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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 풀꽃 시인 나태주 등단 50주년 기념 산문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0월
평점 :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나태주 시인의 산문이다.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차분함이 고스란히 전달이 된다.
몇몇 작가들의 에세이나(수필) 일기를 본 적이 있지만, 사실 거의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에세이를 한동안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였는지. 요즘 에세이가 나와 잘 맞지 않아서 그런지 그나마 최근에 읽은 이야기 중에서는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가 제일 정감이 가는 듯하다.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내 옛날 생각이 났다. 시인처럼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조용히 끄적이는 일을 멈추지는 않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책을 낸다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내놓을 책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하여 책임감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늘 자기검열이 가장 두려웠던 것을 기억한다. 내게 겉멋만 들었다고, 본의 아니게 의지를 꺾어놓으려던 남편은, 살림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만능 아내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유가 필요한 일은 아닌 듯하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 일이니까. 막중한 책임감에 대한 무게감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내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이제는 새침해질 필요도, 속상해할 필요도, 우울해할 필요도,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청이 있었으며, 문학소녀와 소년이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저 동시대 혹은 전시대를 살아가고 살아냈던 이들의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 싶을 뿐이다. 이제는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은 교직생활을 하는 동시에 시를 써왔다고 했다. 그의 글들을 바라보면 따뜻한 봄볕 같은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욕심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어가는 그런 평범함 속에서 살아나는 속 깊은 이야기들이 가슴을 덥힌다. 병원생활 이야기며, 어릴 적 추억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예순 가까이 살아오면서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시 그려내는 것만 같다.
둘러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새삼스레 이름을 붙여 명명하고, 다시 새롭게 이해하며,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종교적인 의미의 순종과 함께 삶에 대한 겸손의 의미로 다가오는 순종의 가치가 시인의 글 안에 촉촉하게 배어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조적 시선의 여유로움이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을 때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장이나 생각할 거리가 있는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늘 연필을 사용한다. 더불어 책 귀퉁이를 살짝 접는다거나, 혹은 정말 좋았던 부분은 색색들이 작은 포스트잇을 붙이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시인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내게 더 가까이 부드럽게 와 닿았던 부분은 첫 시집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쌀 한가마니에 만원 하던 어렵고 고단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교원 월급이 넉넉지 않아 주위에서 빌리기까지 해가며 시인이 첫 시집을 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시집을 읽고 해주신 이야기를 시인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시집을 읽어보신 뒤, 반짇고리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태주야, 내가 네 시집을 첫 번째로 사주마.”
시집 뒷면에 정가로 찍힌 700원.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 돈이 얼마나 내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돈이었던가!- p241
문득 어느 날 언젠가에. 내 아이들이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가지고 왔을 때 나 역시 시인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시인은 말한다. 늘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라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한결같이 부드러울 수 있을까마는, 이렇게 혹은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어제를,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다보면 깨닫는 것도 있기 마련이 아닌가. 젊은 청춘들에게는 청춘의 시련이 있기 마련이고 중년에는 또 그 나름의 시련이 있으며 노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 것도 같더란 말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가을이 언제부턴가 을씨년스러워 조금씩 싫어지더니 이제는 나도 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p179)고, 고백하는 시인의 말에 ‘저도 그래요’ 라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11월이다. 겨울이 성급하게 후드둑 얼굴 바로 앞까지 달려드는 걸 느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훨씬 전부터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두터운 옷가지를 입고 나가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서 혼자 도드라지지 않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동안 잠잠하던 기침이 다시 시작된 지 다섯달 째 접어들었다. 반복되는 기관지염이 천식으로 가는 이유는 계절 탓도 있을 것 같다. 기관지 확장제와 천식 스프레이 그리고 몇 가지 약들이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인이 말하기를 ‘언제든 봄은 거저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무언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봄은 왔다’고 하더니만(p179) 내게도 봄은 거져 오지 않으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