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다 보면,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카메라와 인물들과의 거리다. 션 베이커는 적재적소에서 인물들과 카메라와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하며 그것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실 몇몇의 장면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카메라는 물러나 있고,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묘한 정서를 결정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들. 색색의 알록달록한 건물을 고정된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으면서 아이들이 화면 끝에서 반대쪽 화면 끝으로 줄을 지어 이동할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정서는 무력감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을 저 곳에서 끄집어내어 나올 수 없다는 무력감. 우리는 그저 멍하니 아이들이 화면 한 쪽에서 나타나 반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관객이 무력감을 느낄 만한 장면인 소아성애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바비(윌렘 데포)가 맨 처음 아이들 주변에 나타난 소아성애자를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에, 혹은 그보다도 훨씬 먼 거리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 때 바비가 떨어뜨린 페인트통이 관객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마음 속에서) 덜커덩 떨어지지만 그 때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바비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는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바비보다 더 먼 거리에 위치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짜의 환상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마지막이 온다.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달리고, 카메라는 이 때,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에 바싹 달라붙어 있다. (이 때 화면은 한껏 흔들리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아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이들을 따라서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들은 환상의 디즈니랜드로 들어가 화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성(아마도 아이들이 본 무지개 끝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정이 사는 성)을 향해 달리고 아이들에게 바싹 달라붙어 달리던 카메라는 어느 틈에 멈춰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이 장면은 환상이다. 아이들은 거액의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환상의 성이 위치한 디즈니랜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성을 향해 달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때 이 입장료는 누가 냈을까? 어쩌면 아이들의 뒤에 바싹 붙어서 달리던 당신이 낸 것은 아닐까?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돈이 없으면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돈을 구걸하던 아이들을 떠올려보라. 아이들은 지금까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화려한 건물들 앞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화면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면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나야만 했다. 잡으러 온 어른들을 피해 아이들을 무사히 성으로 들여보내고 카메라가 마치 이제는 되었다는 듯 조용히 멈춰서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 환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환상은 누구를 위하여 그 자리에 있는가?


션 베이커의 놀라운 점은 이 때 그것이 관객의 기만을 위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이 서 있는 위치와 영화 속 인물의 거리를 세밀하게 조정하며 영화를 이끌어가던 그는 이 마지막에서 명백한 환상을 제공하며, 관객에게 환상에 대해, 관객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아이들의 입장료를 냈습니까?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는 환상, 다시 말해서 멈춰서서 멋진 음악 속에서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는 당신을 보기 위해서 입니까.



덧.

이 장면은 묘하게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의 마지막에 있던 카메라의 위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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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1-0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이들이 디즈니랜드에 들어가는 돈을 내준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니... 환상이라 해도 아이들이 바라는 걸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금 나을 듯합니다 그런 게 자기 위안일 수도 있다니...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도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모르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한테는 더 못하죠 그래도 마음이 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 받을 수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도와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도 하죠 그게 아주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아주 어렵지 않으면 좋겠네요 스스로 일어설 수 있기를... 저도 그런 거 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9-01-09 11:06   좋아요 1 | URL
물론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입장료를 낸다는 것은 저의 환상이기는 합니다만, 영화를 보면서 가끔 느끼는 것은 보는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영화일수록,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요. 더 나아가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이유인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될 때가 있구요. 저는 여전히 보는 이들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만, 일단 그 불편함의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항상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에게 다행인 것은, 아직도 그들이 살아갈 날들이 많을 것이라는, 그래서 무엇인가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는 조금은 견딜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일을 포함해서 연말에 며칠 쉬는 동안, 몇 편의 영화를 보았다. 시간은 부족하고, 보아야 할 영화는 많았기에 가이드를 따르기로 했다. 가이드는 <씨네21>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화'(이제는 '작년의 영화')들. 리스트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라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아주 은밀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적어도 올해 나보다 영화를 훨씬 많이 본 평론가들이 선정한 리스트이므로 믿어보기로 했다.


그 중의 한 영화 신동석의 <살아남은 아이>. 영화를 보고 감독의 인터뷰 등을 읽어보니 감독은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 사건의 짙은 그림자를 느낄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건 말이다. 비어 있는 상태로, 아니 비어 있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아이의 방, 물에 빠져 죽은 아이, 그리고 빠졌지만 살아남은 아이, 보상금을 이야기하거나, 이제는 그만하자는 어떤 이들, 그러나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세월호 사건의 짙은 그림자를 느낀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어떤 것이 바로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


신동석 감독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쉬운 길은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가 죽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보여주는 것.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게도 영화적인 마술이고, 부려서는 안되는 마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고, 더 나아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아마도 영화는 이른바 '진실'을 이야기하는 기현(성유빈)의 진술을 그렇게 잘 들리지 않게 웅얼대는 톤으로 제시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불명확한 진술을 믿어야 할까? (영화 속에서 사실 기현의 말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아니, 나는 믿고 안믿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어떤 공백에 놓여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영화라는 것을 보는 한 우리는 결코 완전한 공백에 놓여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가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도 수많은 말들 속에서도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렇게 공백 속에 놓여져 있다. 그 공백 속에서 아이들 혹은 가족들을 놓아주어야 했던 이들에게 이 사회는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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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1-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 맥거핀님인 거야요@0@! 선물처럼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맥거핀 2019-01-02 16:59   좋아요 1 | URL
저에게는 이 댓글이 선물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나저나 벌써 2019년이라니...

2019-01-03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9-01-09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지났지만 맥거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직 음력으로는 새해가 아니니, 아주 늦었다고 말할 수도 없겠죠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는 감기 심하다고 해도 잘 걸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감기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많이 아팠던 건 이틀쯤이지만, 제가 어디 아파도 책은 읽는데 그때는 앉아있기도 힘들만큼 아팠어요 그런 게 며칠 갔어요 기침은 한주 넘게 하고... 기침을 오래해서 안 낫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기침하지만 심하게 할 때보다는 괜찮아요 지난달에 기분이 아주 안 좋아서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요

몸뿐 아니라 마음도 잘 챙기세요


희선

맥거핀 2019-01-09 10:58   좋아요 1 | URL
네 희선님 저도 인사가 늦었습니다. 좋은 일 많이 있는 새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프시지도 말구요. 사람이 아프다보면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 하게되고 그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최근에 감기가 심하지는 않는데 꾸준히(?) 낫지가 않네요. 희선님은 그러는 일 없이 평안한 날들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좋은 책 많이 보시고 좋은 생각도 많이 하시고, 좋은 글도 많이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s://seojae.com/web/cine21/cine21-546.htm

 

영화 <스윙걸즈>를 다룬 정성일의 10년도 더 된 이 글에서 몇 가지를 적당히 빼거나 넣으면 드라마 <땐뽀걸즈>의 평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땐뽀걸즈>는 <스윙걸즈>와 '걸즈'라는 공통점을 빼면 사실 그다지 비슷하지 않고, 정성일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에서 이 드라마는 꽤 벗어나 있기도 하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에는 동의할 수 있는데, 교복이라는 기호 혹은 안전장치를 끌어들임으로서 이러한 청춘영화나 청춘드라마는 이른바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멈추어도 괜찮은 장르'가 되었다는 점이고,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그런 것을 즐기는 핵심이라는 점이다.

 

다만, 이 드라마는 기존의 청춘드라마와 다르게 미세하게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제대로 한다면 소위 말하는 '모종의 성취'겠지만, 여전히 그 모종의 성취는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므로(더더구나 공영방송의 드라마라면) 어설픈 '반쪽짜리 성취'가 되고 만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스윙키즈>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종의 성취로 나아가려는 순간 무엇이 작동했는지 약간 이상한게 끼얹어지고 그만 반쪽자리 성취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반쪽짜리 성취마저도 불편하다고들 하니, 모종의 성취가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어쩌면 단지 스윙걸즈-땐뽀걸즈-스윙키즈의 이상한 끝말잇기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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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8-12-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 오랜만에 읽네요.

스윙키즈는 오래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집에 티비가 없어 저 드라마를 볼 수 없으니,
어떤 드라마일지 살짝 궁금하네요.

맥거핀 2018-12-28 10:44   좋아요 0 | URL
아..감은빛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뵈니까 반갑네요.^^

드라마 종영했어요. 저는 나름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종영도 빨리하고
시청률도 별로 안나와서 아쉽더라구요.

cyrus 2018-12-2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이 너무 뜸해서 일 년에 글 한 두 편 쓰는 컨셉으로 활동하는 줄 알겠어요.. ㅎㅎㅎㅎ

맥거핀 2019-01-01 16:48   좋아요 0 | URL
cyrus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컨셉은 아니고..이제 글쓰기에 미련은 버리고 여유 생길 때 조금씩이라도 끄적거릴려구요.^^
 

 

 

비교적 최근에 보게 된(이라고 밖에 쓸 수 없는 게 슬프다) 두 편의 영화는 아주 묘하게도 비슷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한 이창동의 <버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긴장. 혹은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내 안에서) 빚어내는 충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 <어느 가족>에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그렇게나 믿고 있는, 혹은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인물을 마주 대하게 만드는 후반부의 몇몇 신들은 (역설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보이면서) 보는 이들에게 카메라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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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3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맥거핀님의 영화리뷰를 자주 읽어보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맥거핀님의 영화리뷰의 매력은 ‘진지한 분석‘이에요. 8년 전, 영화리뷰가 활성화된 시절에 맥거핀님처럼 영화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너무 뜸하신 거 아니에요? ‘이달의 영화리뷰‘가 폐지된 이후로는 수준 있는 영화리뷰를 만나기가 어려워졌어요. 특히 맥거핀님의 빈 자리가 너무 큽니다.

맥거핀 2018-08-01 15:24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잘 지내시나요? 이렇게 오랜만에 흔적 남겼는데도,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cyrus님이 책에 집중하셔서 그렇지, 영화 리뷰도 마음먹고 쓰시면 잘 쓰실텐데요. 저는 사실 요새 영화를 많이 못봐서 쓰기가 힘들어요. 아니, 뭐 출퇴근 하면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뭔가를 작은 화면으로 보기는 하는데, 그거는 또 ‘영화‘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내용은 영화지만, 작게 끊어서 보는 것들은 또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결국 큰 화면으로 2시간 정도 ‘견디면서‘ 보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요?

저는 ‘수준있는 영화리뷰‘는 못 쓰지만, 예전에는 그런 영화리뷰를 쓰시는 분들이 조금 계시기는 했지요. 제가 알라딘에 이끌려 들어온 것도 그런 분들의 리뷰를 훔쳐보다가 그렇게 된 건데...그래도 책에서는 알라딘에 아직 좋은 리뷰 쓰시는 분들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cyrus님도 그 중에 한 분이구요. 저도 책을 살 때는 아직 알라딘의 리뷰를 많이 참고하고는 있답니다.^^

2018-08-04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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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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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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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6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