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스무 살 - 여자 나이 마흔 또는 오십에 찾아오는 자기발견에 대하여
에이미 노빌.트리샤 애쉬워스 지음, 정해영 옮김 / 도서출판 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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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스무 살

 

 

책은 중년이라는 말을 대신 할 수 있는 표현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기억나는 표현 중에서 제일 좋았던 표현은 ‘유치원 2.0버전’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표현이 같이 실렸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알아가며 경험해간다는 뜻에서 처음 교육이 시작되는 유치원이라는 어휘를 상징적으로 빌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년은 단순히 여성이 나이가 들어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 신체적 변화만을 그 한계점으로 두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탈피를 하듯, 그래서 더 큰 성체로 다시 태어나듯이 다시 태어나 성장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구상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목소리의 힘을 싣지 못하며 살아오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책인 듯싶다. 그러나 일반적인 페미니즘을 생각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 개개인마다 느끼는 부분이 다 다르겠지만, 그저 내게 있어 이번 책은 조금은 씩씩한 언니들이 전하는 앞으로의 시간을 위한 체계적인 충고처럼 다가온다.

 

혹시 책을 읽는 누군가가 이십대 청춘의 싱그러운 시기에 있다면 조금은 이른 시간을 미리 예측해본다는 의미에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지금 딱 마흔 중반대를 살아가고 있는 70년대 그 언저리.. 어느해쯤 태어난 이들에게 보다 더 가까이 보다 면밀하고 깊이 있게 다가서게 되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쓴 씩씩한 언니들은 챕터마다 책을 읽는 이들에게 퀴즈를 내곤 한다. 어찌보면 앙케이트 조사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의료관련 심리조사표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나열된 문항에 체크 표시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딱 마흔하고도 절반을 살아온 나는 아직 씩씩한 언니들이 제시하는 중년, 그러니까 두 번째 스무 살을 완벽하게 맞이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체크 문항이 그리 많지는 않아보이니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국적을 불문하고 삶의 중간지점 그 어디를 건너가고 있는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우리 모두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며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책은 두 번째 스무살에 가까이 살고 있는 이들에게 가족을 부양하고 챙기면서 주어진 한정된 역할에 낙담하고 좌절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생각을 바꾸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도 충고한다. 행복과 기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보며,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앞으로의 다가올 시간을 준비할 것을 이야기한다.

다들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가겠지만 여성이라면, 아내와 엄마 혹은 딸과 같은 다양한 입장과 그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호불호의 복잡한 감정에서 벗어난 어디쯤에 스스로의 정체성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가도 싶다. 그 순간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것일까. 남편과의 관계, 십대 아이들과의 관계, 늙어가는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동성간의 우정. 다양한 관계와 관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잊고 살았던 자신의 진실된 모습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책은 그 순간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도전할 것을, 드러나는 것에 작아지지 말고 내적으로 강해질 것을 말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기억할 것을 그리고 언제나 당당해질 것을 조언한다.

 

책 149 페이지에서 ‘나는 이럴 때 가장 예뻐 보인다’. 라는 제목아래 다양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예시문 중에 나는 세 가지를 선택했다. 하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할 때’ 두 번째는 ‘내 인생에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였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온정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대할 때’ 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는 이들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곱씹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아름다운가. 어여쁜가. 실은 그렇게 예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순간에 몰입하고 즐기는 내 자신이 좋다, 라는 것쯤이다.

 

씩씩한 언니들이 내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을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때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가?’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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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미사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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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책은 쌍둥이의 대한 이야기다. 나와 똑같이 닮은 또 다른 인격체의 존재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생물학적으로 복잡한 유전적 관계라든지 세포분할이후 세포와 세포가 결합하고 분열하는 과정을 따져보는 일은 골치가 아파오는 일이다. 다 차치하고서라도 여전히 쌍둥이의 존재감은 보통의 하나의 단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며칠전 시내에 나갔다가 서너살 쯤 되어 보이는 일란성 쌍둥이의 여자아이 두 명을 데리고 가는 젊은 여인을 본 적이 있다. 두 아이는 똑같은 옷에 양갈래로 묶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했지만 한 아이는 말없이 엄마 손을 꼭 잡고 가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엄마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성격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아이들은 결국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서로 싸우기까지했다. 한 아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짜증이 심했지만 다른 아이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책속에 등장하는 모나와 모디처럼 말이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모나와 모디는 거울에 비춰보는 듯이 똑같이 생긴 쌍둥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두 소녀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모나는 적극적이고 활발하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잘 표현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에 동생 모디는 매사에 소극적이며 스스로 움츠러드는 조용한 아이로 나온다.

두 아이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동생인 모디가 재력가와 정치가들의 자식들이 다니는 유명한 귀족학교 뤼인고등학교로 다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 교복을 바꿔 입고 서로의 학교로 대신 가는 행동을 두 아이는 역할놀이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모나가 모디의 학교로 또 모디가 모나의 학교로 가게 되면서 각자가 새로운 환경과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를 형성해간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평범한 쌍둥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물론 후반부에 가면서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혹은 조금은 당혹스러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스토리를 이어간다.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다. 이번 소설이 지금까지 나왔던 쌍둥이를 소재로 한 여느 작품들처럼 그들이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사고를 포함해서 각자의 의식과 그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사소한 혹은 비중 있는 사건들을 접하고 해결해가면서 밝은 분위기로 결말을 내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속상하지는 않았을 법하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여느 작품들과 큰 차이점 없이 무난하지만 식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겠지만말이다. 어쨌든 이번 타이완의 작가 미사의 작품은 학원물이며,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형식과 분위기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요소만으로도 일정부분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상큼발랄하면서도 싱그러운 주인공들의 이미지는 잘 살아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 그러면 소설에서 나오는 반전은 무엇일까. 한 가지만 언급해보자. 하나의 육체에 두명의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사실 처음 소설의 이미지 즉, 학원물이며 하이틴 로맨스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진행에서 다소 생뚱한 전개처럼 보여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분위기는 급격히 전환되고, 주인공들의 심리 역시 불안전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 가졌던 소설의 분위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달라져가는 무게감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무난하면서도 약간은 식상하나 그저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쌍둥이들의 이야기가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었을까.

솔직히 이 소설에서 반전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너무 과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많이 앞으로만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굳어버린 상상력을 탓해야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게 조금은 당혹스러운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가 싶다.

    

 

사실은 살짝 과하긴 했지만 사건의 고비인 동시에 클라이막스를 지나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온 주인공들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뤼인 고등학교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 지웨이칭, 저우잉웨이, 텐무펀과 그 앙숙으로 등장하는 딩옌링, 란관웨이 선생님인 동시에 펜팔 친구인 코트다쥐르를 생각한다. 작가는 뭐랄까. 혼자가 아닌 나, 혼자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한다는 것에서 오는 긍정의 에너지. 위로와 위안의 힘이 개인의 존재감을 굳건히 하고 서로의 존재감과 관계에도 단단한 끈이 되어 이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 ‘인어가 잠든 집’이 생각이 나더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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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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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 소박한 아름다움. 인간애

   

 

신산스러운 삶이다. 옅은 곰보자국의 얼굴에 두터운 입술이 도드라진 모양새에 웃으면 붉은 잇몸이 활짝 드러나는 열 댓살 안팎의 언니, 열 아홉 스무살의 언니, 그리고 늙고 초췌해버린 어느 기억속의 언니. 이 봉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언니의 삶은 어쩌면 이다지도 신산스러운가. 아주 오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한 세대가 다 지나간 이야기같기도 하다. 멀리 시간의 이면에서 겨우 불러내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소설 속 등장하는 화자는 어린 소녀다. 그녀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어린시절의 회상의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첫사람이었던 봉순이 언니와 조우하게 된다. 작가는 왜 첫사랑이 아닌 첫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봉순이라는 인물은 주인공 화자에게 있어 세상과의 연결통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분명 존재했으나 어린 화자를 살뜰하게 챙기고 먹이고 입혔던 인물은 어머니가 아닌 봉순이 언니였다. 그저 좋아하는 대상의 인물이 아닌, 믿음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공유해왔던 그들만의 비밀을 지켜냈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 작품이 작가 공지영의 대표작이라고 했던 까닭은 아마도 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인 어린소녀와 봉순이 언니 두 사람 사이에서의 교감을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작가는 집요할정도로 봉순이 언니의 삶에 대해, 그녀의 신산스러운 시간들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식모살이를 하는 봉순이 언니의 삶은 한순간 비루했고, 철저하게 무시당했으며, 비난받았으나, 딴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으며 그만큼 아름다웠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들은 각자가 알고 있었던 혹은 모르고 지나쳤을 어느 순간 어느 시절의 봉순이 언니와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책에 등장하는 어린소녀의 시선은 매우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영특하고 영악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그렇게 복잡 미묘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고 봐야한다. ‘봉순이 언니’에 등장하는 나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회상하는 과정 안에서 한 인물의 삶에 대한 조망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여기에서 나와 또다른 주인공 봉순이 언니의 관계는 양면성을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까이 하고 싶은 끈끈한 애정과 함께 멀어지고 싶어하는 이질적인 감정이 바로 그 두가지 양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인연을 뚝 끊을 수 있겠는가, 혼잣말로 수없이 질문을 했던 어린 소녀의 감성이 있었다면, 이 어린 소녀가 사춘기 여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감성의 바뀌어간다. 어른의 시각에서 각자의 생 안에서 서로에 대해 적당히 무감각해지는 것조차 묵인해간다는 것. 이러한 얼마간에 잊혀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화된 외면까지 더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당연하다며 인정하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이러한 과정을 받아들이는 일에 낯설어하며 어려워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관계와 인식의 문제야 말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난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 공지영의 작품에서 항상 주시하며 생각해봐야 할 요소가 바로 시대적 배경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그녀의 초기작들이 그러했듯 학생운동과 여성인권(여성해방과 페미니즘)관련한 작품들을 많이 써온 내력을 착안해서라도 그녀의 작품에서는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학생운동이 큰 물결을 이루던 내용과는 거리를 둔다. 시대적 정치적 흐름을 논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지난한 삶을 통해 바라보는 삶의 진정성과 인간 내면의 그윽한 울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그 시대를 살아내야했던 고단한 우리들의 많은 누이의 삶에 대해 진지한 담론을 이어갈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3기니 참고)

작가는 그녀 스스로의 유년 시절의 대한 회고록과 같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이 애써 내몰았던 기억속의 한 인물을 가까이 불러왔고, 책이 출간된 이후 실제로 봉순이 언니와의 만남이 있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딴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리고 여린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의문들에 대해 묻는다면 답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한편으로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면 아이의 시선에서 쓰여진 작품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답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현문우답이겠지만 말이다.

비슷한 구성의 소설로 작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1981년 초판)과 90년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가 은희경의 작품 ‘새의 선물’(1995년 초판)을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인용문장]

 

-아무튼 세상 사는 게 말이야.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아는 거지.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니까.p33

 

-나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봉순이 언니는 오래오래 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p44

   

 

-그러나 오기와 자존심을 가진 유교 집안의 장자. 그러나 또 한편 현실 속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 소설에서 남성의 역할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는 부분이 우세적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라는 표현만으로 작품에서 남성의 현실적 부제와 이유를...왜 일정부분 무능한 지식인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는지 ????)

   

 

-그때 깨달아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 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고 규칙은 결국 공정함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회피, 그러므로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을까....p81(현실은 이성과 같지 않다?)

 

→(인간의 감정을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으로 완벽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개인의 사고가 정하는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색한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다른 식구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p167

    

 

-언니가 돌아왔지만 나는 뭐랄까, 굵은 소금밭에 누워 있는 것처럼 온몸이 쓰리고 불편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한번 흐르고 나면 누구도 예전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예전으로 태연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p176

    

 

-사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별리가 필요한지를, 그것이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얼마나 만이 다른 생명을 절망으로 몰아가는지, 생사의 절박한 갈림길에 선 것들의 부르짓음을 외면하고 사는지, 설사 그것이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허술한 유리창이 떨리는 소리가 세상을 뒤엎듯 들렸다 해도- 난 정말 몰랐다는 말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용서가 될까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강아지가 죽고 나는 자라고 있었다.p234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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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수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9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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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수기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선입관은 어떤 면에서 매우 위험한 요소를 갖는다. 러시아 작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에 대한 선입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으레 러시아 문호들의 분위기를 연상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작품을 떠올렸고, 이들 작가가 풀어가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 등을 투르게네프의 글에서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은 예상을 조금 빗나갔다. 사냥꾼의 수기는 그렇게 딱딱하지도 않고, 무게에 짓눌리지지도 않으며, 때로는 오히려 부드러운 서정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것을 인간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으로서 감동하고 이들이 서로 공감하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 가운데에 어쩔 수 없이 간극을 만들어가는 필연적 요소로 등장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언급 역시 함께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던 것 같다.

    

 

처음 등장하는 ‘호리와 칼리니치’라는 짧은 단편에서부터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당대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또 하나의 낡은 선입관에 대한 섣부른 고정관념을 이제 수줍게 슬그머니 뒤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일까, 를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작가는 작품에서 여느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된 생각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해왔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농노에 대한 이미지는 말 그대로 노예제도 즉 농노는 주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그들은 그저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역시나 지배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은 한명한명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단편 중에 몇 편은 사회적 모순과 당시 부조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비참하게 묘사되고 있는 부분도 등장한다. 특히 작품 ‘영지 관리인’이 그 예이다. 작품은 영주가 아닌 그 아래 계층으로 등장하는 관리인에게 의해 약탈당하고 인간적으로 상처를 받으며 어렵게 생활하는 농노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작품에서는 농노(을)의 탄원이 성공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이들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와 탄원은 울림이 없는 순간의 외침일 뿐이었다. 귀족과 지주세력(갑)은 또 다른 갑과 동조하기 쉬우나, 반대되는 세력인 을은 철저하게 외면한다. 그들의 소리를 처음부터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조금은 암울하다. 그러나 자극적이지 않은 결과로 넘어가고 있다.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의 이야기, 딴은 예속된 그 삶에 대한 담담한 순종이 어떤 면에서는 또다른 신에 대한 축복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 여인의 죽음과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어느 의사의 이야기 등과 같이 책은 단순한 귀족과 농노의 날선 쟁점위주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닌 그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결국 투르게네프는 작품에서 순수한 인간성이 이들 앞에 놓인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 책은 심각하지 않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잔잔한 울림을 전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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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니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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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니-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를 알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금 더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깊고 날카로우며,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래전 울프의 처녀작 출항을 나는 어떻게 읽었던 것일까.

왜 사람들이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이렇게 오래도록 침잠하며 몰입하는가를 생각한다. 또 가끔은 울프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묘하게도 오래전에 알았던 작가 전혜린을 연이어 생각하곤 한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3기니에서 울프가 열거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과 함께 전혜린을 생각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한다고, 아니 그러면 어떨까, 하며 울프에게 나직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전쟁과 함께 무엇보다도 여성에 사회적 위치와 입지에 대해 깊이 몰입하고 분석하는 동시에, 두 가지 성인 여성과 남성을 떠나 보편적 인간으로서 한 생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필수조건으로 등장하는 경제적 조건인 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이라는 조건부적 한계를 지닌다. 아주 부자거나, 혹은 아주 가난하여 빈곤한 계층의 여성은 조금은 열외로 하되, 버지니아 그녀 스스로가 처한 사회적 인식 안에 자리한 여성의 위치를 대변하는 조건인 셈이다.

 

편지글의 형식을 빌려와서 어떤 소설의 형식이라든지 클라이막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면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보았던 부분은 작가가 소설의 형식이 아닌 에세이라는 틀 안에서 서간문의 형식을 빌려오게 된 까닭에 부분이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책은 아주 논리적이면서 분석적인 작가 버지니아의 논지와 그녀만의 세계관을 그녀의 입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지를 받을 누군가와 마치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는 듯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당대 여성들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는 가부장적 세계관에 입각한 남성위주의 편협한 인식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라고 할 때, 이에 대해 남자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 형제들에 대한 사회적 부당한 차별을 언급한다. 작가는 글을 쓰기에 앞서 어쩌면 교육받은 남자형제들의 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있으며, 요약하자면 각각의 단체에 1기니씩 기부를 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듯하다.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채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 많은 딸들을 위한 교육제도인 여자대학 재건 협회에 1기니를 기부하고, 이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스스로가 직접 경제적 활동을 한 대가로 정당한 수입을 창출해나가기 위한 구체적 도움의 일환으로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돕는 단체에 1기니를, 마지막으로 전쟁 방지를 위한 단체에 남은 1기니를 기여하기까지. 작가는 정치, 사회, 종교, 교육, 인습과, 관습 그리고 인간의 편견과 차별의 과정이 가지고 온 결과물들에 대해 담론을 이어간다.

 

때로는 가차없는 비판과 냉소를 보내면서도 때로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이 담긴 회유와 타협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쉽게 풀어내 써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에 대한 남녀의 사고의 인식과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야기해야 할 부분은 많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여성이 사회 안에서가 아닌 사회 밖에서만(아웃사이더) 머물러야 했던 기존의 부조리와 인격체로서 평등한 교육을 받지 못한 부분에서 오는 몇가지 오류를 떠안은 채로, 전쟁 방지를 위한 도움을 구하는 남자형제를 비롯한 남성위주의 일방적인 사회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부분처럼 작가의 날카로운 인식과 비판은 책 전체에 가득 들어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받은 남성들의 딸들인 여성들에게 있어 이 ‘3기니’는 무척 소중한 경제적 가치의 증명이자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이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부하기 위해서는 타당한 이유와 설득과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책에 등장하는 3기니를 기부하는 것과 같은 여성들의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많은 것들을 구상하고 목표로 하며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만한 내용이다. 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울프를 만날 수도 있으며, 딴은 그보다 더 포괄적으로 사회와 정치와 성을 이야기하는 작가로서의 울프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과 아들들이 나란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금화 한 닢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확고히 하는 데에다 그 돈을 사용하십시오. 즉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정의, 평등,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존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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