왜 하필이면 딱 그 즈음인가. 여하간 그 애매모호한 기준의 언저리부터 따져보았을 때, 나는 최근 출간되는 소설보다는 예전에 출간된 소설의 작품성을 더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마져도 꼰대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민형의 작품집은 90년대와 2000년대를 걸쳐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와 표현에서 작품성과 동시에 시대성을 적절하게 담고 있다는 사견을 말해두고 싶다.

 

사실 현실비판과 사회문제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문학장르에서 각각의 작품이 어느정도의 깊이감으로 들어가 곳곳에 잠식되어 있었던 가려운 부분내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문제들을 얼마나 잘 건드려줄 수 있는가, 라는 판단은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 부분이 작가의 역량이라는 생각은 예전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딴은 그렇다. 너무 깊이 들어가다보며 현실 비판을 넘어, 현실 문제에 침수되어 허우적거리는 블안한 작품을 접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쨌든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고 인식도 표현도 그리고 유행도 돌고 돈다고는 하지만 변하기는 하더라.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나름 수정을 해야하지 않을까. 더 이상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책을 분석하다보면 진정한 꼰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 않을는지 슬몃 걱정이 되곤 한다.

소설이란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가장 보편적인 장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희노애락. 모든 복잡하고 부조리한 사회적 모순과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나약하고 소심한 인간존재가 어떻게 버텨나가는지. 인물을 통해 어떠한 성찰과 깨달음과 나름의 변화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박민형의 소설집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부조리함 앞에서 갈등하는(서 있는 사람들) 혹은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가는 인간(황달수 연구 주임)의 모습, 고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화해, 성주 가는 길, 젓가락 등등) 상처받은 이웃과 그 곁을 지켜내는 또 다른 상처받은 보통의 존재인 ‘나’(참을 수 없는 웃음, 금색 종)와의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정치적 이슈,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야기를 소재(뒤꿈치 들기, 별똥별)로 삼은 글들도 등장한다. 작가만이 지니는 예리한 시선에 의한 작가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부분을 작가적 시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각설하고 안정감 있는 이야기. 중단편 위주의 글들이지만 비교적 탄탄한 구조와 감각 있는 대화, 희곡의 느낌이 나는 구성과 같이 책은 재미와 함께 깊이 있게 생각할 거리를 부족하지 않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 갖는 문학적 또는 사회적 역할을 맛깔스럽게 해내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둔다.

 

서평을 쓸 때 그저 솔직하게 써야겠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토로하듯이 역시나 좋은 서평에 대한 기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곤 한다.

어찌어찌 쓰다보면 이게 서평인지, 독후 감상인지, 어쭙지도 않은 비평인지 나 역시 뒤죽박죽 곤죽이 되어버리는 글을 보면서 이게 개인의 한계라면 한계인 것이라, 라며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선택을 하든지 한사람 또 한사람.. 그렇게 많은 다양한 생각을 하는 이들의 생각을 교류하고, 분석하고 비교하면서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우리 각자가 다시금 새롭게 배워간다는 사실이라는 점일 것이다.

 

일갈하고 말이 너무 많았다. 다음부터는 좀 줄여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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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작은 방 - 낯선 첫발을 내딛는 이들을 위한 쓸쓸한 안식의, 1인분의 방
노현지 지음 / 더블유미디어(Wmedia)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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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작은 방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렘과 더불어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다준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생각해보면 새로움의 그 순간이 있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어떤 순간도 마주하고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게 인생인데 말이다. 기실은 사람마다 성격과 성향이 다 같지 않으니 그 순간을 어떻게 지나쳐가는가도 사람마다 다 다른 색체와 향기를 풍기는 듯하다는 말이다.

    

 

상급학교로의 진학, 첫 직장, 부모로부터 처음으로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되는 순간도 그렇고, 첫 연애 감정이나 첫 실패와 좌절 등 모든 처음이라는 순간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때때로 우리를 당황하게도 하기도하고, 혹은 더 단단하고 강하게, 때론 유연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극제 역할을 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여기 ‘연남동 작은방’ 이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있다. ‘낯선 첫발을 내딛는 이들을 위한 쓸쓸한 안식의, 1인분의 방’이라는 부제가 작은 글씨로 덧붙여져 있다. 연남동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얼마 전까지 방송에서 자주 언급되던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책이 말하는 연남동은 방송에서 알려주는 그 연남동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저자 노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들어가면서 홍대 근처에 자취방을 얻게 되는데, 홍대를 마주보고 있는 조용한 동네였던 당시 연남동에 집을 얻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가 집을 얻게 되었던 당시의 연남동은 계발이 아직 되지 않아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였기에, 밤이 되면 혼자 걷기에도 좀 겁이 날 정도로 어둡고 조용한 곳이었다고 고백한다. 원룸 스타일의 이 작은 방에서 그녀는 학생시절 기숙사의 단체생활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생경스러운 감정에 자주 빠져드는 자신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멀리 부산에 떨어져있는 부모와 언니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향수병에 젖어들 때도 있었다. 장염에 걸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했다가 다시 병원에 가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 업무상의 스트레스로 인해 길고 긴 불면증에 걸려 몇 개월을 고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정신과에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기도 하며, 수면유도에 대한 의술의 힘(수면다원검사)을 빌리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자는 불면이 육체적인 문제보다는 심리적 문제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집착이라는 감정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책은 타인의 존재감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혼자만의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외로움과 허전함, 두려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진지하게 경험하는 주인공인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사실 저자 노현지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가 이러한 많은 감정들로 인해 현실적으로 어려움과 고충을 자주 하소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에 적절히 녹아들어 나름대로 잘 견디며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연남동 작은방 스토리의 마지막은 어떻게 흘러갈까. 스스로의 분투와 인내의 과정에서 그녀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4년 동안 함께 했던 연남동의 작은 방과의 이별을 선언하는 것으로 작은방 이야기의 종점을 찍는다. 훗날 딸과 함께 애틋하고 순수했던 과거와 조우하며,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마무리된다.

    

 

연남동 작은방은 여느 에세이보다 조금은 더 개인적인 고백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혼자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일기처럼 보인다. 감정의 솔직함을 무기로 거친 세상 밖으로 조심스럽지만 가볍지 않은 출사표를 던지는 그녀만의 편안한 글들이 읽는 이에게 조용하게 와 닿는 걸 느낀다. 저자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글쓰기에 대한 갈망이 뜨거웠노라고 고백한다. 딴은 책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는 이들에게 ‘당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라는 긍정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듯도 하다.

    

 

최근에는 1인 미디어 시대라는 말이 유행을 한다. 이 보다 앞서서 유행했던 문구는 1인 출판 시대가 아니었던가. 누구나 생각이 있으면 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던 시대는 이미 몇 년 전에 시작되어 지금도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흐름이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이번 ‘연남동 작은방’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이해하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 혹은 문학이 스스로 높게 올려놓고 있는 형식과 기준으로 어떤 하나의 단단한 바리게이트의 빗장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개방의 시선으로 모든 글로 만들어진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방향의 전환이, 앞으로도 계속 꾸준하게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해가는 전문성의 기준에 대한 변화와 다양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 어떻게 수용하는 게 옳은 일인가에 대한 소심한 생각도 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작은 카페와 맛 집이 많이 생겼다는 연남동. 시대의 흐름을 따라 한번은 다녀와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애틋함과 향수가 짙게 배어있을 법한 그 골목 어딘가를 또 다른 누군가는 호기심과 설렘으로 다녀갈지도 모를 연남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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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잊은 당신에게 - 90세 현직 정신과 의사의 인생 상담
나카무라 쓰네코 지음, 오쿠다 히로미 정리, 정미애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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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잊은 당신에게

 

좋은 의사란 어떤 의사일까. 남들보다 병원 출입이 잦은 나도 사실 내과의사 이외에 정신과 의사는 낯선 분야의 어색한 만남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래전 언젠가 아이 상담 문제로 말 그대로 상담을 몇 번 받으러 다닌 적도 있긴하지만, 사실 진료라는 의미가 대화위주여서 상담이라고 해서 딱히 특별난 게 없었던 기억이 있다. 어쩐지 비교적 신뢰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에 그는 내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고, 나는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건넸던 것 같다.

다른 병원 분위기처럼 책상이 있고 둥근 의자가 있거나 혹은 간의 침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키 낮은 탁자를 가운에 놓고 푹신한 소파와 안락의자가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만났던 의사가 책속에 등장하는 여의사 쓰네코 선생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살면서 의사가 아닌 인간 본연의 사람으로서 의사를 만나고 싶은 순간은 정말 많은 것 같다. 지금도 아니 오늘도 병원에 다녀오면서 다시금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의사란 어떤 사람들이 직업군을 삼아 종사하는 일일까. 삼분.. 혹은 오분 간격으로 새로운 환자들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올 때 마다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언가 의무감에 젖어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마치 뭐랄까. 엉뚱하게도 나는 오늘 내 주치의를 보면서 신 내림을 받고 손님을 받는 어느 닳고 닳은 경험 많은 무속인을 떠올렸었다. 조금 미안한가. 아니다. 쓰네코 선생의 이야기처럼 무슨 일이든 깊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혼자 속을 끓인다고해서 상대가 바뀌는 건 아니니 말이다.

 

쓰네코 선생은 일본이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남자의사들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던 순간에 우연치 않게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책에서 그녀는 스스로 간절하게 원해서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지 않은 나이인 여든이 넘어서까지 이어져오는 그녀의 진실하고 담백한 의료행위는 어떤 뚜렷한 목적을 달성해야한다는 것보다 환자들과 함께 삶을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책에서 그녀는 의사인 동시에 여성이었고 그런 까닭에 딸이었으며, 아내였고,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고충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더 큰 울타리 안에서 보면 인생을 먼저 살아낸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배로서의 다정한 충언과 위로가 가득한 책처럼 보이는 이 책은, 의사인 동시에 이웃에 사는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잔잔한 마음의 토닥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존중받고 싶다면 상대를 존중하라’는 쓰네코 선생의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그게 잘 통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선생의 마인드는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다. 그것이 그녀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일까. 쓰네코 그녀는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서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또한 막지 않으며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이어가는 인간관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하고 거리를 두라고 충고한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딴은 숭고한 자기희생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쓰네코 선생이 말하는 체념의 이미지는 그 조차도 긍정적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각설하고 그녀는 이러한 긍정의 자기체면과 같은 마인드를 ‘무난한 대응’이라고 표현한다.

 

무엇보다 고독사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를 대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고독사는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삶의 마무리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속 좁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아마도 쓰네코 선생님 잔소리 같은 말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아직도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군요. 그저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이세요...라고 말이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사이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불편한 관계일 수도 있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라는 점은 이해해주도록 해주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마주하고 싶어지는 욕심을 오늘 내 주치의는 알까 모르겠다. 괜시리 사설이 길다.

 

책은 어렵지 않게 빨리 잘 읽힌다. 보통의 삶의 지침서는 이미 많이 나왔지만,

주체가 의사여서 그리고 나이 지긋한 여성이기에 이 책은 또다른 시점과 관점으로 인생과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무겁지 않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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