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지하철에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어쩌면 이 첫문장을 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도대체 어디로 하기에, 3편이나?


아니, 그 3편의 영화를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에 실린 3편의 리뷰. 사실 지하철에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영화는 절대적으로 사이즈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상황에서 보는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그것은 그 영화를 싫어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은 화면으로, 게다가 안좋은 화질로 본 어떤 영화를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영화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내가 서두에서 일종의 낚시질을 한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허문영의 글들이 적어도 영화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쓴 3편의 영화를 사실 아직 모두 보지 못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예고편 등으로 짧게 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영화의 일정 부분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실 그의 묘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이미지화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의 영화(장면)를 보는 것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 스크린은 이미지화되어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봐도 다르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이미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생생해진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미지가.


허문영은 계속 질문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문의 빈도라기보다는 사이즈다. 허문영이 묻는 것은 어떤 장면의 의미나, 그 장면이 소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장면이 불러오는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이다. 혹은 그 장면이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영화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그 질문들은 점점 커져, 거의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특히 오늘날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폭력 이미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혹은 영화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는가, 혹은 넘어서려고 애쓰는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고작 영화따위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허문영은 일단 벽을 먼저 세우고는 그 벽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벽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진다. 어느 틈에 가면 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인지, 그 벽을 더 단단하고 거대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순간이다. 거대한 질문과 작은 답, 혹은 거대한 질문에의 도전. 그리고 예정된 실패.


개별 영화들을 다룬 2부보다, 영화의 윤리라는 거대한 질문에 도전한 잡문 성격의 1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답을 찾아서 제시하려는 욕망. 나는 당신보다 이 영화에 대해 이 만큼 더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말해줄께,라는 식의 소아적인 욕망. 그래서 질문은 자신이 답을 낼 수 있도록 늘 빈곤해지고, 유혹에 쉽게 흔들린 글들은 이제 영화가 아닌 것을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닌, 자신이 본 영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p.7)


그래서 그는 예정된 실패를 알지만, 거대한 질문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은 계속 볼 수밖에 없다. 계속 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계속 배반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본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허문영은 말한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p.247)."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영화'이다.



덧.

그래서 물론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이 3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배반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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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2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4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기 힘든 이야기이다. 부서지려고 하는 것들, 혹은 이미 부서진 것들, 그리고 부서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계속 부서져나가는 마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명확한 답이 없는 이야기, 그러나 어떻게든 그 답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


김일란, 이혁상의 <공동정범>을 보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두 개의 문>에 이은 용산참사를 다룬 연작선상에 서 있는 다큐.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은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지 25시간만에 이례적으로 이른 진압을 시도하였고, 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지은 망루가 불타오르며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이후 수차례 재판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화재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이를 시위자들의 화염병에 의한 것이라 단정짓고, 망루에서 탈출하여 생존한 전원을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기소하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영화 <공동정범>은 그 '공동정범'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이 '공동정범'들의 위치는 사실 특별하다. 그들은 (경찰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 법집행의 정당한 권리를 방해한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동료를 잃은 이들이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살아남은,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인 이충연 씨는 참사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내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까?


그들은 차례로 고백한다. 예를 들어 생존자들 중에 한 명인 김주환 씨를 괴롭게 하는 기억은 경찰이 가깝게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시너를 뿌리던 기억이다. 내가 시너를 뿌리지 않았다면 피해가 적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발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경찰과 검찰도 이를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들의 기억은 분절되어 있고, 심지어는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그 순간 살기 위해 애쓰던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제목 '공동정범'은 중의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건의 핵심, 그러니까 발화의 책임은 여전히 비어(空洞)있다.


이야기의 한 축이 이것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바로 그 '共同'이다. 너희 모두가 그 사건, 혹은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떤 사건이든 책임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억울하고,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억울하다. 누군가는 사건 이후 서로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보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한다. 그들을 '공동정범'으로 만든 그 방식의 효과가 그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보는 것은 힘들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감독은 다큐인 이 영화에 극영화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을 것이다.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 더구나 이러한 내용의 영화라면 그것을 계속 보고만 있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을테니. 그것을 일종의 플롯의 구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텐데, 주인공과 주인공에 대립되는 인물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플롯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인터뷰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일종의 플롯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출소 이후 홀로 견디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인터뷰 뒤에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충연 씨의 모습을 붙인다거나, 아니면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만 말할 수는 없다는 인터뷰 뒤에 붙는 장면들을 보면 마치 극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이는 사실 <두 개의 문>에서부터 이어진 기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썼던 <두 개의 문> 리뷰에서 이것의 어떤 위험성을 말한 바 있고, 이 <공동정범>에서도 여전히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지만, 반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감독은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플롯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대립항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들, 다시 말해서 링 위에서 싸우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을 링 위로 올려놓은 자들. 그들의 싸움에 열광하는 군중들 뒤에서 거액의 파이트머니를 챙기는 프로모터들. 영화라는 것이 가치가 생기는 지점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즉 영화는 당연히 그들의 싸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링 가까이에서 즐기는 군중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 안에서 즐기는 군중들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결코 프로모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밖에 서 있는 우리들은 환호하는 군중의 얼굴을 봄으로써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중의 하나는 환호하는 군중의 머릿수와 입장료를 곱한 거액의 파이트머니이고, 더 나아가 그 파이트머니의 상당수를 챙길 그 링에 그들을 올려보낸 프로모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 질문은 이렇다.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 있는 욕망은 누가 보아줄 것인가.


용산에서 2009년 사람이 죽었고, 건물이 무너졌다. 버려진 공터는 한동안 주차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쇼핑센터가 들어선다고 한다.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대통령이었던 누군가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는 공동(空洞)이 있고, 그 공동은 욕망들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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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1-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보기 힘든 영화일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 보지 못했어요.

[두 개의 문]은 정말 괴로운 마음으로 보았어요.

역시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9-01-17 14:0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상으로 힘든 영화임은 틀림이 없죠. 그런데 단지 영화적으로만 말한다면 꽤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잘 짜 놓았거든요. 물론 여기에 ‘재미‘라는 말을 써도 될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든 보아달라, 라는 메시지가 느껴졌어요.

2019-01-21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4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자 모든 문학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는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에 위대한 미술가 도레가 영혼을 실어 만든 135점의 삽화를 곁들인 이 책은 성경에 견줄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라는 문구에는 별로 동하지 않으나, "500부 한정 부수로 특별 제작했다."라는 문구에는 마음이 움직이니 이게 바로 일종의 길들여진 효과인 걸까. 물론 22만 5천원의 압박이 손을 떨리게 하는 것도 사실. 아니, 312페이지에 225,000원이니 페이지당 1000원이 안되는 저렴한 가격이라고 생각할 수도..물론 이건 자체 길들이기.


크기를 궁금해하는 분이 있을까 싶어서 가지고 왔다.


출처: 한길사 블로그



덧.

그리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단테의 <신곡> 지옥편 디지털 체험 버전. 야..이거 정말..

https://www.alpacaprojects.com/inferno/en/

(우측 하단에 Start 버튼을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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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oo 2019-01-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 확인해 봤네요. ㅎㅎ

맥거핀 2019-01-09 14:53   좋아요 0 | URL
22500원의 오타가 아닙니다.^^

cyrus 2019-01-0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비싸지만 저 정도 책이면 소장할 만하죠. 그런데 책 앞표지에 있는 단테의 표정이 좀.. (말잇못)... ㅎㅎㅎㅎ 책 안 사면 삐질 표정.. ㅎㅎㅎㅎ 저거 말고 더 좋은 단테의 초상화가 있는데 왜 하필 저걸 골랐는지 의아하네요... 저 그림도 도레가 그린 건가요? ^^;;

맥거핀 2019-01-10 11:46   좋아요 0 | URL
네. 도레가 그린 단테의 초상인 것 같아요. 찾아보니까 예전에 외국에서 출판된 책들도 저 그림을 쓴 것 같네요. 지옥과 연옥, 천국을 거치려는 단테의 나름 단호한 의지(?)가 반영된 그림 같기도 하고요.ㅎ

희선 2019-01-1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만들었다가 다 팔리지 않으면 안 좋을 테니 500부만 만들었나 보네요 비싼 건지 싼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신곡》 사두었는데 아직도 못 봤습니다 그 책 언젠가 볼지... 보면 달라질지... 책을 봐도 그렇게 달라지는 것도 없네요 어떤 책을 봤더니 아주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일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번도 없을지도 모르죠


희선

맥거핀 2019-01-11 10:25   좋아요 2 | URL
뭐 근데 이런 책은 어차피 사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어서요. 500부도 다 팔릴 수 있을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합니다만..신곡은 지옥편은 재미있어요. 연옥에서 천국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재미가 많이 없어지기는 합니다만..아마도 극사실주의적인 반영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아무래도 재미는 지옥쪽에..

비로그인 2020-02-18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쇄물인데 비싼거죠... 흠~

맥거핀 2020-02-18 17:41   좋아요 0 | URL
비싸긴 하죠. 반어법으로 생각해 주세요~^^

비로그인 2020-03-0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ukei] !! Good luck to you!
 


방금 전 모 영화에 대한 평을 보고 싶어서 간만에 들른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서 본 지난 주 '가장 많이 추천된 리뷰' 목록. 제목만으로도 느껴지는 ㅎㄷㄷ한 기운들. 심심할 때마다 네이버에 짧은 글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바로 포기하게 만든다. 새해가 들어와도 여전히 변하는 건 없구나.


아..그리고 새해가 들어와도 변하지 않는 것 한 가지 더. 알라딘은 제발 그넘의 굿즈 만드는 데에 들이는 노력의 몇 분의 일이라도 서버에 신경 좀 쓰세요. 앱에서 서재 들어올 때마다 페이지는 어찌나 그렇게 늦게 뜨는지, 페이지가 뜨는데 버벅거리니 읽고 싶은 글들은 제대로 눌러지지도 않고...툭하면 페이지는 뻗기 일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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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1-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제 폰에 문제인줄... ^^;;

맥거핀 2019-01-10 11:4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앱에서 서재 글 읽기가 참 힘들어요. 서버 자체가 느리니 글들이 뜨는 속도가 늦고 그러다보니 클릭이 제대로 안되죠. 서버 문제는 참 몇 년이 지나도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개선의 의지가 없나 봅니다.

Shining 2019-01-1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보기 너무 불편하고 전 쓰는 것도 못지않게 불편한 것 같아요. 알라딘이 (제 기억으론) 서재와 페이퍼로 회원을 모은게 아니었나요? 요즘엔 글쓰기 앱이나 사이트도 많이 등장했는데 그에 비하면 알라딘 인터페이스는 여전히 올드하고 불편하네요. 이미지 하나 넣기도 번거롭고 이미지 편집하긴 더 귀찮고요ㅠㅠ 물론 글 자주 안 쓰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나마 전 네이버가 더 편해서 더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새해 되어서 맥거핀 님 자주 만나니 좋네요! 작년에 제가 착하게 살아서인가봐요!!(히히히)

맥거핀 2019-01-11 10:3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제가 착하게 살아서 샤이닝님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임.
알라딘이 뭐 솔직히 서재를 거의 반방치한지도 오래되었죠. 서버도 그렇고, 말씀하신 인터페이스도 뭐 말할 것도 없죠. 네이버 쓰다가 여기 쓰면 정말 화가 날 지경. 그래도 저는 네이버에 잘 안 가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네이버에도 샤이닝님을 비롯하여 정말 좋은 글들을 쓰시는 분들도 많죠. 근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가끔 정말 말도 안되는 글들도 보게 되니...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인 건지..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다 보면,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카메라와 인물들과의 거리다. 션 베이커는 적재적소에서 인물들과 카메라와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하며 그것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실 몇몇의 장면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카메라는 물러나 있고,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묘한 정서를 결정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들. 색색의 알록달록한 건물을 고정된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으면서 아이들이 화면 끝에서 반대쪽 화면 끝으로 줄을 지어 이동할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정서는 무력감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을 저 곳에서 끄집어내어 나올 수 없다는 무력감. 우리는 그저 멍하니 아이들이 화면 한 쪽에서 나타나 반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관객이 무력감을 느낄 만한 장면인 소아성애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바비(윌렘 데포)가 맨 처음 아이들 주변에 나타난 소아성애자를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에, 혹은 그보다도 훨씬 먼 거리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 때 바비가 떨어뜨린 페인트통이 관객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마음 속에서) 덜커덩 떨어지지만 그 때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바비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는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바비보다 더 먼 거리에 위치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짜의 환상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마지막이 온다.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달리고, 카메라는 이 때,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에 바싹 달라붙어 있다. (이 때 화면은 한껏 흔들리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아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이들을 따라서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들은 환상의 디즈니랜드로 들어가 화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성(아마도 아이들이 본 무지개 끝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정이 사는 성)을 향해 달리고 아이들에게 바싹 달라붙어 달리던 카메라는 어느 틈에 멈춰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이 장면은 환상이다. 아이들은 거액의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환상의 성이 위치한 디즈니랜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성을 향해 달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때 이 입장료는 누가 냈을까? 어쩌면 아이들의 뒤에 바싹 붙어서 달리던 당신이 낸 것은 아닐까?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돈이 없으면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돈을 구걸하던 아이들을 떠올려보라. 아이들은 지금까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화려한 건물들 앞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화면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면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나야만 했다. 잡으러 온 어른들을 피해 아이들을 무사히 성으로 들여보내고 카메라가 마치 이제는 되었다는 듯 조용히 멈춰서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 환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환상은 누구를 위하여 그 자리에 있는가?


션 베이커의 놀라운 점은 이 때 그것이 관객의 기만을 위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이 서 있는 위치와 영화 속 인물의 거리를 세밀하게 조정하며 영화를 이끌어가던 그는 이 마지막에서 명백한 환상을 제공하며, 관객에게 환상에 대해, 관객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아이들의 입장료를 냈습니까?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성 안에 들여보내는 환상, 다시 말해서 멈춰서서 멋진 음악 속에서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는 당신을 보기 위해서 입니까.



덧.

이 장면은 묘하게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의 마지막에 있던 카메라의 위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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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1-0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이들이 디즈니랜드에 들어가는 돈을 내준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니... 환상이라 해도 아이들이 바라는 걸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금 나을 듯합니다 그런 게 자기 위안일 수도 있다니...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도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모르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한테는 더 못하죠 그래도 마음이 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 받을 수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도와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도 하죠 그게 아주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아주 어렵지 않으면 좋겠네요 스스로 일어설 수 있기를... 저도 그런 거 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9-01-09 11:06   좋아요 1 | URL
물론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입장료를 낸다는 것은 저의 환상이기는 합니다만, 영화를 보면서 가끔 느끼는 것은 보는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영화일수록,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요. 더 나아가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이유인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될 때가 있구요. 저는 여전히 보는 이들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만, 일단 그 불편함의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항상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에게 다행인 것은, 아직도 그들이 살아갈 날들이 많을 것이라는, 그래서 무엇인가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는 조금은 견딜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