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지대 (No Man's Zone), 후지와라 토시, 2011
동경공원 (Tokyo Koen), 아오야마 신지, 2011

 

 



영화는 거의 완전히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쿠시마의 해변을 길고 느리게 패닝하며 시작한다. 거기에 애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시설물들, 그것은 거의 복구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부러진 목재들과 콘크리트들, 여러가지 잡동사니들, 자동차들, 부러진 잔해들, 그리고...그 밑의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를 시체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좀 흥미로운 구조다. 화면은 재앙이 일어난 후 거의 텅빈 후쿠시마를 비추고 있지만, 화면의 현장음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두 가지의 다른 음성이 깔린다. 하나는 감독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어 나레이션이다. 이 영화 <무인지대>의 감독 후지와라 토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이례적으로 영화 시작전 발언을 자청해 관객에게 이 영화를 '이런이런 식으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나레이션은 매우 직접적이고, 좀 많은 편이며, 더구나 중언부언하는 경향마저 있다. 다른 하나는 이 화면을 보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보다보면 이 목소리는 감독이 찍은 이 영상을 뒤늦게 (대피소 같은 곳에서) 보고 있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발언은 "아..저기는 이게 있었는데..", "저것은 누구의 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중간에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나레이션과 맞물려 어떤 효과를 낸다. 나레이션은 말한다. 이것을 어떤 '스펙터클', '파괴의 현장'으로 보지 말 것. 그보다는 그 파괴 전에 있었던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볼 것. 즉 우리는 재난을 대부분 어떤 거대한 파괴, 가공할만한 힘, 거대한 비극의 현장으로만 받아들인다. 아마도 후쿠시마의 해변을 패닝하는 첫 장면을 대부분의 관객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참 쓰나미란 무서운 거구나, 저런 엄청난 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란 게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구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쿠시마의 무인지대의 공간들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오버랩해서 보여주던 감독은 다시 영화의 중반부, 그러니까 굳이 나누자면 1부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처음의 그 패닝 장면을 붙인다. 이것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중간에 우리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완벽한 파괴의 공간, 깡그리 사라져버린 듯한 무의 공간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저긴 뭐가 있던 자리인데, 누군가가 살던 공간인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짧은 패닝의 과정에서, 그 엄청난 잔해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게, 상상하게 된다. 저 자리는 뭐가 있었던 자리 같은데,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2부로(영화 상에서 명확하게 1, 2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넘어가 이타야 같은 후쿠시마 주변지역, 다시 말해서 소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어디에도 갈만한 곳이 없으며, 갑자기 자신의 생활터전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에 담겨 있는 질문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직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무대책한 주장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식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곳에서 만난 한 어민은 그런 주장들이 대부분 말도 안되는 것임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정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조업을 금지했으나, 그 곳에서 불과 몇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도 된다고 허가했고, 이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당연히 우리의 입장에서도)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닷물에 어떤 구획선이 그어져 있지 않음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주장을 인간의 경우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제한되었고, 근방 몇 킬로미터의 주민들에게 모두 소거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타야 같은 곳에서는 살아도 된다? 이것은 산 자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죽은 자에게 물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통제되어 75일 만에 구조와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혹시라도 운이 좋게 살아 있었을 어떤 사람들은 무려 75일 간이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아마 두 가지 정도를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후쿠시마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은 것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혀 콘트롤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의 대응은 거의 무대책에 가까웠고, 그것은 일본 정부가 유달리 무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사고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사고 이후에 이어질 일들도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이 정말 무서운 점은 그것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떤 일을 시작해버린다, 만들어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영화(필름)의 임무 중의 하나는 기록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있었던 일이라는 점을 후세의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레이션에도 나오지만, 거의 후쿠시마와 비견될 정도의 참혹한 재해들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즉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며 때로는 조작된다. 예를 들어 어쩌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실재했었다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몇 개의 희미한 기록필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록은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진다. 하나는 그 기록된 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혹은 기록의 이면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되풀이되지 않게 할 것. 그것을 어떻게든 기록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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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 영화는 기다렸던 아오야마 신지의 <동경공원>. 사실 솔직히 말해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평범하다는 인상이 짙었지만, 사실 아오야마 신지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그의 <헬프리스>,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의 이른바 '가족 3부작'을 보고 가지게 된 것이 전부이고 그의 그 가족 3부작이 워낙 수작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흔한 일본식 청춘물의 외피를 두르고, 그 안의 과육을 보여줄듯 말듯 하다가 결국 안보여주고 끝나는 듯한 느낌인데 전체적으로는 느린 호흡으로 차분히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목에도 있는 '공원'이라는 공간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은 조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공원이란 사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거의 유일하게 출입자격을 묻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출입료를 받는 어떤 빌어먹을 공원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공간들은 사실 제각각의 출입의 자격과 지위를 규정하고 있고,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공원은 거의 유일하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며, 따라서 누구나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료한 할아버지들이 주로 드나드는 탑골공원이나, 실직자들이 공원에 가는 당연한 클리세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원이 무질서의 공간이나, 아무런 규칙도 없는 곳은 아니다. 모든 공원에는 암묵적으로 따라야할 규정들이 있으며, 그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자유롭긴 하나 어느정도 제한된 자유만을 허한다.

아마도 이러한 공원과 같은 것이 하나의 비유로서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중간에 한 남자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마치 이 공원과 같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오야마 신지가 믿는 현대 사회가 지향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전작 <새드 배케이션>에 그려졌던 '마미야 월드'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공간, 최소한도의 규칙만 지키면 서로를 보호하며 터치하지 않는 공간으로서의 공원이자 사회의 모습이다. 즉 딱딱한 건물 안에만 있다가 넓은 공원에 가면 모두들 약간은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처럼, 사회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공원은 아니 사회는 그런 다양한 인물을 감싸 안아야만 한다. 영화 <동경공원>은 그런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환자이자 치과의사, 바를 운영하는 게이, 모든 것을 영화로 비유하는 영화광,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의붓남매, 심지어는 죽었는데도 이승에 머물고 있는 유령마저 포함된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해 힘들어하지만, 감독이 결국 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작은 카메라 뿐이다.

즉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들, 이들을 넓은 공원에서 맨눈으로 넓게 보면 좋겠지만,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으면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로 이들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가진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에는 애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드넓은 공원 속에서 모든 인물을 우리는 우리의 맨눈으로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부터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할 것. 작은 카메라는 먼 곳을 찍으라고 발명된 물건이 아니다.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데는 흐려지게 마련.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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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11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도쿄공원]을 전에 봤는데요. 유령 너무 귀여웠어요. [유레카]를 만든 감독이란 건 몰랐고 여배우를 좋아해서 그냥 보기 시작했는데, 계속 공원에 있는 여자를 감시(?)하는 남자애가 지루해져서 중간에 끈 것 같은데, 저 감독이라면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무인지대]라는 영화는 일본이 만들 수 있는 다큐영화를 짐작케하는 정점처럼 느껴지네요, 이 나라는(제가 일본영화광은 아니지만) 늘 무언가의 가해자 입장이 훨씬 강하다보니까 어떤 기록영화를 만들어도 타국의 관객 입장에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 듯한데, 저만 그런가요..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어떤 지점의 이야기가 분명히 있는데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아요. 왜 일본 것만 두개예요, 기록 2탄도 있는 거겠죠? :)

맥거핀 2012-09-13 00:32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도쿄공원>은 너무 부드럽게 끝나버려서 약간 어리둥절했어요. 뭔가 좀 더 센 얘기를 기대했었던 모양. 여배우는 그 영화광으로 나온 배우 말인가요, 아님 그 남주 누나? 그 남주 누나로 나온 배우는 예전에 '춤추는 대수사선'보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얼굴봐서 반가웠어요.; 암튼 일본 영화는 뭔가 약간 손발이 오그라드는 특유의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은 아마도 제가 한국인이니 느끼는 거겠죠.

뭐 근데 아무튼 거대한 재난이 일본에서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분명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죠. 이 영화는 우리가 피해자다, 도와달라는 식이 아니라, 이 일을 기록해둔다, 하나의 본보기로 해둔다는 느낌이 강해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요새 원전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보면, 이렇게 큰 경고가 있는데도 재앙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 위에도 썼지만, 재앙이 일어나면 이는 '대책' 따위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인데도요.

2탄도 조만간 써야죠.:)
 

 

 

 

이것이 90년대 레트로~! 금요일 오후의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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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9-0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가위!

Arch 2012-09-07 21:00   좋아요 0 | URL
금요일인데 저는 아직 회사에요. 내일 쉰다는 것만으로 무척 달뜨는 금요일이에요.

맥거핀 2012-09-08 23:51   좋아요 0 | URL
금요일인데 그렇게 늦게까지 잡아두는 회사는 참 안좋군요. 잘 쉬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며칠 전 태풍으로 비가 쏟아지는 날 이사를 했다. 오기로 했던 포장이사 업체에서는 늦었고, 예정했던 인원보다 사람이 덜 왔으며, 그래서 그랬는지 일을 대충처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책짐에는 신경을 써달라고 얘기했으나 책의 상당부분이 물에 젖고 말았다. 며칠동안 책의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정리하자니 짜증도 나고, 포장이사 업체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도 퍼부었는데, 계속 정리하면서 주섬주섬 책을 읽다보니 다 부질없는 화처럼 느껴진다. 책으로 인해 화가 나고, 책으로 인해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음은 가라앉았는데, 날씨는 여전히 흐릿하다. 날씨든 뭐든 흐릿한 날들이 지나야 맑은 날이 오는 법.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 서경식 / 반비

 

이 책은 그간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꾸준히 얘기해온 서경식 선생이 일제강점기 이후 재일 조선인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책은 먼저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부터 정확히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이 가지는 이미지에는 우리가 흔히 가지는 어떤 편견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경화문제, 친일과 극일, 반일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가득한 한일관계의 문제 외에도 조선족 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에도 다른 의미에서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물론 서경식 선생의 책이라는 점에서도 닥추.

 

 

탐욕과 생존 - 영화, 분쟁을 말하다 / 김용성 / 책보세

 

영화는 작은 카메라로 오랫동안 거대한 것에 대해서 말해왔다. 그 중 하나는 거대한 분쟁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많은 전쟁영화들은 전쟁 그 자체의 스펙타클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 전쟁의 특정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폭력에 맞서서 자신과 주위사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으로써 모든 전쟁을 다루는 영화, 분쟁을 다루는 영화는 (편파적인) 특정의 관점을 담기 마련인데, 각 영화에 담긴 특정의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에서도 흥미로울 것 같다.

 

 

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 심혜련 / 그린비

 

20세기는 또한 '매체'의 시대이기도 했다. 마셜 맥루한이 말했듯 이른바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종말하며, 20세기에는 온갖 새로운 매체가 출현하였으며, 21세기는 그보다 인간에게 밀착된 다른 매체들이 출현을 대기중이다. 지하철에 있는 사람의 최소 50% 이상이 타인이나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손안의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 때, 인간이 매체를 벗어날 수 있는가, 혹은 가상과 실재를 구분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은 거의 무의미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 곧 새로운 매체들의 공습이 시작될 이 때, 지나간 20세기의 매체들을 둘러싼 질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올 우리의 고민들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영화 이론 - 1945~1995년의 영화 이론 / 프란체스코 카세티 / 한국문화사

 

사실 지난 50년 동안의 영화에 대한 이론들을 한 권에 몰아넣는 것은 무모한 시도에 가깝다. (그 앞과 뒤를 충분히 덜어냈는데도 그렇다.) 영화는 흔히 얘기하듯이 종합예술로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예술과 그 예술의 이론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중예술로서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도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 더 무모한 시도는 이 책을 추천도서에 집어넣는 것일 것이다.

 

 

오감으로 쉽게 찾는 우리 나무 / 이동혁 / 이비락

 

현대인의 삭막한 눈에는 사실 모든 나무가 그게 그걸로 보이기는 한다. 이 책은 사계절에 걸쳐 우리나라에 주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오감(五感)을 이용하여 구분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도판과 함께 일별한 책이다. 저 멀리에 있는 자동차는 어디 회사의 몇년식인지 잘도 구분하고, 옷과 가방은 어디 메이커의 이월상품인지 아닌지도 잘도 찾아내면서 우리는 나무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에 가깝다. 이제 가을이니 나무도 보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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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9-0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 토요일에 대구미술관에 하는 서경식씨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맨 처음 소개된 서경식 씨의 신간이 반갑네요. ^^

맥거핀 2012-09-04 16:39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저도 서경식 씨 책이 나오면 늘 읽었었는데(예전에 cyrus님께도 한 권 받았었죠..^^), 강연에 참석해보면 좋겠네요. 이제 cyrus님 개학이시니 또 바빠지시겠어요.

2012-09-0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씨의 글은 서늘해서 좋아요. (<소년의 눈물>하고 <나의 서양미술 순례> 두권만 읽어봤지만..)이제 영화 관련 책 막 추천하는군요.ㅎㅎ 여튼 추천 책의 분야가 매우 다양합니다요~.
그나저나 책을 적시다니, 그거 포장이사 변상 대상이 아닌가요? ㅠ.ㅜ

맥거핀 2012-09-06 00:06   좋아요 0 | URL
네..얼마 안남았으니까 그냥 이것저것 재지말고 내가 읽고 싶은 책 막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뭐 문제가 생겨도 참 보상받을려고 해도 귀찮은 일이라..다만 사람이 덜 온 부분은 확실한 계약 위반이라, 그 부분만 조금 돈을 적게 주는 걸로 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프레이야 2012-09-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태풍 온 날 이사하시게 됐군요. 일자가 정해져 있어 변경하기도 어려우셨을테고요.ㅠㅠ 책이 젖어 어째요.ㅠ 책을 제일 싫어하더라고요, 포장이사업체 사람들이요. 두 가지 책을 담아갑니다. ^^

맥거핀 2012-09-06 00:08   좋아요 0 | URL
이사라는 게 한 번 날짜가 정해지면 여러 가지가 걸려있어서 그냥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죠. 아마 이사업체 사람들로서도 비오는 날씨에 책도 많고 해서 여러모로 짜증이 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죠.^^ (덕분에 재정리하면서 있는지도 몰랐던 책들을 다시 챙기게 되었습니다.) 관심을 가지실 만한 책이 있다니 좋군요.

Shining 2012-09-0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섬님 말씀에 공감. 책이 젖으면 보상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음, 저는 그래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아마 그래야 할 것 같은데_- 책이 젖다니! 이건 재앙이잖아요!

눈이 오는 날 이사해본 적은 있는데 태풍이라니; 고생 많으셨습니다(꾸벅).

아, 맥거핀님. 저 영화책 좀 추천해주세요!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소개해주시는 마음으로 부탁드릴게요 :)

맥거핀 2012-09-06 00: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원래 일기예보에는 볼라벤이 지나가고 다음이라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하게 태풍 하나가 따라올라 오더군요. 일이 뭐 안되려면 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죠. 암튼 위로 감사합니다.^^

영화책은 뭐 저도 많이 모르기는 한데, 요 옆에 '마이리스트' 눌러보시면 예전에 '씨네21'에서 영화책 추천한 것을 제가 리스트로 만들어둔게 있어요. 거기에 책을 저도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자크 오몽의 <영화와 모더니티> 같은 것은 필수적으로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책은 하스미 시게히코 외에 몇몇 사람들이 쓴 <나루세 미키오> 같은 것들 좋았구요. 이 책이 들어가 있는 '한나래 씨네마' 시리즈도 괜찮은데, 그 중에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정말 재미있고, 영화에 대해 새롭게 보는 시각을 상당히 길러주는 책이라고 봅니다. 정말 기존에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구요..(근데 문제는 이 책이 절판이고, 상당히 구하기 어렵다는 점..저도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최근에 봤던 책으로는 <필름메이커의 눈> 같은 책들이 여러 촬영기법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맥스무비에서인가 나온 씨네마톡 모아놓은 책도 재미있었고요. 근데 뭐 이미 이 책들 거의 보시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제가 괜히 쓸데없이 긴 말 늘어놓지 않았나 싶네요. 추천이라기 보다는 그냥 제가 재미있게 읽었다, 그 얘깁니다.^^;

Shining 2012-09-06 11:56   좋아요 0 | URL
하하^^ 저를 과대평가 하고 계시군요(후후후후후). 말씀하신 책은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자랑은 아닌데...) 영화책은 예전에만 좀 읽은데다 요새는 거의 특정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책만 읽은 것 같습니다. 마이리스트에 목록은 전에 본 적 있습니다. 말씀 안 드리고 몰래 컨닝했어요*-_-*

제가 다니는 도서관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예술분야 책이 너무 적어요. 수요가 없어서 공급도 없는 식인데 뭐, 수요가 없으니 책 상태만은 엄청 좋지만요^^

추천, 이라는 말은 좀 막연하고 짜증스러운 표현이라 사실 쓰고 좀 갸우뚱했는데(소심합니다 저) 좋았던 거, 골라주시니 좋군요. 또 생각나는 거 있음 말씀해주세요 :)

맥거핀 2012-09-06 22:00   좋아요 0 | URL
아..저는 이사오기 전에는 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는 상당히 좋은 환경에서 살았었는데, 이사오고 난 후에는 상당히 도서관이 멀어서, 예전처럼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게 될는지는 모르겠네요. 근데 서울의 큰 도서관의 책들은 대체로 상태가 그다지 좋지가 않아요. 말씀드렸던 <히치콕과의 대화> 그 책도, 특정 영화에 대한 부분이 다 누가 뜯어갔더군요.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책이 없으니, 생각나면 또 말씀드릴께요. 근데 사실 영화에 대해서는 고전에 대한 글들도 좋지만, 최신 영화잡지 같은 것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들을 죽 읽는 것도 괜찮은 것 같기는 해요. 시간나시면 도서관 잡지 코너에서 <씨네21>이나 <무비위크>, 혹은 <영화평론>의 평론글들만 죽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키노>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아..매년 나오는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시리즈도 있어요.^^;) 소설도 단행본으로 나온 것보다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 중에 진짜 좋은 것들 많지 않나요..

아이리시스 2012-09-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 저도 저거랑 저거..저는 그냥 제가 사서.. 서경식..맨날 들었다놨다 하다가 이젠 좀 읽어보려고요. 근데 이번 책은 시작하기에 뭔가 심하게 학술적인데.. 제가 하는 게 다 그렇죠 뭐.

p.s. 조만간 두 분 영화평론 등단하는 겁니까? (좋겠다 좋겠다)
그러면 저도 마이리스트 훔쳐보러-_-;;

맥거핀 2012-09-06 22:26   좋아요 0 | URL
열심히 훔쳐보고 계심? (저는 아니고, 아무래도 Shining님이 등단욕심이 있으신 모양...;;)

근데 서경식 선생님 책 저거는 제목만 저렇지 그렇게 학술적이지는 않을거에요. 아마도. 어렵고 무거운 얘기를 상당히 쉽게 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분이라,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생각합니다.

Shining 2012-09-07 01:16   좋아요 0 | URL
어머어머. 아이님, 맥거핀님이 은근슬쩍 저한테 떠넘기고 계세요~(이른다ㅋ)

등단욕심, 가당치도 않으십니다-_ㅠ 필름 2.0폐간 후엔 가끔씩 씨네21만 읽는데 (이상하게) 성에 차진 않아요;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이 시리즈 재밌죠ㅋ 저도 도서관서 몰아서 읽었어요 :)

키노, 진짜 그리운 이름이네요.

맥거핀 2012-09-07 03:00   좋아요 0 | URL
네..자고로 뭐든지 일단 떠넘기는 게 진리라고, 어떤 직장선배가 몰래 가르쳐줘서 열심히 실천중입니다..; (물론 가르치면서 그가 나에게 '쓸데없는 것을 가르치기'라는 걸 떠넘기기는 했습니다만..)

뭐 사실 씨네21은 요새는 거의 문화잡지 비스무리하게 되버려서, 영화에 대한 좋은 글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만, 아직 전영객잔은 그래도 쓸만해요. 김혜리 씨나 정한석 씨 글도 좋고..저는 사실 이상하게 필름 2.0에는 그다지 정을 못 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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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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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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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8-28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정된 날짜보다 '역시나' 하루 늦었네요. 알라딘 서평단 담당하시는 분과 대장님에게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8-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책'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영화도 물론이고! 황홀하게도 읽고 싶게 생기긴 했지만, 읽고 쓰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에 저도 한 표요!

적어도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같네요, 이 리뷰를 보니까.

이제 비가 오는 것 같네요. 문 닫으러 가요^^

맥거핀 2012-08-28 16:12   좋아요 0 | URL
뭐 잘사는 사람들은 스케일이 다를지 몰라도, 못사는 사람들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책에 있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어떤 부분은 한국이 낫고, 또 어떤 부분은 미국이 낫고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도토리 키재기같고, 거기서나 여기서나 가난한 사람이 무시받고 하는 것은 비슷한 듯 싶어요.

이제 아래동네는 좀 나아졌나요? 좀 있다 나가야 하는데 걱정되는데..

2012-09-0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장노동을 하면서 절망에 빠졌던 시몬 베유가 생각나네요.
어쨌거나 뭐라 말하기가 좀 그런 리뷰예요. 내가 저만큼의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서?! 맥거핀 님이 이런 글을 읽고 쓰는 자신의 행동을 허위라고 딱 잘라 말해서? ^^;; 여튼 이 세상 살기가 무척 힘드네요. 모두 모두.. (여기엔 나도 들어가요..ㅋ)

맥거핀 2012-09-06 00:25   좋아요 0 | URL
위에 아이리시스님도 이야기하셨지만, 노동에 대한 얘기들을 하는 것이 좀 어렵죠. 뭐 예전에 대학 때 집회에서 '철의 노동자' 같은 노래들을 부를 때 느끼던 어떤 감정들이랄까요. 저도 당연히 들어갑니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세상살이의 문제에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많나요? 잘 모르겠네요.

2012-09-06 08:11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런 이들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르고, 그냥 처해진 환경에 살고 있는 게 우립니다. 진짜..ㅎㅎ -세상이 정확히 뭐가 몇 퍼센트로 구성되었는지 정말 몰라요~.

맥거핀 2012-09-06 21:52   좋아요 0 | URL
나이 좀 더 먹으면 알 수 있을까요?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게, 나이 많은 먹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 하는 짓거리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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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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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뱀파이어라는 것은 왜 탄생되었는가(왜 발명되었는가), 왜 특히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들은 각광받고 있는가, 뱀파이어가 마늘, 햇빛 등에 치명적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뱀파이어는 왜 하필이면 박쥐로 변신하는가, 뱀파이어는 왜 늙지 않는가(도리어 젊어지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그렇게나 마셔대는데, 왜 그렇게 늘상 창백한가. 즉 내 질문은 '뱀파이어의 양상'에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기원'이나 '이유'와 관계된 것인데, 요하임 나겔의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그리 마땅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책은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존재가치에 대해 고찰하는 책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즉 이 책은 문학, 미술, 음악,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에서 나타난 뱀파이어의 여러 다양한 존재양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일종의 '뱀파이어 백과사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 중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을 일별하여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뱀파이어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내 관심은 그런 존재의 양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나 기원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여자 악령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신생아를 잡아먹는 여자악령인 릴리트나 소년들의 피를 갈망하는 라미아,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밤중에 나타나 몰래 동침하는 수쿠부스 등이 그러한 것들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중세의 미신들과 결부하여 점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기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큘라 백작과 같은 남성 흡혈귀가 아니라, 여성형 악령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위협,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이면으로서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제시하는 남성 중심적 세계의 안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뱀에게 유혹당한 이브)을 끊임없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들에게 구원이란 남성들에게보다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남성들에게 복종하여야만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할 필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여성형 악령들의 출현이 에로스나 타나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령들은 괴상하고 혐오스럽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또한 한편으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심리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즉 위험하다고 여겨질수록 그 매혹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묘한 역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성립하게 마련이고(모든 팜므파탈의 그 위험성의 강도와 매력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여성형) 악령들은 극도로 위험해서 매혹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즉 이것에는 성적인 것에 대한 매력(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유혹(타나토스)이 비슷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남성의 경우에만 성립되는 역설은 아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가지는 위험은 최대한 제거되고, 그것의 매력만이 최대한 강조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이 그다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예전보다) 종교가 가지는 구원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고, 현세의 삶이 중시되는 현재에 이르면 죽음의 근처에 머물러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서 뱀파이어의 능력들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뱀파이어들은 거의 슈퍼히어로와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즉 중세에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예를 들어 늙지 않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날 수도 있음 등에서 그 죽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에 들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부러운 슈퍼히어로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피부마저도 창백하고 으스스한 피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에 대한 어떤 각광들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늘과 박쥐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나 성수, 햇빛에 대한 위험은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반면, 마늘이나 박쥐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늘은 그 생경한 맛과 향 때문에, 박쥐는 동굴에서 산다는 특징과 검은 색, 날카로운 이빨 등의 형상이 뱀파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부분보다도 도리어 이 책을 읽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음악과 미술, 영화, 문학 등의 예술작품들은 당대의 습속과 지식,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잉글랜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1897년이라는 당대의 지리학적 관심과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고, 또 이 소설은 흡혈귀라는 비과학적인 사실이 이야기의 원천이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에는 당대의 정신병리학과 범죄학의 최신사실들이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책에 나온 1994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는 20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의 경제호황의 쾌락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아마도 이의 상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뱀파이어 레스타(톰 크루즈)가 모는 빨간색 무스탕 컨버터블일 것이다). 그런만큼 이 책 <뱀파이어,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를 다룬 예술들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그래서 나도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간단한 뱀파이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써본다. 장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뒤를 이은 풍자시트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짧은 리뷰라 뭐 지면이 많이 남기도 하고. (...)

뱀파이어들이 공공연하게 출몰하는 근미래의 우리나라. 뱀파이어들의 자잘한 범죄들(이 시기의 뱀파이어들이 저지르는 것은 절도 등의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인간의 피를 빨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혈색을 좋게 만드는 피 성형, 각종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있는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은 탓으로 변해버려, 뱀파이어들이 마시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특수처리된 정제된 피를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매우 비싸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뱀파이어 진압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무자격 신부들을 용역으로 투입하고, 초강력 마늘탄 등의 사용으로 진압 과정에서 뱀파이어들이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거듭되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마침 이 때 한 진압현장을 다루는 뉴스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어린 소녀 뱀파이어의 모습이 찍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소녀는 스타가 되고, 급기야 소녀의 가족들은 TV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다.  

소녀의 가족은 TV에 출연하여 그간 어렵게 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밝히는데, 쉬운 농장일이라고 찾아갔더니 알고보니 마늘농장이었던 사연, 나무막대기 두 개만 붙이면 되는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일하러 갔더니 십자가 제조 공장이었던 사연, 너희들은 원래 밤에만 일하는 종족이니 야간알바비를 주간알바비로 책정하여 지급하겠다는 악덕 편의점주의 이야기 등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또 한편으로 이들 가족이 시킨 피자에 몰래 마늘 소스를 뿌리고, "뱀파이어가 마늘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며 변명한 피자가게 알바녀가 '뱀파이어 마늘녀'로 불리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여론이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정부는 곧 태도를 바꿔서 이것도 다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뱀파이어들에 대한 진압을 멈추고 뱀파이어를 법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관심도 한 때 뿐이고, 이들 뱀파이어 가족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곧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되는데, 정부는 '뱀파이어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뱀파이어들에게만 정제된 피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뱀파이어들은 멸종 위기에 몰린 자신들을 '뱀파이어 특별 보호법'으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며 묵살당한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길거리에 나와 각종 알바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급기야는 정제된 피가 가득있다는 트럭을 습격하지만, 그 트럭에는 인기가수 싸이코가 '뱀파이어 스타일'이라는 곡을 가지고 '피 흠뻑쇼'라는 공연을 할 때 쓸 가짜 피만 가득 담겨 있었던 일 등의 각종 사건을 겪는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대통령 및 모든 정부 각료들, 국회의원들을 모두 물어 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즉 뱀파이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최후의 계획.

치밀한 계획 끝에 청와대와 국회에 잠입한 뱀파이어들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린다.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대통령의 목에 이빨을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내려는(물론 삼키지 않아야 한다) 뱀파이어 대장과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란 뱀파이어 대장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정부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아...나랏님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를 내뱉으며 긴 탄식을 내뱉는 뱀파이어 대장과 망연자실한 주위의 뱀파이어들을 비추며 시즌 1 마무리.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블랙 메탈, 데쓰 메탈 그룹인 'Cradle of Filth'의 곡 중에서 하나. 책에 어울리도록 그들의 1996년도 앨범 <Vempire or Dark Faerytales in Phallustein>에서 뽑아봤다.

Cradle of Filth - Queen of Winter, Throned (with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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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08-2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여기서 뭐하고 계신겁니까! 어서 충무로로 가세요!
아니면 시나리오를 씁시다! 맥거핀님은 여기서 이러고 있기엔 너무 아까워요_-
덧글이 너무 재밌어서 저 막 낄낄거렸어요.

지금 밖은 엄청난 강풍이 불어요. 문이 덜컹거리고 나무가 휠듯이 움직입니다.
뱀파이어보다 호러영화보다 무섭네요. 내일 신디는 보러 가지 않으시는게 좋으실 듯 합니다ㅠ

맥거핀 2012-08-28 01:45   좋아요 0 | URL
네..아는 충무로 감독 있으시면 소개 좀..ㅋ 마음 같아서는 제가 만들어서 찍고 싶은데 아무래도 돈이 좀 들거 같아서요. 제가 작품성은 쥐뿔도 없는데, 쓸데없이 비싼 배우나, 촬영스타일을 고집하는 스타일이라..

거기 부산이죠? 뉴스에서 보니까 아랫동네는 점점 후달리는 느낌이던데, 서울은 아직까지는 후덥지근하고 뭔가 먼바람 소리만 살짝씩 들리는 수준..뭔가 바다에서 거대한 고질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요. 할게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마음만 불안한 상황.

Shining 2012-08-28 11:39   좋아요 0 | URL
이런 폭풍같은 날씨에도 깨알같은 유머를 날려주시는 맥거핀님 덕분에 오전이 즐겁네요, 감사합니다(꾸벅).

충무로의 아는 감독은 없고(독립영화 감독님이라도 괜찮을까요?)어떻게.. 연출부라도 소개를...ㅎㅎ

여기 부산 아니에요^^ 서울이 아닌 건 맞지만요ㅎㅎ 아침에 거의 바람에 밀려서 나왔어요; 지금은 눈 앞에 나뭇잎들이 가로로 날라가요; 간판이랑 유리, 특히 조심하세요ㅠ 그럼 살아서(?) 뵈요 :)

맥거핀 2012-08-28 16:15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암튼 늘 깨방정과 오지랖이 문제군요. 근데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아무튼 제 오해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근데 진짜 미스테리하긴 한데..왜 그렇게 믿고 있었지..)

아이리시스 2012-08-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파이어 마늘녀ㅋㅋ 인기가수 싸이코ㅋㅋㅋ
자, 이번에는 시즌2 차례입니다ㅋㅋㅋㅋ

저는 외국에 와 있는 건지,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오는데요. 나무야 뭐 원래 항상 흔들리는 이파리소리가나서....^^ 내일은 가지 마세요! 아, 그 광대 감독 영화 보셨습니까?^^

맥거핀 2012-08-28 01:49   좋아요 0 | URL
아..사실 시즌 2와 시즌 3의 구상도 다 해놨는데, 그건 시즌 1의 성공을 봐서...암튼 최대한 B급, 아니 C급스럽게..ㅋ

위에 Shining님고 그렇고, 아이리시스님도 권하시고 해서, 낼 영화를 과감히 취소했습니다! 근데 그 광대 감독 영화가 낼 그 영화라는..^^ 그런데 놀라운 건 취소하면서 보니 매진인 거 아니겠어요. 저는 엄청나게 취소표들이 쏟아졌을 줄 알았는데, 아직 매진이라니..아...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나 따위는 댈 게 아닌듯.

아이리시스 2012-08-2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부산이고 샤이닝님은..어디사는지 몰라요!! 만약 부산이면 왜 지금까지 저도 부산이에요, 라고 안했지, 몹쓸 신비주의자잖아요.. 샤이닝님, 나 삐졌어.. 변명해봐요!!

맥거핀님, 그 광대 감독 영화가 낼이에요? 근데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검색해서 들어가보니까 아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영화도 하나도 없었어요 orz 태풍이 오는데 영화제는 강행한답니까!

Shining 2012-08-28 11:46   좋아요 0 | URL
제가 아무리 몹쓸 신비주의자라지만(인정합니다;;) 부산 살았으면 얘기했을 거에요. 전 훨씬 작은 도시 살아요, 그러니까 만날 독립영화 못 본다고 징징대잖아요ㅎㅎ 아이님 삐지지 마셔요ㅠ

자, 맥거핀님 어서 해명을! 제가 아이님한테 미움받지 않게 확실히 책임 져주셔요 :)

와 근데 이 날씨에도 매진이라니(아직 서울은 덜 심해서 그런가요;). 진정한 영화광들이시구나, 나라면 진작 취소했을텐데_-;;

맥거핀 2012-08-28 16:18   좋아요 0 | URL
네..아무튼 모든 것은 저의 믿을 수 없는 뇌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니 Shining님을 미워하지 마시고 저를 미워하세요.;; 제가 아이리시스님은 저번에 들어서 부산이라고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

근데 막상 취소해놓고 나니 조금 아쉽긴해서, 아직 살짝 고민을 하고있기는 합니다..저같이 고민하는 분들이 있는지 취소표가 하나씩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고 있네요..그 영화가 확실히 좋다고 하면 고민 안하겠으나, 영화도 잘 모르겠고..

아이리시스 2012-08-30 22:17   좋아요 0 | URL
저도 샤이닝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하면서도..맥거핀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기 때문에.. 어쨌든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건 아닌 걸로..

그건 어차피 상관이 없는 거니까요 :)

광대도 안 보러가실거면서 태풍온 날 어디가셨던 거예요?;;
제 생각에도 영화인(?)들은 정말로 광기가 있는 듯해요. 피프오는 사람들도 보면 저는 정말로..뭐..타지인들이 훨씬 많더라고요. 영화 보러 다른 도시 가는 사람은 많지만 저는 생각도 안해본 일이라서.. 아, 물론 칸에 가는 건 생각해봤는데..(뭐라는 건지..)

맥거핀 2012-09-04 16:36   좋아요 0 | URL
답글이 많이 늦었죠? 태풍도 다 지나가고, 9월도 오고 했는데, 여전히 비가 오네요. 최근에 이사하느라고 거의 며칠 다른 거 신경쓸 틈이 없이 지냈습니다. 일단 급한대로 서평단 추천도서만 올려놓고 다른 할 말들은 또 천천히 해야죠. 있다가 글 읽으러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