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미래. 불안정한 현재.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절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
난 언제나 이렇게 당연한 얘기로 운을 뗀다. 화투장을 떼듯 운칠기삼의 정신으로 시작하는 나의 첫 문장은, 그래서 불쌍하다.
어떤 꽃놀이패를 쥐어줘도 소용없게 되는 운발이어도 내 불쌍한 첫 문장은 끄떡도 않는다. 누구는 글발이 좋고 누구는 약발이 좋고 누구는 사진발이 좋고 또 누구는 오줌발도 좋다는데 난 운발이 좋다.(아니 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모토를 벗삼아 눈물도 흔하디 흔하여라. 자주 울면 눈이 맑아져서 눈 건강에 좋다고, 어느 안과의사의 사돈에 팔촌에 삼촌에 팔촌씩이나 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나의 20대는 제법 영롱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려면 여기서 좀 더 불쌍해져야 한다.
# 오늘 아이가 울었다. 나의 20대를 쏙 빼닮은 눈물이었다. 여친이 있고 연애의 비용을 부모로부터 타내야 하는 그의 현실이? 펑크난 학점이? 물론 난 그의 눈물을 이해한다. 건성으로라도 이해한다. 눈물에 농도가 있다면 그 역시 이유는 제각각일 테니까. 이렇게라도 이해하는 것이 나로선 맞다. 아이들은 반드시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이건 뭐 대단한 깨달음인가? 그럴리가. 자책하는 엄마들의 모임에서 우수회원이 될 자격이 충분한 나에게 주어진 유치한 수준의 깨달음? 그렇다고 해두자. 한마디로 나는, 뜻이 별로 없다. 그러니,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라는 말은 나에게 과분한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지껄인 말이다.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내 손으로 직접 챙기지 못했지만, 지금 책상엔 이 모든 것들이 놓여있다. 아들의 눈물은 여기에 있다. 나 또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