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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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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선셋 리미티드>는 코맥 매카시의 몇몇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카운슬러> 같은 것. 희곡이라는 이 책의 형식도 그러하지만(물론 <카운슬러>는 '시나리오' 형식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지만), 그 내용상에서도 통하는 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이 백에게 하는 일종의 카운슬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운슬러>의 모든 카운슬링과 마찬가지로 이 카운슬링은 결국 실패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책소개에 있는 설명대로 작품 <로드>이다. 그 설명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 작품들은 '서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작품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심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물론 이 설명으로는 조금 어렴풋한 감이 있다. 무엇인 '인간의 운명'인가?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선셋 리미티드>에 나온 질문을 <로드>의 이야기로 치환해보자. <로드>의 세계. 모든 것이 이미 끝장나버린 세계의 어느 끝자락,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곳, 살육과 약탈과 폭력이 있는 곳. 그곳을 남자와 소년이 걷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길, 그러니까 '로드'를 걷지만, 그 '로드'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 길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왜 이 '로드'를 걸어야만 하지. 왜 불을 운반해야만 하지. 그러니까 그 '불'을 왜 걸음으로써 지속시켜야만 하지.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토록 괴로운데. 모든 것이 끝장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질문.

 

그 질문은 백의 질문이다. 그는 끝났음을 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안다. 이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p.133)" 그러므로 그가 택한 것, 즉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달리는 급행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결말을 조금 더 빨리 당기는 것에 불과하며,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흑이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그는 백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백과 대화함으로써 어떻게든 이 죽음을 막으려고, 혹은 가능할 때까지 지연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은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죽으려고 하는 자와 살리려고 하는 자.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독자는 심정적으로는 살리고자 하는 쪽에 서려고 할 테지만, 그 처해있는 위치는 흑보다는 백의 위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즉 일부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책을 집어드는 독자라면 흑보다는 백에 아마도 조금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은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삶의 조건이나 삶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과 같은 경험이 없다. 그처럼 누군가를 죽인 후 교도소에 들어가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일 뻔하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은 없다. 그보다는 우리 대다수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하며, 가끔 통근열차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는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니, 우리라고 하지 말자.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래서 처음에는 백에 조금 더 무게를 두면서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책이든 영화든 어떠한 이야기든 적어도 의지할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완전히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대체로 어느 한 쪽에 필연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것은 글을 읽는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야기의 내용상으로 보면 처음에는 흑이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배경적인 측면, 즉 흑이 백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이야기를 하는 이곳이 흑의 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흑이 백을 대하는 어떤 어투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 흑이 대화하는 방식을 보면 약간 익살을 섞어서, 혹은 약간 장난을 섞어서 말하는 듯한, 즉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어떤 흑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대화에서 흑이 어떤 결정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살고자 할 것이라는 오랜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그가 아무리 죽는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어쩌면 위악의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혹은 믿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산산이 부서진다. 백의 죽고자 하는 의지는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흑은 백이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서도 이를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흑은 백이 결국 거리로 다시 뛰쳐나간 후에도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p.138).

 

다시 말해서 코맥 매카시는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기울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읽는 이를 카운슬링을 받는 위치에 놓고 카운슬링에 조금씩 동조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적어도 나는 백이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신호로 봤다), 그 카운슬링이 산산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를 그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쇠사슬을 풀고 다시 죽으러 나간 백의 입장에 설 수도 없지만, 그것이 단지 그의 진심이 아닐 거라며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흑의 입장에 설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양쪽 어느 입장 중의 하나에 동조해야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코맥 매카시가 직관적인 구조로 파놓은 덫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비슷한 얘기를 코맥 매카시는 <카운슬러>에서도 했다. 카운슬링들이 계속 실패하는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 '카운슬러'가 살려고, 혹은 그의 여자친구를 살리려고 발버둥 칠 때, 코맥 매카시는 잔혹하게도 어떠한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시도는 혹은 모든 카운슬링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카운슬러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코맥 매카시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삶의 편으로 돌려놓는다. 아니 그것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스러운 이야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카운슬러'에게는 더욱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그렇고, 한 마디 집약된 대사로서도 그렇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코맥 매카시는 늘 그런 것을 그려왔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

 

다시 말해서, 흑은 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흑'과 '백'이라는 이 구분법도 한편으로는 이 대척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그것은 '흑인'과 '백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극단으로서 '흑'과 '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듯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백이 죽음의 목소리에 투항하려고 한다면, 흑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종교에 투항함으로서 버텨낸다. 그들은 고통없는 삶을 원한다. 흑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며,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 백은 고통을 주는 그 자체, 즉 자신의 삶을 끝장냄으로서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백이 하필이면 '선셋 리미티드'를 자살도구로 택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가 통증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삶을 끝내주기 때문에 그것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맥 매카시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었다.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지속시켜야 하는 삶. 그것은 통증 없는 죽음을 선택해 끝내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카운슬러의 삶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용감한 일이라고 믿는 삶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이 이야기도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행복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쉽게 끝내야만 하는 것도 아닌, 고통 속에서 지속해야 하는 삶. 그것에 가치가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쓰지 말자. 다만 나는 그것을 이름붙여본다. 그것은 회색의 삶이라고. 그냥 가는, 가야만 하는 회색의 삶.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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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2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을 드리기는 했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희선 2015-03-2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용감한 일이었다고 하다니... 그 소설 속에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읽어본 건 아니고 대충 어떤지만 알고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 대단한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그곳과 좀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아주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희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습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도 그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나는 저런 데서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예요 어떤 형편에 놓이든 살아가는 모습 자체를 보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살아야겠구나 할지도... 어떤 소설을 보고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잘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래도 그 사람들 살아가더군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용감한 것은 사는 걸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군요 살아가는 데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피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겠죠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데... 괴로움과 함께 살아야겠네요 하지만 그게 아주 무거운 사람도 있겠군요 그런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희선

맥거핀 2015-03-30 18:37   좋아요 0 | URL
어떤 작가든 읽는 사람이 괴로워하면서만 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괴롭고 힘든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인간이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겠죠.

뭐 그런 식으로 자기위안을 한다고 해도 사실 코맥 매카시 소설들은 읽기에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아요. 특히 <로드>같은 소설은 말이죠. 영화도 있던데, 저는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군요. 언젠가부터 보고나서 힘들 것 같은 영화는 슬슬 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억지로라도 보고는 했었는데..

말씀하신대로 삶이 더 힘든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죠, 영화를 힘들 것 같아서 피했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일 겁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할 수 있을지..소설이나 영화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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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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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리모노프>에는 본명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 나중에는 리모노프라고 불리게 된 사내가 그의 필명 '리모노프'를 스스로 짓는 짧는 일화가 나온다. 이 '리모노프'라는 말은 레몬을 뜻하는 '리몬'과 수류탄을 뜻하는 '리몬카'에서 복합적으로 유래한 것인데, 이는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라는 부연설명이 나온다. 레몬과 수류탄,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물체의 기이한 결합(바로 표지에 있는 이것). 재미있게도, 아니 필연적이게도 이 리모노프의 삶, 혹은 그의 사상은 그의 이름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그의 사상, 그리고 그의 사상을 반영한 그의 삶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었고,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어우러짐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것을 이에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러시아의 노동교화 수용소인 엥겔스 강제 수용소의 주철 배관 위에 광택 스테인리스 세면기를 얹어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디자인한 수용소 세면대가 그가 출판사 편집자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필립 스탁이 실내 디자인을 맡았다는 뉴욕의 한 호텔에서 봤던 세면대와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아니면 이런 것.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한꺼번에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뭐 라도반 카라지치와 피델 카스트로라고 해도 상관없다). 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에서 수많은 독일과 소련의 젊은이들이 이유를 모르고 죽어갈 때,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각각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던 두 사람을 동시에 말이다.

 

그런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에는 분명히 어떤 눈에 띄는 공통점들이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공통점이 콧수염의 특이성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분명히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뭐 어려운 얘기할 것 없이 예를 들어 레몬과 수류탄처럼 말이다. 이것들은 불리는 발음('리몬'과 '리몬카')이 비슷할 뿐더러 길쭉한 타원형의 생김새도 그렇게 심하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것처럼 보이는 리모노프의 사상과 삶에도 적어도 모종의 일관성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일 것이다.  

 

리모노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세면대에 얽힌 일화를 별생각 없이 재밌게 듣고 나서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메시지가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찾고 싶어 나는 이 책을 시작한다. (p. 38)

    

적어도 내가 보는 리모노프에게는 그것 중의 하나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혹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로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무모했던'이라고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이 매우 부족한 묘사처럼 보이는 작가로서 대접받기 이전의 그의 젊은 시절의 삶에서 그를 계속 추동하는 가장 큰 욕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이 밑바닥에 떨어져있는 상태가 나의 삶을 기록한 책에서 가장 마지막 장인가, 아니면 그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장식하는 적당한 일화의 하나인가. 그는 말 그대로 그것이 자기 삶의 마지막 장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거렸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해준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앞의 세면대 일화에 등장하는 그 두 가지는 그런 면에서 통한다. 유명한 작가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혹은 유명한 정치범으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그에게는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에게 가혹할 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일종의 기회주의자처럼 비치게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기회주의자이며, 그는 단지 주어진 기회를 남들보다 더 재빠르고 확실하게 움켜잡는 것에 능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과연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아니, '자신의 삶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와 같은 <좋은 생각>에나 실릴 법한 듣기 좋은 소리 빼고 말이다. 누구나 한때는 수많은 조연과 단역이 스쳐지나가는 주인공과 같은 삶을 상상하지만, 그것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알아차리는 척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회들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혹은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기회들을 놓치고, 기회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운이 좋아 기회에 올라타지만, 그것이 자신이 믿은 '기회'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도 서서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기 시작한다. 물론 리모노프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이해할 수 없지만, 국내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의 차별은 이해한다(이 워딩은 그저 내 짧은 머리로 나온 '워딩'일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이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 짧은 워딩에는 수많은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어쩌면 짧은 워딩으로 쓰기에는 적절한 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p.246)"라는 말과 연관되는 논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와 같은 어떤 이질성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리모노프의 탓이 아니듯, 그것은 우리의 탓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명확해 보이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어떤 가치관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리모노프와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비슷한 면이 있으며, 그것을 어떤 현대인들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리모노프는 그것을 단지 극단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마무리이다.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는 책을 마무리짓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리모노프를 찾아간다. 몇 시간의 인터뷰를 계획했지만, 질문은 금방 동이 나고, 그는 리모노프에게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물을 것이 없는 삶. 그것이 불러오는 어떤 아이러니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리모노프와 그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재미있다. 리모노프는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굳이 나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저자는 진심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으며,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이라고. 그러자 리모노프는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린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그것을 저자의 아들 가브리엘은 정리한다. '루저'같은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타공인 루저, 리모노프.

 

그것을 저자의 포장대로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 어느 이름 복잡한 도시의 사원, 높은 담장 및 그늘에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이가 빠지고, 상당수는 눈도 없는 그을린 얼굴을 가진 노인 걸인들의 삶.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 넝마를 걸친 걸인들, 나이도 재산도 이름도 알 길이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왕들. 이 비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보인다. 어떤 삶이든, 자타공인 루저라고 판명난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것이 아닌 작가이자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풍운아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저 평범한 우리의 삶이든,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어떤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없기 때문에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그 동등함에 대해서 말이다. 동등하지 않다고? 다르다고? 글쎄.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렇게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발버둥쳤던 리모노프의 이름을 당신은 이 책을, 혹은 이 리뷰를 읽기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아병적으로 말하건대, 적어도 나는 처음 들었다. 아니면 이 책 뒤에 실린 이 광고는 어떨까. "이름도 낯선 이 사내의 삶을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 텔레그래프. 리모노프는 분명히 이 광고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덧1.  

책이 재미는 있지만, 참 진도는 안 나간다. 나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계속 어떤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마 이 책의 독특한 형식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즉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가 실존인물 리모노프가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저서와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기록하면서 그에 덧붙여 저자 자신의 삶과 자신의 짤막한 논평 아닌 논평을 붙여나가면서도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구조 말이다. 예를 들어 간략한 이러한 질문.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가.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창작된 허구이며, 혹은 창작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카레르가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리모노프 자신이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어디까지가 리모노프 본인이고, 어디까지가 저자가 보는 '만들어진 리모노프'인가, 혹은 저자가 만들어낸 리모노프에 의해 우리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차적 리모노프'인가. 물론 누군가(기억이 안난다)의 말대로 '모든 기록은 기록하는 자를 같이 기록하기 마련'이어서 이 기록에서 저자 카레르를 완전히 분리하여 순수한 리모노프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카레르는 이를 끝내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씨네21>에서 인공위성을 혼자 쏘아 올리려고 하는 송호준('라스'에 나왔던 그 사람이다)을 다룬 다큐 <망원동 인공위성>을 보고 나온 이미랑 영화감독이 말한 '육체적 고됨'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타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적인 윤리적 질문이 육체적 고됨으로 변형되어 감독과 찍히는 피사체인 송호준을 통해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이야기 역시도 읽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기록하는 자의 '선의'를 믿는 것이지만, 그의 '선의'를 믿기에는 그의 태도는 상당히 모호한 면이 있다. (여기에는 저자의 어떤 '묘한 열등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무튼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그 열등감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2.  

아무튼 그래도 재미는 있다(재미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다). 특히 리모노프를 통해 보는 러시아적인 것의 어떤 면모들 말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각 같은 것들이나 과격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의 면모 같은 것을 소개하는 부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러시아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던 E.H.카의 시도와 비슷하달까(재미있게도 이 책에는 리모노프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글과 비슷하다는 뭇사람들의 평도 나온다). 한편으로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의 말로 대변되는 이른바 '러시아 공산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던 서구 지식인들의 시각이 어땠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그 시각은 내 저럴 줄 알았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와 같은 일종의 고소함이 반영된 시각과 어떤 안타까움들이 공존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고르바초프를 마치 얼뜨기 같이 묘사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얼뜨기들은 우리를 우습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웃거나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얼뜨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런가. (어렸을 때 TV에서 고르바초프를 무슨 위대한 인물처럼 소개한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하긴 당시 그는 우리나라에서 위인전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리모노프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러시아라는 사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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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모노프 이름 처음 들어봅니다 책 제목으로 먼저 보기는 했지만, 저런 사람이 있었구나 했습니다 아직 살아있나요 이건 잘 모르는군요 실제 있는(있었던) 사람을 소설로 쓰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작가가 생각한 걸까 싶습니다 그런 걸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 얼마전에 그런 책을 읽어서 이렇게 말하는군요 이 책은 작가가 그 사람을 실제 만나보기도 해서 사실에 가깝게 썼을 것 같군요 이 책을 리모노프가 봤을지 모르겠군요

이름을 알리고 싶어했는데, 이름도 낯선이라고 한 글을 봤다면 화냈겠네요 나름대로 이 사람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기회가 오면 잡아라 하는데, 많은 사람이 기회를 엿보는 건 마찬가지군요 많은 사람이 리모노프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사람처럼 못하겠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못한다고 말했군요 다른 분이 쓴 글을 조금 보니 별로 좋은 말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어떤 모습을 보면 웃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죠 저렇게 안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복수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봐도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복수한다고 해서 마음이 풀리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덧없는 일이죠 덧없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도 안 좋을 듯합니다 저는 남한테 해를 입히지 않고 살기밖에 없군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럴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이런 말로 흘렀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5-03-25 12:38   좋아요 0 | URL
분명히 리모노프가 보기는 했겠죠. 아마도 저는 그가 이 책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그 카피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뭐 사실은 어찌보면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을 자처하는 책이라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아니고를 따지는 것이 결국에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자꾸만 조금 의식하게 되더라구요. 의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더라구요. 연민이라는 측면에서도요. 물론 어떤 인물을 좋아하고 아니고의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잘 쓰여진 책인가의 문제와 별로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호감이 가는 인물에 대한 내용이면 아무래도 조금 더 좋은 점수를 주게 되는 측면이 있죠.

어쩌면 혹시 이것도 다른 의미에서의 열등감의 발로일까요. 그가 저보다 수백배는 더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아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물론 그런 스펙타클한 인생을 저보고 살라고 하면 아니오, 괜찮습니다라고 할테지만,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는 훨씬 재미있고, 멋진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도 비슷한 마인드예요. 남한테 해를 입히고 살지 말자. 그런데 문제는 그것 하나도 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알아야 할 것도 많고요. 남한테 해를 입히지 않고 사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면서 삶니다.


네오 2015-03-2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픽사진이 `내일을 위한 시간`이네요~ 뭐 많은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본 영화중에 가장 느낌이 있는 영화였네요 ㅋ 그렇다고 그대로 살아가고는 싶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올해 mlb어떻게 보세요? 완전 판이 바껴서말이죠~

맥거핀 2015-03-25 12:43   좋아요 0 | URL
오..네오님 요새 활발하게 알라딘 글쓰기 하시던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요..저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을끼리 치고받고 하면서 말이죠.

저는 올해는 워싱턴 우승의 적기가 아닐까 봅니다. 작년부터 응원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떨어질 줄 알았나요. 올해에는 정말 우승한 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다저스는 뭐 이것저것 많이 하기는 했지만, 올해도 왠지 그닥일 것 같구요.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이상하게도 토론토에 좀 마음이 갑니다.

네오 2015-03-25 12:54   좋아요 0 | URL
오 맥거핀님,,저도 조용하게 책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만,,영화는 스포가있는 게 너무 많어서리,,,그 적은 숫자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많이는 보지 못하구요~ 킹스맨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올해의 영화로 찜했어요 ㅋㅋ

다르덴은 ˝이만큼 왔어 그래 최선을 다한것 같어˝ 느끼는 찰나에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영화가 거부할수 없을 만큼 더 좋아지더군요,뭐 그의 영화 좋다는 것입니다,,

오홋 토론토라,,음,,,제가 부끄럽게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작년에 mlb전경기를 모바일로 통해 다 봤다는 것입니다만 ㅋㅋ 저도 워싱턴 최강으로 꼽고 있지만 제가 워낙 좋아하는 팀이 보스턴이라서요 ㅋ 내서널리그는 세인트루이스 호기롭게 한번 가봅니다,,

맥거핀 2015-03-25 13:18   좋아요 0 | URL
보지도 않고 올해의 영화로 찍으시는 네오님..쿨합니다.^^ 저는 최근에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좀 보려고 하는데, 늘 그넘의 시간이 문제지요. 최근에 <위플래시>하고 <꿈보다해몽>을 봤는데 좋더군요. 영화의 내용이라는 측면보다도 영화를 즐기는 분위기 자체가 좋았습니다.

아니..근데 mlb 전경기를 모바일로 어떻게 다 볼 수 있습니까..허허허. 1년에 영화를 1000편 봤다는 소리보다 더 놀랍군요. 그럼 뭐 전력분석은 확실하겠군요. 보스턴 그래도 올해까지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봅니다만, 왠지 네오님 말이니 믿어봅니다. 세인트루이스는 가을만 가면 알 수 없는 팀이니 뭐..^^

네오 2015-03-25 13:2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오버했나요? 아 틈틈히 봤다는 거구요,,,그러니깐 경기하는 채널이 여러개인데,,,중요한 순간만 포착해서,,돌려봤다는 이야기예요,,그래서,,모든 서사를 파악하는 건 아니구오,, 헷갈리게 했다면 죄송요 헤헷~ 메이저리그는 그냥 분석보다는 애정으로 이야기하는 거라서요,,

그런데 도대체 위플러쉬,, 마녀사냥꾼 허지웅 평론가께서 꼭 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감독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예요,,ㅋ 이처럼 감독위주로 보는 사람에게는 이게 함정이예요,,좋은 영화놓치는 거요,,

또다시 코맥 매카시의 새로운 작품이 나왔었요? 물론 출간했으니 리부를 쓰셨겠죠,, 그런데 리뷰를 떠나서,,재미있나요? 난 왜이리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졸리던지요 ㅋ

맥거핀 2015-03-26 18:56   좋아요 0 | URL
mlb tv 결제해서 보시나봐요. 그거 생각보다 꽤 비싸던데...근데 강정호 올해 성적은 어떨걸로 보시나요? 시범경기에서는 왜 그리 삽질하고 있는지..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위플래시>는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구요. 잘 만든(웰메이드라기보다는 강조점을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제가 내용상 별로 좋아할 수 없는 영화더군요.

사실 저도 코맥 매카시 별로예요.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번에 이 책이 안되기를 바랬지만, 뭐 읽게 되었으니, 쓸 수 밖에 없군요. 근데 이 다음 책들도 영 안 땡기기는 한데...

아이리시스 2015-03-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다음 책이 뭐죠? 라고 맥거핀님 일에 관심 갖고 찾아보러 간다..

아이리시스 2015-03-30 13:39   좋아요 0 | URL
무라카미 류..
<우리동네 아이들>은 좋을 거예요(단호)!

맥거핀 2015-03-30 18:28   좋아요 0 | URL
ㅋ고마워요. <우리동네 아이들>은 좀 좋을까요? 보니까 2권짜리던데...왠지 아주 좋던가, 아주 별로던가 할 것 같은 느낌..아이리시스님이 좋다니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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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하나 빼먹고 있었지 싶었는데, 신간평가단 추천 페이퍼를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실 나는 추천페이퍼를 조금 빨리 쓰려고 하는 편인데, 그건 성실도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단지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선거에서 탈락할 것이 거의 확실한 후보한테 표를 주는 기분이랄까. 물론 선거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탈락할 것이 확실한 후보라고 해서 표를 주는 것이 의미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어쩌면 신간평가단 책을 골라내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조금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대체로 많은 일이 그렇듯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캐스팅 보트 같은 것을 쥐고 있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기다린 다음 결정적인 한표를 던지는 잉여짓을 할 수도 있겠지. 뭐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아니니 뭐가 문제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의 선거인단들은 자신이 이라크 국민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꿈에서라도 해봤을까.) 아무튼 그런 잉여짓을 한다고 해도 실물의 책이 내 손에 도달하기까지는 다른 요소들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있다가 저녁에는 무엇인가를 쓰기에는 적절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재미가 많이 없더라도 지금 써야겠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일부러 해도 잠이 안깨니, 잠이 더 몸을 덮치기 전에.

 

 

 

두 번의 자화상, 전성태, 창비

 

이제 어느덧 중견이 된 전성태 작가의 단편 작품집이다. 등단한지 올해로 20주년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여주며, 다양한 수상작품집에도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올해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도 작가의 이름을 본 듯 하다). 작품집에 올라있던 여러 단편들은 보았지만, 차분히 작가의 작품들을 본 기억은 없는데, 이번 기회에 읽고 싶다.

 

 

목숨전문점, 강윤화, 실천문학사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강윤화의 청춘들은 모두 뚜렷한 목적을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붙어 있는 목숨 자체를 의문시하며 '살고 싶은가'라는 패배적인 자조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라니. 그들의 이 '자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 이면의 것을 읽고 싶다.

 

 

괴테 문학 강의, 안진태, 열린책들

 

그간 독일문학에 대해 꾸준하게 천착해 오던 안진태 교수의 책이다. 강의실에 앉아서 차분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서가를 장식하고 있는 괴테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으면 조금 달리 보이는 게 있을 것 같다.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 김종일 외, 황금가지

 

제목이 약간 벙찌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 표지도 그렇고 컨셉인 것 같다. 원래 이런 컨셉은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보다가 몇 차례 크게 얻어맞고 급기야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비웃어서 미안해!를 외치는 게 가장 최고급 코스인데, 이 소설들은 어느 정도의 코스일지 궁금하다.

 

 

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박하

 

<맏물 이야기>와 이 책 중에 가늠해보다가 이 책을 골랐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을 즐겁게 읽고 있는데, 그의 적자인 그녀의 소설을 한 권 고르고 싶었다. 그 중에서는 아무래도 이 책이 조금 더 낫겠지 싶다. 

 

 

덧.

 

 

이 책을 고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 책을 읽은 후 어떤 리뷰를 쓰게 될지 불보듯 뻔할 것 같아서 빼기로 했다. 보나마나 이것도 죽이고, 저것도 죽이네 하며 감탄하다가, 근데 다 출간이 안 되었다고 징징대다가, 급기야는 한국 출판 문화를 성토하면서 이 책을 추천한 내 자신을 원망하는 걸로 끝나겠지.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 러브레터의 대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나.

 

 

아 그리고 이 책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라는 제목의 이질감. 나이든 무라카미 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더구나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4050세대의 다섯 가지 가느다란 희망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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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라는 말이 너무 공감되네요 ㅋㅋ... 하지만 저는 새로 나왔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그분들의 추천을 받아서 제 신간 선정 목록에 넣기도 해요. 나름 이런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ㅎㅎ

맥거핀 2015-03-06 00: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롸님! (`롸`라는 닉네임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MLB팬이라 쓸데없이 알렉스 로드리게즈, 일명 `롸동자`를 연상하고 있습니다.ㅋ) 아..그렇군요. 그런 장점도 있기는 하겠군요. 저도 신간추천하면서 늘 다른 분들의 추천을 봐요. 모두들 각자 나름의 색깔?이 있으신 것 같더군요.^^

희선 2015-03-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어서 잠이 오는가봐요 저는 철이 바뀔 때가 되면 잠이 많이 오더군요 어느 날 왜 이렇게 잠만 자고 싶을까 생각하면 그런 때였어요(그럴 때가 아니어도 기분이 별로면 잠을 자는군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때는 다 그럴 것 같습니다 한동안 움츠려 있어서 그것을 펴려면 좀 힘이 들지 않을지... 사람이나 그렇게 움츠려 있지, 식물은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있었겠습니다

벌써 정해졌을지 몰라도 마지막에 쓴 것까지 확인해보겠죠 누군가는 저런 책도 나왔구나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군요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라는 말이 재미있네요 제목에서 벌써 웃음이 나옵니다 실제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오랜만이네요 지난해에도 책이 나오고 예전에 나온 게 다시 나온 것 같기도 한데...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죠 어제 보름이었더군요 달이 잘 보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달 보셨습니까


희선

맥거핀 2015-03-06 00:26   좋아요 0 | URL
하하..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게 되네요. 이런 경우 잘 없는 것 같은데...저는 솔직히 늘 잠이 와요. 잠을 적게 자도 잠이 오고, 잠을 많이 자도 잠이 오고..참 이상하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옛날에는 잠이 참 없는 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잠이 많아졌는지..남들은 나이들면 잠이 적어진다는데, 저는 이상하게 반대인 것 같아요.

네..저도 사실 과학과 액션이 어떻게 융합되었을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상당히 괴랄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저도 무라카미 류 이름 오랜만에 봐서(아주 오래전에 `공생충`이라는 소설을 본 이후로 거의 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반가웠는데, 제목부터 내용까지 별로 땡기지가 않아요. 무라카미 류는 그냥 내 추억 속의 무라카미 류로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커트 코베인이 살아 돌아와 포크 앨범을 낸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달 못봤어요. 올해는 정월대보름도 뉴스 보고 알았어요. 부럼도 못 먹었고, 오곡밥도 구경을 못했네요. 별 거 아니지만, 왠지 그냥 지나가니 섭섭하군요.

맥거핀 2015-03-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지금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발견했는데, 위에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은 표지에는 `단편선`이라고 되어있네...근데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에는 `단편집`이라고 되어있고..이상하다....

2015-03-18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0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스캐처, 베넷 밀러, 2015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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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0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랄 것 없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겠습니다 하지만 가진 게 많다고 해서 모자란 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진 사람은 그 나름대로 모자란 게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지, 어쩐지 가진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를 엄마가 돈으로...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바랐을까요 이게 알고 싶네요 사람 위에 서고 싶어서... 존경받는 건 누군가 위에 서는 게 아닌데, 그것을 잘못 알고 있었네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군요 데이브도 그걸 잘 몰랐다니,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만났군요 데이브가 모르는 것도 있었겠지만, 별로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존경한다는 것은 말로 하기보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뚜렷한 동기가 있어서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도 있지만, 동기가 확실하지 않은 때도 있어요 이 일도 뚜렷하게 알기 어려울 듯하네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여기 나온 사람들이 다 연기를 잘했군요


희선

맥거핀 2015-03-06 00:14   좋아요 0 | URL
뭐 물론 이 글은 영화를 본 제 나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진짜 나름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존 듀폰이 데이브 슐츠를 사살했다는 사실 뿐이니까요. 말씀하셨듯이 동기가 확실한 사건도 있지만, 많은 사건들이 동기가 불확실하죠. 어쩌면 존 듀폰도 쏘면서도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튼 (적어도 영화상으로 본다면) 그 마지막이 흥미로웠어요. 존 듀폰이 자신을 칭송하는 비디오를 본 후 데이브에게 가서 그를 쏘는 것. 아마도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보다 쉬운 방식, 그러니까 자기자신에 대한 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치환하고는 하죠. 말은 쉽지만 자신이 전혀 존경 같은 것은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겠죠. 꼭 존경 뿐만이 아니라 사실 많은 것이 그렇기도 할 것이구요.

연기의 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볼 게 많은 영화입니다.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어서 미묘한 느낌을 살려야 하는 부분들이 많은 영화인데, 세 사람 모두 상당한 호연을 보여줍니다.

네오 2015-04-2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쓰셨네요!! 궁금한게 다 풀렸네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네오님, 고마워요! 네오님 칭찬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네오 2015-05-01 13:18   좋아요 0 | URL
네,,감사요,,사실,,이 글을 읽을때 전율비슷한,,마크가 수미쌍관적으로 왜 배치를 했는지를 설득가능하도록 이야기를 해주셨으니,,뭐,,더이상 이만한 리뷰글을 넘는글을 상상도 못할거고,,다 이야기를 풀어주셨으니 말을 더한다는 것은 낭비인것도 같고 해서요,,저는,,걍 느낌위주로 글을 써야겠아요^^ 아 단지,,베넷 밀러가 왜 중요한지는 말 하고 싶더군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2015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의 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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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2-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ㅊ ㅎ ㅎ ㄴ ㄷ

위에 쓴 것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조금 알아보게 쓰면,

ㅊ ㅜ ㄱ ㅎ ㅏ ㅎ ㅏ ㅂ ㄴ ㅣ ㄷ ㅏ

얼마전에 본 책에서 예전에 어떤 분이 우리말을 풀어쓰기로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더군요 첫소리 말만 쓰면 못 알아봐도 풀어쓰면 조금 알아볼 수 있죠 하지만 저것도 바로 알아보기 어렵죠 그때 우리말을 풀어쓰자고 한 사람이 많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났으면 안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우리말은 풀어쓰지 않고 모아써야 한다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두번 나온 말은 어떻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요 앞에서 나온 말인데 또 나왔네, 하는 생각밖에... 얼마전에 본 책에도 같은 말이 두번 나왔어요 한번은 A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들었고, 두번째는 A가 B한테 말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말 A한테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B한테는 맞지 않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A는 사람이지만, B는 사람 모습을 한 다른 생물이었거든요 실제로는 없는 동물이군요 A가 듣고 한 말은 사람에 대한 거였어요 A는 B도 자신과 같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A)가 그렇게 말해도 B는 너와는 달라’ 하고... 사람은 다 A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A가 한 말은(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한테 좋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B는 대체 뭐길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군요 무척 자비로운 동물 기린(麒麟 중국에서, 성인(聖人)이 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은 나중에야 그 일을 알기 때문에, B는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B가 뭔지 알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말이라 생각해요

처음 영화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본 사람의 놀라움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사실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그것을 실제처럼 느끼기도 했다고 한 듯한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거 아닌가 했잖아요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하는군요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군요 영화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무섭고 잔인한 것을 볼 수 있는 거겠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무엇이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떠오르네요 이것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거지만... 그런 사람은 영화를 현실로 느껴서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도 그런 사람 있을까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가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더 깊이 생각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지... 그것은 한 사람과 여러 사람에서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와 비슷한 문제네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쪽을 생각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들 때 많이 생각해야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3-02 11:05   좋아요 0 | URL
그냥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글입니다. 물론 그게 별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고, 감독이 별 생각없이 그런 대사를 넣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뭐 생각이야 누구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네..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고 하죠. 유명한 기차 얘기도 있구요. 현대의 관객들도 매체라는 것에 많이 길들여졌기는 하지만, 또 모르죠. 현대 관객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무엇인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3D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3D는 아직도 사실 초기단계라 봐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저도 예전에 3D를 처음 봤을 때(어렸을 때 대전엑스포에서 처음 본 걸로 기억하는데..^^)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일종의 비유겠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단 그게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기도 하죠. 흔한 말로 `경쟁`이라는 것 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 세상이 점점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권유하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죠. 그게 강한 자들은 편하니까요.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신경쓸 필요도 없죠. 무엇보다도 약한 자들끼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약한 자들은 뭉쳐서 강한 자에게 대응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강자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겠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점점 사람들을 수직계열화하고 사회를 점점 제로섬게임, 혹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식으로 만들고 있죠. 이 영화의 그런 장면도 이런 것들의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단지 비유여야 하는데, 그 비유가 점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죠. 무서운 세상입니다.

아..그리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뭐 이런 저런 긴 말보다는 축하해주셔서 감사하다, (지금까지) 여러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이 없네요.^^

넙치 2015-03-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봤는데 덧붙인 글이 흥미롭네요!
자본주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오싹함이..얼마전 생체이식 칩도 곧 도래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영화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닌지, 종말론적 비극이 떠오르네요, 저는.;;;

맥거핀 2015-03-06 00: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공짜를 좋아하면 안됩니다.ㅋ 라고 말을 하면서 아마도 영화 속 상황이었다면 저도 신나서 공짜유심을 받아 왔을 것 같아요. 사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점점 거의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