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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평점 :
봉순이 언니
- 소박한 아름다움. 인간애
신산스러운 삶이다. 옅은 곰보자국의 얼굴에 두터운 입술이 도드라진 모양새에 웃으면 붉은 잇몸이 활짝 드러나는 열 댓살 안팎의 언니, 열 아홉 스무살의 언니, 그리고 늙고 초췌해버린 어느 기억속의 언니. 이 봉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언니의 삶은 어쩌면 이다지도 신산스러운가. 아주 오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한 세대가 다 지나간 이야기같기도 하다. 멀리 시간의 이면에서 겨우 불러내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소설 속 등장하는 화자는 어린 소녀다. 그녀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어린시절의 회상의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첫사람이었던 봉순이 언니와 조우하게 된다. 작가는 왜 첫사랑이 아닌 첫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봉순이라는 인물은 주인공 화자에게 있어 세상과의 연결통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분명 존재했으나 어린 화자를 살뜰하게 챙기고 먹이고 입혔던 인물은 어머니가 아닌 봉순이 언니였다. 그저 좋아하는 대상의 인물이 아닌, 믿음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공유해왔던 그들만의 비밀을 지켜냈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 작품이 작가 공지영의 대표작이라고 했던 까닭은 아마도 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인 어린소녀와 봉순이 언니 두 사람 사이에서의 교감을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작가는 집요할정도로 봉순이 언니의 삶에 대해, 그녀의 신산스러운 시간들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식모살이를 하는 봉순이 언니의 삶은 한순간 비루했고, 철저하게 무시당했으며, 비난받았으나, 딴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으며 그만큼 아름다웠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들은 각자가 알고 있었던 혹은 모르고 지나쳤을 어느 순간 어느 시절의 봉순이 언니와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책에 등장하는 어린소녀의 시선은 매우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영특하고 영악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그렇게 복잡 미묘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고 봐야한다. ‘봉순이 언니’에 등장하는 나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회상하는 과정 안에서 한 인물의 삶에 대한 조망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여기에서 나와 또다른 주인공 봉순이 언니의 관계는 양면성을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까이 하고 싶은 끈끈한 애정과 함께 멀어지고 싶어하는 이질적인 감정이 바로 그 두가지 양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인연을 뚝 끊을 수 있겠는가, 혼잣말로 수없이 질문을 했던 어린 소녀의 감성이 있었다면, 이 어린 소녀가 사춘기 여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감성의 바뀌어간다. 어른의 시각에서 각자의 생 안에서 서로에 대해 적당히 무감각해지는 것조차 묵인해간다는 것. 이러한 얼마간에 잊혀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화된 외면까지 더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당연하다며 인정하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이러한 과정을 받아들이는 일에 낯설어하며 어려워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관계와 인식의 문제야 말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난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 공지영의 작품에서 항상 주시하며 생각해봐야 할 요소가 바로 시대적 배경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그녀의 초기작들이 그러했듯 학생운동과 여성인권(여성해방과 페미니즘)관련한 작품들을 많이 써온 내력을 착안해서라도 그녀의 작품에서는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학생운동이 큰 물결을 이루던 내용과는 거리를 둔다. 시대적 정치적 흐름을 논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지난한 삶을 통해 바라보는 삶의 진정성과 인간 내면의 그윽한 울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그 시대를 살아내야했던 고단한 우리들의 많은 누이의 삶에 대해 진지한 담론을 이어갈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3기니 참고)
작가는 그녀 스스로의 유년 시절의 대한 회고록과 같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이 애써 내몰았던 기억속의 한 인물을 가까이 불러왔고, 책이 출간된 이후 실제로 봉순이 언니와의 만남이 있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딴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리고 여린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의문들에 대해 묻는다면 답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한편으로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면 아이의 시선에서 쓰여진 작품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답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현문우답이겠지만 말이다.
비슷한 구성의 소설로 작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1981년 초판)과 90년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가 은희경의 작품 ‘새의 선물’(1995년 초판)을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인용문장]
-아무튼 세상 사는 게 말이야.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아는 거지.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니까.p33
-나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봉순이 언니는 오래오래 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p44
-그러나 오기와 자존심을 가진 유교 집안의 장자. 그러나 또 한편 현실 속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 소설에서 남성의 역할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는 부분이 우세적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라는 표현만으로 작품에서 남성의 현실적 부제와 이유를...왜 일정부분 무능한 지식인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는지 ????)
-그때 깨달아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 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고 규칙은 결국 공정함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회피, 그러므로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을까....p81(현실은 이성과 같지 않다?)
→(인간의 감정을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으로 완벽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개인의 사고가 정하는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색한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다른 식구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p167
-언니가 돌아왔지만 나는 뭐랄까, 굵은 소금밭에 누워 있는 것처럼 온몸이 쓰리고 불편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한번 흐르고 나면 누구도 예전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예전으로 태연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p176
-사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별리가 필요한지를, 그것이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얼마나 만이 다른 생명을 절망으로 몰아가는지, 생사의 절박한 갈림길에 선 것들의 부르짓음을 외면하고 사는지, 설사 그것이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허술한 유리창이 떨리는 소리가 세상을 뒤엎듯 들렸다 해도- 난 정말 몰랐다는 말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용서가 될까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강아지가 죽고 나는 자라고 있었다.p234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