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2015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의 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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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2-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ㅊ ㅎ ㅎ ㄴ ㄷ

위에 쓴 것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조금 알아보게 쓰면,

ㅊ ㅜ ㄱ ㅎ ㅏ ㅎ ㅏ ㅂ ㄴ ㅣ ㄷ ㅏ

얼마전에 본 책에서 예전에 어떤 분이 우리말을 풀어쓰기로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더군요 첫소리 말만 쓰면 못 알아봐도 풀어쓰면 조금 알아볼 수 있죠 하지만 저것도 바로 알아보기 어렵죠 그때 우리말을 풀어쓰자고 한 사람이 많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났으면 안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우리말은 풀어쓰지 않고 모아써야 한다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두번 나온 말은 어떻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요 앞에서 나온 말인데 또 나왔네, 하는 생각밖에... 얼마전에 본 책에도 같은 말이 두번 나왔어요 한번은 A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들었고, 두번째는 A가 B한테 말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말 A한테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B한테는 맞지 않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A는 사람이지만, B는 사람 모습을 한 다른 생물이었거든요 실제로는 없는 동물이군요 A가 듣고 한 말은 사람에 대한 거였어요 A는 B도 자신과 같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A)가 그렇게 말해도 B는 너와는 달라’ 하고... 사람은 다 A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A가 한 말은(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한테 좋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B는 대체 뭐길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군요 무척 자비로운 동물 기린(麒麟 중국에서, 성인(聖人)이 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은 나중에야 그 일을 알기 때문에, B는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B가 뭔지 알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말이라 생각해요

처음 영화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본 사람의 놀라움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사실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그것을 실제처럼 느끼기도 했다고 한 듯한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거 아닌가 했잖아요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하는군요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군요 영화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무섭고 잔인한 것을 볼 수 있는 거겠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무엇이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떠오르네요 이것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거지만... 그런 사람은 영화를 현실로 느껴서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도 그런 사람 있을까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가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더 깊이 생각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지... 그것은 한 사람과 여러 사람에서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와 비슷한 문제네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쪽을 생각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들 때 많이 생각해야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3-02 11:05   좋아요 0 | URL
그냥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글입니다. 물론 그게 별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고, 감독이 별 생각없이 그런 대사를 넣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뭐 생각이야 누구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네..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고 하죠. 유명한 기차 얘기도 있구요. 현대의 관객들도 매체라는 것에 많이 길들여졌기는 하지만, 또 모르죠. 현대 관객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무엇인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3D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3D는 아직도 사실 초기단계라 봐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저도 예전에 3D를 처음 봤을 때(어렸을 때 대전엑스포에서 처음 본 걸로 기억하는데..^^)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일종의 비유겠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단 그게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기도 하죠. 흔한 말로 `경쟁`이라는 것 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 세상이 점점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권유하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죠. 그게 강한 자들은 편하니까요.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신경쓸 필요도 없죠. 무엇보다도 약한 자들끼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약한 자들은 뭉쳐서 강한 자에게 대응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강자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겠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점점 사람들을 수직계열화하고 사회를 점점 제로섬게임, 혹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식으로 만들고 있죠. 이 영화의 그런 장면도 이런 것들의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단지 비유여야 하는데, 그 비유가 점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죠. 무서운 세상입니다.

아..그리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뭐 이런 저런 긴 말보다는 축하해주셔서 감사하다, (지금까지) 여러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이 없네요.^^

넙치 2015-03-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봤는데 덧붙인 글이 흥미롭네요!
자본주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오싹함이..얼마전 생체이식 칩도 곧 도래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영화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닌지, 종말론적 비극이 떠오르네요, 저는.;;;

맥거핀 2015-03-06 00: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공짜를 좋아하면 안됩니다.ㅋ 라고 말을 하면서 아마도 영화 속 상황이었다면 저도 신나서 공짜유심을 받아 왔을 것 같아요. 사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점점 거의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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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는 1946년, 그러니까 스물한 살에 첫 소설 <제라늄>을 발표했고, 1964년,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죽기 직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책에는 총 3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단편집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전 생애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닌데,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하며, 어떤 필연적인 불균질성을 가지고, 그 불균질성이 읽는 이를 내내 건드리기 때문이다. 연보로 추측해 보건대 이 단편집의 순서는 작품 발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사실 이 소설의 창작년도, 혹은 발표년도가 없는 것은 이 단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어떤 묘한 흐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이야기는 처음의 실험적인 경향에서 점점 어떤 구체성을 가지며, 묘한 종교성은 점점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경우에는 그런 흐름도 흐름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인데, 그것은 번역가의 글대로 미국 남부 지방, 가톨릭 신앙, 루푸스병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의 흐름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먼저 편견,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과 인습으로 고착화된 어떤 나름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의 세계는 작고 편협해보이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견문을 넓히기 전의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그래서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으나, 기이하게도 그와 짝을 이루는 것은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있다. <인조 검둥이>의 헤드 씨와 그의 손자 넬슨, 혹은 <숲의 전망>의 포천 씨와 그의 외손녀 메리 '피츠' 포천, 아니면 그의 반대로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의 타워터와 노인). 즉 그들의 작은 세계는 작은 만큼 확고하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로 굴러가며, 그렇게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좋은 시골 사람들>의 선량해보이는 성경 파는 청년), 꺼림칙한 무엇의 형태이기도 하며(<가정의 안락>의 탕녀 스타), 때로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그린리프>의 황소), 때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변형물(<숲의 전망>의 메리 '피츠' 포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타자 그 자체, 예를 들어 <추방자>에서 유럽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 남부의 농장에까지 오게 된 영어를 못하는 추방자 귀작 씨와 같은 존재이다. 이 이질적인 타자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국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존재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고, 인물들은 그들의 균열되고 붕괴된 세계를 불편하게, 때로는 참담하게 마주 보거나, 최악의 경우 마주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당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마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세계가 균열된 후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그런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변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는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떤 균열과 봉합을 넘어서, 거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세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그 근본이 부정되거나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은 죽는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코너 소설의 종교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전 생애를 받치고 있었던 카톨릭 신앙과 그 신앙에서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정의 종교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지지 않은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예를 들어 육체와 욕망의 세계)를 죽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래너리 단편들의 인물들은 (비록 다시 태어남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물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전에 죽어야만 한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플래너리의 소설들에서 느낀 종교성은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형식에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가 가지는 특유의 어떤 묘한 무신경함, 무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은 독특한 텍스트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떤 특유의 무신경함이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를 볼 때 나오는 인간적인 정서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한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특유의 무심함이 있다. (혹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 보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떤 연대와 나눔의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사실성이 아니고, 다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도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무엇이 엿보이는데,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건들에서 한껏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무심히 기록하며 그 붕괴를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붕괴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사실 냉혹함 중에서도 더 냉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 더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운명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냉혹하게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없이 농장을 경영하는 여주인들(<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 <그린 리프>의 메이 부인 등)에서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의 농장에서 지냈던 작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혹은 글을 쓰려는) 인물들(<좋은 시골 사람들>의 조이/헐가, 혹은 <깊은 오한>의 애스버리, <파트리지 축제>에 나오는 캘룬이나 메리 엘리자베스)에서는 작가 생애의 어떤 부분과 겹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래너리 오코너가 가장 잔혹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위에 제시한 편견으로 가득찬 좁은 세계를 가진 이들보다 작품 속에서 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이 공명정대한 합리주의자들, 철학자들이다(도리어 좁은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편견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리성과 정의는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무엇으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결국 편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무엇의 형태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발사>의 레이버). 즉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이 소설을 읽는 자들(그러니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자들)에 필시 깃들 수 있는 어떤 내면의 아이러니를 불길하게 잡아냄으로서 계속 우리 곁에 어떤 이물(異物)로서 남는다. 아니 그것을 자처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불길하고 냉혹한 예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거울에서 낯선 누군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낯선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할 터이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낯선이의 방문을 실제로 받고, 먼 곳의 전지적 관찰자인 예언자는 무심하게 그것을 기록하겠지만. 그것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다.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 <심판의 날> (이 단편집의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문장)

    

  

덧.

 

1호선 지하철에서 이 소설의 중반부를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멀리서부터 멸치향을 풍기던 '멸치의 신'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세계의 실사판이었다. 그의 등장은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를 연상시켰으며, 퇴장은 그 소설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쿨했다. 거기에는 모종의 진실이 있었으며, 이 등장과 퇴장을 보며 나는 이 지하철의 세계도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농장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보다 더한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들은 결국 불길한 예언서들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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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2-1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멸치의 신이라는 것은 진짜 멸치 파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것인 듯하군요 처음에는 멸치 파는 사람인가 했습니다 이 말을 가장 처음 하다니... 단편 31편 읽기 힘들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느 한때 쓴 게 아니고 죽 쓴 것이니... 그런 걸 읽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없군요 어떤 느낌일지... 그것보다 작가를 생각하고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지금도 잘 못하고, 그 작가를 조금이라도 알면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할 텐데... 다르게보다는 작가한테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것만 알겠군요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굴러간다고 해도 그게 삶이라면 어느 순간 무엇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어느 날 그게 찾아왔을 때 아는 듯합니다(모를 때도 있을지도) 소설은 그런 것을 잘 보여주죠

어쩐지 이야기가 다 어두워보입니다 죽음이 꼭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면 살아가는 게 힘들지도, 반대로 그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신앙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요

맥거핀 님,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2-17 17:18   좋아요 0 | URL
어둡다, 밝다로 나눈다면 분명히 어두운 쪽의 이야기겠습니다만, 이 소설들은 독특한 지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그 마지막이 어떤 모종의 쾌감이랄까, 깨달음이랄까 같은 것을 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어떤 종교적 각성이랄까요.

플래너리 오코너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았고,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이 소설들에는 죽음에 대한 모티프, 그리고 그 동시에 어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무엇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우리의 죽음도 그 멀고 가까움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죠. 그런데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죽음이 아주 먼 곳에 있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무튼 위에 잠깐 썼지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 속 풍경은 우리의 삶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시대에도 심한 차별과 위선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요. 예전의 시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인류는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긴 연휴가 왔군요.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연휴지만,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니까.^^ 희선님 평안한 날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2015-02-24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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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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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오래도록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저멀리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몇몇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첫소설 <에투알 광장>, 혹은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외곽 순환도로> 같은 작품들, 그리고 이 소설 <지평>. 소설 <지평>에는 수많은 파리 거리 및 지명들의 명칭이 나온다. 콜리제 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로, 오페라 광장, 오퇴유, 센 가, 라지빌 가, 팔레 루아얄, 포부르 생토노레, 라 페루즈 가, 베르시 공원, 개선문...과장을 조금 보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만 펼쳐도 거리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수많은 거리나 지명이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실재하는 거리들은 이 소설에 있어서 무엇일까.

  

먼저 시간의 측면. 이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회상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p.9)"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회상은 늘 단속적이다. 회상은 대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전에, 늘 조각나있다. 모디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그리고 그는 그 깊은 암흑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들의 이름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p.10~11)" 이 작은 실마리들,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거리'이다. 보스망스는 먼저 거리와 장소를 떠올리고, 그 다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거리나 장소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보스망스는 길 이름과 건물 번지수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마르가레트 르 코즈, 혹은 그와 연관된 메로베, 페른 부부, 스튜어트, 시몬 코르디에..그런 인물들은 지금 그 곳에 없을지라도, 그 공간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푸트렐과 수상한 남녀들이 있던 블뢰 가 27번지 아파트에 이십 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찾아간다. 비록 그 곳에는 앙드레 푸트렐은 이제 없지만,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스무 명의 남녀가 잡혀가던 어떤 기억이. 그러니까 거리는 시간에 있어서는 일종의 지표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작은 지표, 혹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

 

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거리는 이중적이다. 거리는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광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그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거리에서 만나고, 거리를 걷고, 다시 거리에서 헤어진다. 그러나 거리는 만남이 시작되는 곳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보스망스에게는 그것은 빨간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아프간 코트를 입은 여자와 환속한 신부 혹은 가짜 투우사 모양의 남자라는 한쌍, 즉 만나기만 하면 돈을 요구하는 그의 부모이며, 마르가레트에게는 그것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맹목적으로 뒤쫓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이다. 즉 거리에는 그들이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마주쳐서는 안되는 것이 돌아다니거나 지키고 있다. 거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가레트의 아파트는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당신을 찾아낼 수 없(p.37)"는 공간이며, 보스망스의 부모는 이제 그의 집주소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다. 부모가 출몰하는 센 가를 피해다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위협하는 이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꿈 같은 회상이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이 이상하게도 더욱 꿈 속의 꿈처럼 느껴질 때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부모라고 부르는, 그러나 부모라고 느껴지지 않는 오십대 남녀 한 쌍. 그들은 보스망스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한껏 경멸감을 표출한 후 그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그들은 떠난다. 혹은 마르가레트를 쫓아다니는 부아야발. 예를 들어 마르가레트가 바게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아야발을 피하는 장면은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처럼 묘사된다. 부아야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이며, 그녀와 바게리안이 그를 떼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얼굴과 체격이지만 육중한 느낌을 주는 남자, 손가락 사이로 칼을 꽂는 유희를 즐기는 남자, 갑자기 증발하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남자, 과연 그는 실재하는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실재하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것의 은유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 보스망스의 부모는 그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p.40)" 노려보고 경멸감을 표출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어서 그들을 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준다. 또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은 마르가레트에게 묻는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p.128)" 이 경멸, 혹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요구. 때로 기억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스망스의 부모나 부아야발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억은 끈질기게 우리를 재방문하며, 계속 무엇인가, 우리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왔다. 부끄러운 무엇인가로부터 왔다. (너무 나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1960년대 중반의 파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과거(예를 들어 그의 부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를 말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트에게 독일인이냐고 묻는 그 질문의 무심한 긴장, 혹은 보스망스가 길을 걷다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무엇이 미안해? 응? 살아 있다는 것이? 같은 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과거라는 기억을 언제까지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내니까.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는 부끄러운 무엇인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부모라고 부르는 남녀 한쌍도 있지만, 마르가레트 르 코즈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은 일종의 거리와 같다. 위험하지만 그곳에 나가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리처럼, 기억에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 기억의 거리에 어떻게든 나가야만 한다. 안전한 기억의 골방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즉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대면해야만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보스망스가 부아야발을 찾아 그와 대면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바다를 뒤져 만나게 된 부아야발.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남자 부아야발이 아니다. 그저 늙고 잿빛 눈을 가진 부동산업자일 뿐이다. 기억 속의 부아야발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그를 혹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허물어진다.

  

무엇인가를 그렇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면하여 허물어야만 한다. 보스망스는 작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만이 반짝거리는 기억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기억들을 기꺼이 대면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허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그녀에게로 간다. 모든 것이 재건된 도시 베를린에 이제 그녀가 있다. 거리는 재건되었고, 이제 기억도 재건된다. 새 지평에.

  

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서 얼마간 그 건물 앞에 머물렀다. 햇빛이 따사로웠다. 거리는 고요했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인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래도 자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거리가 더 고요해지고 볕이 더 잘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저쪽 길 끝에서 마르가레트가 꼬맹이 페터-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그 녀석 -의 을 잡고 32번지와 그를 향해 걸어올지도 모른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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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2-0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간식을 먹나요? ... 리뷰 이제부터 읽을거지만 추천! 읽기도 전부터 좋을 것 같거든요. 지평 리뷰는 처음인데.. 좋나요?

맥거핀 2015-02-10 16:21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독특한 느낌이 들었어요. 모디아노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오후 4시 20분이네요. 생강차 같은 걸 갑자기 먹고 싶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시스 2015-02-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다닐땐가 여튼 어두운상점들의거리 예전에 한번 읽었는데 kbs책프로에서 노벨상발표나고 모디아노 다룰때 함정임샘 나온거 보면서 예전에도 김화영샘을 소개해줘서 읽었지하면서 다시 읽는데 주제의식이, 모호한 문체와 줄거리에 비해 너무 명확해서 토나올것 같았어요.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몇번이나 모디아노 신간을 마주해도 선뜻 손이 안 가요. 독특하죠, 막막하고. 파리는 헤매기 딱 좋은 거리인가봐요.
[새벽 1시 2분, 쌍화차는 안 마시고 싶나요?]

맥거핀 2015-02-13 18:47   좋아요 0 | URL
저는 누군가의 꿈을 헤집어 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것이 기억이고, 어떤 것이 실제이고, 또 어떤 것이 꿈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물론 어쩌면 그것이 `기억`이라는 것의 진실에 더욱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내 기억 속에도 예전에는 실제 겪었던 일과 내가 만들어낸 기억 사이의 어떤 구분이 있었는데, 그 구분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 모든 것이 그저 제 기억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새벽 1시는 차를 마시기 좋은 시간이죠. 저는 커피를 마시면 심각하게 잠을 못자서 커피를 먹어서는 안되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희선 2015-02-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와 여기 나오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에 나온 거리에도 가 보고 싶겠습니다 공간은 남아 있다 해도 오래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곳에 가면 옛날 일이 떠오르겠죠

아니 기억속 그곳은 그대로겠습니다

기억도 다시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 싫어도 떠올리고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렇게 해서 그때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잘 갔겠죠


희선

맥거핀 2015-02-13 18:52   좋아요 0 | URL
그래서 어떤 곳은 가기가 싫어요. 그 근처에만 가도 어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서 되도록 피하죠. 반면 어떤 기억 때문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도 있기는 한데, 저는 잘 그러지를 못해요. 왠지 그 곳이 없어져서, 그 없어진 것이 제 기억도 무너뜨리게 될 것 같아요. 보스망스가 아무래도 저보다는 용감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떤 기억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새로운 기억을 그것에 덮어씌움으로써 어디 한 구석으로 그 기억을 밀어버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예를 들어 컴퓨터로 (일반적으로) 파일을 지워도 실제로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잖아요. 단지 그 파일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하고, 그 위에 새 파일을 덮어 씌우는 거죠. 우리도 그런 식으로(사실은 컴퓨터가 인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반대겠지만) 기억을 덮어씌우는 거죠.
 
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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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난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조금 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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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읽었을 땐 무난하게 이해했었는데 중반부는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읽으면 읽을수록 수많은 고민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

맥거핀 2015-02-09 14:45   좋아요 0 | URL
네..저도 뒤로 갈수록 약간 이해력이 달리더군요. 특히 그 수식들 말입니다. 김수행 교수님이 나름 쉽게 푼다고 노력하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요. 재독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입니다.

희선 2015-02-0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공부가 들어가는군요 공부 많이 되었습니까 왜 공부가 들어가는가 했더니 다른 책 《자본론》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군요 무엇이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좋겠죠(아는 게 힘) 이렇게 말해도 공부 거의 안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기도 하네요

요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다 한번씩 하는 것이군요 새해가 되고 얼마 안 돼서 그런 건지도... 알 수 없는 말이군요

벌써 주말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2-09 14:49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의 사상에 동의하든 안하든 간에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은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 메커니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이것만이 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자본론]을 보면 더 좋겠지만, 지력이 딸려서...

읽으면 읽을수록 마르크스의 어떤 천재성에 감탄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그는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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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드물게, 무엇인가를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 처음에는 읽고 무엇인가를 써볼까..생각했지만, 읽다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누군가가 억지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는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처음 첫번째 장(章)을 읽으면, 읽는 사람을 이보다 더 힘들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더 힘들게 만들고, 그 다음 장은 그보다 더 힘들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는다는 사실이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질 즈음, 어느 틈엔가 그 읽는다는 의미의 어떤 숭고함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과 읽음으로써 그것을 지탱시키는 것의 의미 말이다. 아무튼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소설이다.

 

아마도 무엇을 말하기가 힘든 것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앞에 가로놓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것. 이 소설은 처음에는 하나의 어떤 실제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점점 인간 일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과연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한강 작가의 말대로 놀라울 정도로 잔인하거나 악한 인물이 있었고, 그 반대로 보기 드물게 선하거나,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려 애쓰던 이도 있었다. 인간이란, 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치는 그런 불투명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한석 평론가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비판론(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비판론이었다)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투명하게 영화가 될 수 없고, 영화도 투명하게 세상이 될 수 없으며, 양쪽은 영원히 그래서도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소설을 비롯한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가 투명해질 때 종종 실세계가 불투명함을 우리는 잊고,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세상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혼동하거나 쉽게 대체한다. 내가 밑에 올려놓을 몇 권의 책은 불투명한 상태로 내 앞에 놓여져 있지만, 그 불투명함이 이야기를 읽고 내려놓는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혹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어도 말이다.

 

 

 

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문학사상사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소설집이다. 시간을 가지고 진득히 챙겨봤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지. 어째 왠지 늘 그 이름이 그 이름인 것 같은 인상은 있지만, 그래도 이상문학상을 읽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한해를 시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휴전, 마리오 베네데티, 창비

 

군부독재, 도시 노동자, 염세주의와 숙명론,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낯설어 보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이 느낌. 나도 요새 자꾸 염세주의와 숙명론이 엄습하는데, 이 책이 조금 도움이 될까. 

 

 

붉은 밤의 도시들, 윌리엄 S. 버로스, 문학동네

 

반양장은 지난 달이고, 양장은 이번 달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작품은 유토피아 공화국 리베르타티아를 건설한 실존 인물 미션 선장에 영감을 받아,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저질러진 치명적인 실수들을 돌이키기 위해 탄생한 유토피아 소설이다.'라는 출판사 설명을 봐서는 내 취향에 딱일 것 같은데, 아마도 안되겠지. 안될거야.

 

 

상상범, 권리, 은행나무

 

예전에 '씨네21'인가, '한겨레21'인가에 연재되었던(아니면 비운의 만화잡지 '팝툰'에서였나..) 글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2322년 URAZIL의 세계라니, 재미있을 것 같다. 위에 건 유토피아, 이건 디스토피아.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한권. 로쟈님의 추천이나, guiness님의 추천을 봐도 그렇고, 추한 망나니의 '문학적 다큐멘터리'나, '기록문학'이라는 설명을 봐도 그렇고, 꽤나 흥미진진한 독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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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2-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그나저나 이번 달 도서나 빨리 읽어야겠다. 아직 두 권 다 하나도 못봤음!

희선 2015-02-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떤 답은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아야겠죠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군요 책, 거기에서도 소설(이야기)은 책을 읽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만은 아니기도 한데... 하지만 어떤 때는 거기에서 말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가르쳐주는 게 좋은 거죠 이런 건 맥거핀 님도 아실 텐데 말했네요

이번에 하나 배웠습니다 소설은 불투명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알 수가 없는 거지, 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것 때문이군요 불투명해야 나은 거군요

이상문학상은 벌써 39회째군요 저는 이거 예전에 아주 조금만 봤습니다 그때는 ‘나왔구나’ 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나오는구나’ 하고 책 앞면 예전하고 달라졌네, 했어요 전에도 조금씩 바뀌었네요


희선

맥거핀 2015-02-05 11:56   좋아요 0 | URL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 보는 이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다면, 단지 그것을 읽고 보고 치워버리고 말 뿐이겠죠.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이야기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군요. 그건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야기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것만큼 답을 찾는 노력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저는 대학 시절부터 거의 이상문학상은 사서 봤던 것 같아요. 뭐 아무래도 누군가의 눈을 거친 작품들이니까, 한해의 좋은 작품들을 편하게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표제작보다 다른 작품들이 더 좋았던 경우가 많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못탄게 좀 아쉽기는 한데..

아이리시스 2015-02-06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어서 읽어요~!! 새벽세시..에 화장실에 가나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5-02-06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집에선 컴터를 잘 안 켜서 새벽에ㅠ깨서 네, 스맛폰으로 뭐든지 합니다.. 댓글도 쓰고 아이러브커피도 아이러브파스타도..루미큐브도.. 안녕~!!

맥거핀 2015-02-06 12:50   좋아요 0 | URL
아..갑자기 무슨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데..새벽 세시 어쩌구 하는 소설이 있지 않았나요? 새벽 세시에 루미큐브 같은 거 하면 잠이 잘 안올텐데..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 근데 나 아직도 안 읽었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