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꽃들
V.C. 앤드류스 지음 / 한마음사 / 199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락방의 꽃들

-성장하고 또 다시 성장하는 존재들

 

책은 꽤 유명한 책이었다. 그런데 나만 몰랐던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었던 게 다였다. 어째서 내 관심을 끌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이 책을 그렇게 오래도록 외면했던 것일까.

어느 누군가 말했다. 이 책은 단행권이 아닌 여러 권으로 구성된 책이며 읽다보면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건넸다. 강열한 이미지의 스포일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금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읽으려고 하니 힘이 들었다. 94년 1월 초판 15회 발행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누렇게 변한 종이에서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캐한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다락방의 꽃들이라는 제목만을 가지고 생각해본다면 무언가 낭만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딴은 침침하고 음습한 공간과는 상대적으로 아름다움 혹은 연약함과 향기로운 꽃향기, 유혹, 사랑 등으로 상징되는 꽃의 등장은 분명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한국영화 ‘올드보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왈츠로 알려진 그 음악 쇼스타코비치 왈츠를 오래도록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영화와 소설은 닮은꼴이 많아보이였다.

 

영화 속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의해 납치를 당하고 감금된다. 납치와 감금은 나 혹은 주인공의 의지와는 별개로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 소설에서는 제목에서 나오는 다락방이 있는 하나의 방이 강금의 장소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나간다. 사고였다. 남겨진 가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낯선 땅, 낯선 집,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이들의 감금상태는 어머니의 서글픈 계획내지는 집요한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왜 계획과 계략이라는 두 단어를 같이 쓰고 있는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아이들은 지혜로웠으나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했다. 아이들은 사랑이라는 것의 정서적 교감과 모성애와 어머니라는 의미가 지니는 무한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는 정작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인물로 변해간다. 네 명의 아이들 크리스토퍼, 캐시, 쌍둥이인 캐리와 콜리는 조부의 죽음을 기다렸다. 그 결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부자가 되어 자신들을 방에서 꺼내줄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다락방이 딸린 외진방에 갇혀 3년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틴다.

 

소설이 갖는 중요한 포인트로 근친상간의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해받기 어려운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다. 이 두 사람은 세간의 비난과 날선 이목을 피해 성을 바꿔 아이들을 낳아 평범하게 살았지만 결국 가문에서 버림받는 신세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네 아이들은 처음부터 저주받은 아이들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출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온몸에서 감정이라는 이름의 모든 찌꺼기가 빠져나간 듯한 무감각하고 냉정한 사람인 조모로 나오고 있다. 냉혈함으로 갑옷을 두른 듯한 이 인물은 끊임없이 네 명의 아이들과 적대감을 형성해간다. 소설은 남편이 죽고 생활이 곤고해진 까닭에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어머니가, 시간이 갈수록 조모의 모습을 닮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실 닮아가거나 배워가는게 아니라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그녀의 진짜 모습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니 태생부터 조부모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믿고 따랐던 자신의 네 명의 아이들을 희생시키게 된다.

 

소설은 갇힌 존재인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작은 아이들의 시선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거짓과 모순 그 자체였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간 심리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기심과 비열한 열망과 같은 인간의 어두운 이면이 가져오는 이중성을 어머니와 조모를 통해 비판한다. 이를테면 보편적이거나 통상적인 생각의 틀을 비틀어버린 채 등장하는 어머니의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작품에서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을 독자는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방에 들어갔던 아이들은 네 명이었으나, 다시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들은 세 명뿐이었다. 왜 그들은 조금 더 빨리 닫힌 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을까.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아이들을 그곳에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자 했던 어머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달 5월에... 그것도 어린이날이 낀 연휴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어야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희생이 먼저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동창생이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 앞에는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내 말에, 그는 희생이 따르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이십여 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사랑이란 이름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감사의 이름과 기쁨의 이름이, 슬픔의 이름과 함께 누군가를 책임지도록 만들어가는 그 희생의 이름이 또 깨달음과 성찰의 이름까지 모두 담겨진 것은 아닌가.

그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든 성장한다. 그래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인간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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