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다 보면,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카메라와 인물들과의 거리다. 션 베이커는 적재적소에서 인물들과 카메라와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하며 그것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실 몇몇의 장면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카메라는 물러나 있고,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묘한 정서를 결정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들. 색색의 알록달록한 건물을 고정된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으면서 아이들이 화면 끝에서 반대쪽 화면 끝으로 줄을 지어 이동할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정서는 무력감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을 저 곳에서 끄집어내어 나올 수 없다는 무력감. 우리는 그저 멍하니 아이들이 화면 한 쪽에서 나타나 반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관객이 무력감을 느낄 만한 장면인 소아성애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바비(윌렘 데포)가 맨 처음 아이들 주변에 나타난 소아성애자를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에, 혹은 그보다도 훨씬 먼 거리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 때 바비가 떨어뜨린 페인트통이 관객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마음 속에서) 덜커덩 떨어지지만 그 때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바비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는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바비보다 더 먼 거리에 위치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짜의 환상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마지막이 온다.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달리고, 카메라는 이 때,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에 바싹 달라붙어 있다. (이 때 화면은 한껏 흔들리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아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이들을 따라서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들은 환상의 디즈니랜드로 들어가 화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성(아마도 아이들이 본 무지개 끝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정이 사는 성)을 향해 달리고 아이들에게 바싹 달라붙어 달리던 카메라는 어느 틈에 멈춰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이 장면은 환상이다. 아이들은 거액의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환상의 성이 위치한 디즈니랜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성을 향해 달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때 이 입장료는 누가 냈을까? 어쩌면 아이들의 뒤에 바싹 붙어서 달리던 당신이 낸 것은 아닐까?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돈이 없으면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돈을 구걸하던 아이들을 떠올려보라. 아이들은 지금까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화려한 건물들 앞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화면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면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나야만 했다. 잡으러 온 어른들을 피해 아이들을 무사히 성으로 들여보내고 카메라가 마치 이제는 되었다는 듯 조용히 멈춰서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 환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환상은 누구를 위하여 그 자리에 있는가?
션 베이커의 놀라운 점은 이 때 그것이 관객의 기만을 위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이 서 있는 위치와 영화 속 인물의 거리를 세밀하게 조정하며 영화를 이끌어가던 그는 이 마지막에서 명백한 환상을 제공하며, 관객에게 환상에 대해, 관객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아이들의 입장료를 냈습니까?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는 환상, 다시 말해서 멈춰서서 멋진 음악 속에서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는 당신을 보기 위해서 입니까.
덧.
이 장면은 묘하게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의 마지막에 있던 카메라의 위치를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