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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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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