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014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영화들이 그러듯이 영화 <그녀her>의 시작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화면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중인데, 잠시 뒤에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음성으로 '대신하여' 작성하는 중이고, 이것은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된다(이 공간의 구성은 한편으로 꽤나 인상적인데, 이 공간은 현대사회의 어떤 풍경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공간은 투명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고, 편지를 작성하는 대리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메시지들을 대리하고 있다. 누군가들의 사생활들은 그렇게 공개되면서, 동시에 공개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가로막는 투명한 파티션처럼). 즉 그가 작성하는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게 특수하다. 그가 작성하는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꼭 맞도록 맞춰진 어떤 결과물들이다. 그는 (약간의 진심을 담기는 하지만) 고객이 제공한 몇 가지의 정보들을 가지고 받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상황에서 테오도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없다. 그는 그저 고객의 니즈(needs)에 맞춘 대상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일종의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 첫 장면의 숏은 상당히 특이하다. 화면상에서 우리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즉 우리 관객의 위치는 그가 바라보는 컴퓨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그가 마주 대하는 컴퓨터의 위치, 혹은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위치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결코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이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도시의 유려한 혹은 메마른 풍경을 잡는 숏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테오도르의 시점숏이라기 보다는 버드아이 뷰 같은 것에 가깝다). 대신에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에서 그를 비추고, 그와의 거리는 심리적 친밀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된다. 즉 그가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카메라는 실제의 사만다라는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위치할 것 같은 위치에 머문다. 혹은 그가 사만다와 섹스 아닌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보다 그에게 훨씬 바싹 다가붙어서 사만다의 육체의 위치에 가 있다(주인공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데, 테오도르가 영화 상에서 실제의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카메라는 옆으로 빠지거나 혹은 그의 등 뒤에서 상대방을 잡는다(오버 더 숄더 숏). 즉 카메라는 그의 뒤통수와 상대방을 같이 잡는데, 이 때 우리는 그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빠져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영화의 중후반까지 우리는 사만다의 육체를 대신한다. 다시 말해서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OS 사만다이며(그 OS 사만다는 그의 전처 캐서린(루니 마라)을 대신하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작동한다. 또한 그 OS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자(테오도르)에 맞추어 진화한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맞추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와 고객에게 맞추어 진화하는 OS 사만다), 카메라를 통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즉 목소리와 정신은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담당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가, 즉 우리 자신의 실제의 눈이라는 육체가 대신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신(이라는 육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 테오도르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 영화를 본 당신이 혹 남자라고 꺼림칙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 속에서 대사로 설명되듯이 테오도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거의 중성적인 캐릭터니까. 물론 사만다도 초기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 혹은 비관습적인 느낌, 혹은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법상으로 볼 때도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가득(턱과 머리를 자를 정도로) 잡는 것은 이례적이며, 만약 이것이 실제라면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흔치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라면 이는 어떠한 경우일까. 실제라면 예를 들어 상대방과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붙이고 대화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눈에 붙은 작은 눈곱이나 입냄새 따위가 대수랴. 왜냐하면 사랑은 영화 속에 나오듯이 살짝 맛이 가는 것,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의 어떤 묘한 부자연스러움이나 혹은 이상한 행동들(혼자 뱅글뱅글 돈다거나,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는 것 등)은 그것이 단지 OS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모든 사랑에 빠진 자들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것과 이 비관습적인 숏은 사실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 <her>는 비슷한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목받는 영화다. OS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겠지만(물론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중심축 역시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그 구분 이상의 무엇이다. 적어도 연애의 문제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해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큰 걸림돌인 육체의 문제도 이 영화는 극복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간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육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폰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만다의 자리에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치시킨다면 이 영화에서 전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즉 이 이야기는 실제의 많은 연애들이 그러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라면 사만다의 경우에는 진화의 끝에 이른 주체의 각성이고,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그 연애가 주는 비현실성과 어떤 부재에 대해 깨닫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주체의 각성이다. 테오도르의 실제에 대한 대리물이자 대상물로서 그에 맞춰 진화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던(즉 이동진씨가 지적하였듯이 she가 아니라 her에 불과하였던) 사만다는 어떤 계기들을 거쳐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주도하는 사랑을 해나가며, 이는 자신의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르기를 바랐던 테오도르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킨다(자신을 지각하는 기계라는 고전 주제의 반복).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이자벨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단지 어떤 연기들, 혹은 허상의 감정들을 쌓아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나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체들의 각성이란 있어보이는 말을 그냥 다른 안 유식한 말로 바꾸면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혹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그것의 몇 가지 증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만다의 업그레이드, 혹은 부재이며, 테오도르가 책을 출판하고,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며, 기법상으로는 이제서야 비로소 테오도르의 시점숏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철저한 대상화의 결과물(편지)만 써내던 테오도르는 이제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다(여기서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전처 캐서린이 책을 써낸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주체로서 우뚝 선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맞추어 돌봐주던 테오도르가 필요없으며, 아마 그런 이유에서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편지들에는 결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 책 표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도 사만다도 이제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맞춰주는 어떤 가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으니까.

그런데...제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럼 해피엔딩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게 그럴 수 없으니 어쩌나. 문제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주체의 각성, 아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쩌면 연애의 딜레마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그 연애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라는 사실이다. 연애감정에 너무 빠져서 했던 여러 미친 짓들, 상대를 즐겁게 했던, 또는 아프게 했던 소리들. 문제는 그것의 의미들을 깨닫는 것은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애들이 끝났을 때이다. 그 때 이렇게 할 것을, 혹은 저렇게 할 것을, 아니면 이런 소리는 하지 말 것을...돌이켜 볼 수 있을 때는 이미 다 끝난 이후이고,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때에는 그는 혹은 그녀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 항상 진짜 연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걸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딜레마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셔..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조금 무게 잡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에 감도는 쓸쓸함에는 결국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쓸쓸한 걸까. 그래서 나는 스파이크 존즈가 마지막에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메라는 한껏 뒤로 물러나 새벽 어스름의 풍경과 쓸쓸하게 나란히 앉은, 그러나 말 없이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테오도르나 에이미가 아마도 같은 것을 반복할 것을 알지만, 이 불안정해 보이는 결말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한다. 같은 것의 반복에 지긋지긋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위로받는다.

 

 

덧.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여전히 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이 뮤비는 이 자체가 하나의 농담인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영화 <her>도 일종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American Funest Video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이 뮤비에서 감독 본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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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섹스'라는 말이 본문에 있어서 계속 음란하다고 글이 안 올라가더니 '폰으로 하는'으로 바꾸니까 되네...그 둘의 차이가 뭔지?

네오 2014-06-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냥 글을 읽고 퍼뜩 떠오른 생각인데요,,존즈야말로 진정한 현대의 세익스피어 아닐까요? 아 그 사랑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찾아간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찰리 카우프만과 작업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내니 좋더군요,,그가 imhere부터 뭔가 펠리니를 섞은 알렌이 돼가는것 같더군요,,her도 뭔가 ,애니홀 같구요,,그리고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봤는데,,저한텐 엄청 좋은 영화였습니다,,그 줄리어스 시저를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주 대사들이 재미있더라고요,,사실,,여기의 글을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영화일까라고 생각했는데,,보고 나니,,좋다라고요,,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가 페이크인가요? 전 리얼인줄 알았는데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뮤비는 BEASTIE BOYS - SABOTAGE 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38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애니홀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 영화도 어떤 의미에는 참으로 귀여운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조금 뒤늦게 보셨군요. 네 저도 그 영화가 좋았습니다. 영화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할까요. 물론 저도 '줄리어스 시저'(라는 희곡)을 책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생각해보니 페이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군요. 어찌되었건 그 사람들을 데리고 실제로 찍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저는 스파이크 존즈의 그 어떤 재기발랄함이 늘 좋습니다. 비스티 보이즈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요새 뭐하나 싶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네오님 덧글을 보니 반갑네요.^^

넙치 2014-06-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인데, 역시나 글이 살아있어요!
맥거핀님 글 읽으니 제가 영화를 보긴 했나, 하게 되네요.ㅜㅡ

맥거핀 2014-06-20 00:41   좋아요 0 | URL
넙치님 오랜만입니다. 조금 더 성실히 쓰기는 해야 하는데..
넙치님이야말로 항상 많은 영화를 정밀하게 섭렵하시고 늘 좋은 글을 남기시지 않습니까..^^

드팀전 2014-06-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대단히 오이디푸스적으로 봤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가 상징계로 봉합되기 위한 필수 과정같은 것. 테오도르의 사만다에 대한 의존은 일종의 상상계 속의 남성판타지 같은 것에 가까와 보였습니다. 모든 걸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지요. 단 섹스의 문제 하나 남아있습니다. 테오도르의 거세공포가 기묘한 방식으로 해소되고 난 이후, 제대로된 연애가 시작됩니다. 오이디푸스적 섹스는 좌절되어야만 하는게 당연하구요. 그리고 이후 나타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화상으로 들리는 그 철학자겠지요- 그는 사만다가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테오도르는 상징질서로 봉합됩니다. 마지막 베란다씬은 지극히 헐리우드적으로 그 과정에 대해 관객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 저도 영화를 좋게 봤습니다, 하지만 주로 이 영화와 '사랑'의 본질 같은것을 병치시키는 방식에 모종의 궁정기사식 낭만성이 배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맥거핀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닏.) 주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류적 반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55   좋아요 0 | URL
네..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해봤습니다만, 덧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상상계의 세계에서 주체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아무튼 주체적 각성은 테오도르나 사만다나 양편 모두에서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근데 아무튼 저는 마지막에 이르러 안도하기는 했지만, 어떤 모종의 불안함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비슷한 것을 반복하지 않을까..즉 상징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무엇인가가 그들을 미끄러지게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철학자 얘기 하셔서 생각났는데, 저는 과문하여 그 철학자가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계시던 분이더군요(조금 말이 이상하네요). 저는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연상했습니다.-_-

뭐 아무래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이니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응들이 안 나올 수는 없겠죠. 물론 너무 한쪽으로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도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만..

희선 2014-06-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쓸 수 없는 말이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본문은 못 써도 댓글은 쓸 수 있군요 그런데 음란해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 영화가 나올 때쯤 라디오에서 이야기 들었어요(이 영화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제대로 들은 게 없군요 아쉽게도... 지난해에도 영화는 못 봐도, 못 봐도 가 아니고 안 봐도군요 그 방송이라도 잘 들어보자고 했는데... 그때도 조금밖에 못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영화전문방송 같은데 그건 아니예요) 남자여서 OS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했다고 했는데, 만약 저라면 남자 목소리가 아니고 여자 목소리로 할 것 같아요 친구처럼... 여자는 같은 여자라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 이야기 들었을 때 맥거핀 님은 이 영화 보고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남다르군요 영화를 보여주는 식에 그런 뜻이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네요 영화는 아닐지라도 다른 거 볼 때 조금 잘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이래도 실제 볼 때는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걸로 쓸쓸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저는 여전히 꿈을 더 좋아해서)... 어떤 관계든 그때 잘해도 지나고 나면 아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움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게 좋을 테죠 그런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거군요


희선

맥거핀 2014-06-20 01:04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자기 음란 어쩌구 하며 글이 등록이 안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음란한 걸 이 양반들이 어떻게 알았지? 하구요. 아..아무튼 그래서 글을 덕분에 꼼꼼이 다시 읽기는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걸릴까 하구요. 혹시나 하고 그 부분을 바꿔보니 글이 다시 제대로 올라가더군요.

근데 아무튼 조금 웃겼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거나 안 쓰거나 한다고 해서 음란해지거나 안 음란해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에 성기가 등장한다고 무조건 음란한 영화라고 판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게 등장해도 아주 건조할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아주 음란할 수도 있죠.

아무튼 음란 타령은 여기까지 하구요. 희선님 덧글을 보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는 여자 목소리로 하는 경우들도 꽤 있겠지만, 아마도 남자라면 남자 목소리로 설정하는 경우는 거의 극소수이지 않을까 하고..왠지 그것이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근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별로 의미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남성이지만, 상당히 여성적이기도 한 캐릭터라서요.

그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쓸쓸합니다. 그들 둘이 모두 헤어지고 난 이후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결국 현대인들의 어떤 풍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우리는 누군가가 생기면 혼자가 되기를 바라고, 외로워지면 다시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는 존재들, 그것을 시계추처럼 반복하여야만 하는 존재들로 운명지워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반복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 밖에 없는 거겠지요.

2014-06-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약간은 이상한 영화다. 일단 그 구조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삼중의 액자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흉상 밑에 앉아서 한 소설을 읽고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데, 이 소녀가 읽는 소설의 제목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며,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인 바로 그 흉상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액자, 즉 그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액자로 들어가 그 작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데, 그는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 호텔의 주인을 만나 그가 호텔을 소유하게 된 어떤 기이한 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무리 될 때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는 다시 액자를 거꾸로 밟기 시작한다. 즉 이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무슈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호텔의 주인장과 그것을 듣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보인 다음, 다시 이제는 나이가 든 작가의 모습이 보이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흉상으로 돌아와 이제 소설을 다 읽고 소설을 덮는 소녀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 삼중의 액자와 영화 속의 본편은 언뜻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바로 등장한다 해도, 이야기의 진행과 마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약간의 액자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 바로 위의 액자, 즉 호텔의 주인장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액자만 넣어도 될 것이다. 도리어 이 삼중의 액자는 영화의 초반 몰입을 어지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왜 웨스 앤더슨은 굳이 이 삼중의 액자를 계획하고 실행했을까. 이것은 군더더기일까, 아닐까. 군더더기가 아니라면 이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나의 어떤 물음이다.

 

두 번째 액자에서 나이든 작가가 던지는 화두는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즉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작가가 하는 일은 주의깊게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하나의 일례로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여준다. 즉 그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는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나이든 호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모험이 가득한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는 어떤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다. 그런데 사실 영화 속에서 경험의 산물인 이 이야기는 상당히 이상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는 1927년의 주브로스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2차 세계대전 기간의 유럽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외국의 침공이나, 이어지는 다른 나라의 침공, 혹은 내전, 혹은 열차나 호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의 복식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크(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번개 모양의 마크는 나치 친위대의 마크를 거의 그대로 따온 것이다) 같은 것들이 불러오는 이미지들인데, 그런 것들은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라는 실제의 지명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영화는 짐짓 1927년의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실제의 지명 '부다페스트'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떡하니 박혀 있고, 그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과 소련을 가까이에 둔 이 나라의 운명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침공을 하기도 하고 침공을 받기도 하고, 추축국에 가담하기도 하고, 연합국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즉 허구의 산물이 아닌, 경험의 산물이란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역사이다. 역사는 수많은 경험들의 집합체이고, 수많은 작은 사건들의 조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무슈 구스타브의 기이한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럽 역사의 어떤 단면이며, 허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에 많은 내용을 빚지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소설과 역사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많은 면에서 소설은 지금까지 역사가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감당해왔다. 역사가 년도와 인원들로 가득한 거대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사이, 소설은 그 숫자들이 다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개인의 세계를 묵묵히 기록해왔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난 일들을 역사가 아닌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배워왔던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혹은 역사가 단 한 줄로 지나가 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소설가들은 어떻게 끄집어내어 되살려냈던가.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삼중의 액자, 즉 소설과 작가라는 이 액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즉 이 영화의 액자를 그대로 따른다면, 가장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관찰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역사가이기도 하다(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에서 여러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는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속에서 큰 영향을 받은 삶을 살아간 작가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전기작가로도 유명하기도 하다. 즉 그 자신이 소설가이면서 역사가였고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실제의 혹은 가상의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누군가의 세계와 그것을 읽는 누군가의 세계를 연결시킨다(즉 가장 바깥의 액자에 있던 소녀와 무슈 구스타브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를 통해 연결된다). 즉 그들은 이 이야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공감을 나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슈 구스타브가 여러 약점을 지닌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좋은 사람이었다고 믿게 된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결국 전혀 연관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연계하여 힘을 얻는 이야기이다. 무슈 구스타브는 평생을 호텔에서만 지낸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그가 혼자 밥을 먹는 풍경을 보라), 그가 결국 위기를 돌파하는 것은 이상한 연대들, 즉 감옥에서의 연대라거나, 호텔 컨시어지들의 비밀의 결사체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와 단 한 가지의 공통점도 없어 보였던 로비보이 제로와 그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족이라는 피의 결사체이다. 마담 D.(틸다 스윈튼)가 죽자, 그의 유산을 받기 위해 몰려든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가족들, 그의 망나니 아들 드미트리(에이드리언 브로디)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세 자매. 물론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유럽의 피의 역사에서 말 그대로 피가 야기했던 무시무시한 결과물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피로 뭉쳐진 가족들의 집합인 제국주의자들의 충돌과 그것에 방아쇠를 당겼던 황태자 부부의 암살, 혹은 히틀러의 광기어린 피의 집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까지 나아가는 것은 너무 과장인 것 같고, 단지 그 반대편에 놓인 것들만 말하자. 그것은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의 서정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감이고, 아가사와 제로의 시를 통한, 혹은 책을 통한 연결이다(아가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여러 겹의 액자를 통해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란 소설을 펴든 순간, 우리가 그 넓고넓은 호텔에서 외롭고 좁은 컨시어지의 방 한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소설 속의 인물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예술품을 매개로 하여 말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이 액자들은 단지 겉멋 든 영화의 사족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말과 글의 힘이며, 말과 글의 어떤 가능성이다. 그것을 웨스 앤더슨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장 극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않고 끝내는 것이다. 즉 영화는 극적인 이야기들을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말로 설명되는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며, 그것은 그 내용들이 비(非)극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가장 극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그저 말로 끝내버린다. 즉 주인공을 비통하게 만드는 무슈 구스타브의 죽음이나 아가사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카메라는 끝내 비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주인공의 독백, 그리고 주인공의 그것을 회고하는 반응숏으로 끝날 뿐이다. 그것은 그런 부분을 끝내 전시하지 않겠다는 말과 글에 대한 강조이자 영화적 결단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를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이상한 영화다.

 

 

 
덧.
이 영화가 여러모로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구조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형식상에 가득한 어떤 비영화적인 요소들, 혹은 과잉이나 강박 때문인데, 이 영화는 묘하게도 영화이면서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삼중의 액자나 영화를 장의 형식으로 분절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몇몇 특정의 장면들 예를 들어 그림판을 활용한다거나 미니어처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그러한데, 보통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보통의 영화들은 그림판이나 미니어처를 활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최대한 그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반면에, 이 영화는 도리어 그런 것의 활용을 일부러 보란듯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또한 구도의 활용이나 카메라 이동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거의 어떤 화면이든 대칭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카메라의 이동도 수직, 수평 이동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다만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가끔 익스트림 클로즈업 같은, 다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시도를 여러 활용하는데, 이것은 또 한편으로 이 영화를 더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때로 지나쳐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인데, 대칭, 동일한 것에 대한 집착은 때로 위험할 수 있다(영화 시작부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내외부의 모습이나 하다못해 영화포스터만 봐도 그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나치의 복장에 대한 집착이나 친위대 마크, 하켄 크로이츠의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겠지만(사실 대체로 국기나 마크가 거의 대칭이기는 하다),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미술품인 <사과를 든 소년>이 명작이 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그림 속 주인공이 정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약간 측면으로 틀고 사과를 한 손에 든 비대칭 때문일 터이다. 지나친 대칭은 보는 이를 때로 압박하며 부담스럽게 한다. 영화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구도의 반복은 결국에는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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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4-1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50만을 넘는 '대박'을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영화의 만듦새도 만듦새지만 그것에는 대진운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캡틴 아메..같은 것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넙치 2014-04-1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가 아주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서 두 번이나 봤어요. 그리고도 어떻게 정리할까..생각만하다가 정리 좀 하려고 알라딘 로그인 했는데 맥거핀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뭘 쓰려는 의지가 사라지네요.ㅠㅜ

맥거핀 2014-04-14 15:09   좋아요 0 | URL
어이쿠..이미 좋은 리뷰를 쓰셨던데요. 두번이나 보셨군요. 저는 요새 영화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운데..이 영화는 충분히 두 번 볼 영화라고 봐요. 영화의 내용상으로도로, 그리고 전체적인 형식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되새겨볼만한 영화죠.

희선 2014-04-1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의 액자를 쓴 것은 왜일까를 생각하다니, 저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할 텐데...^^ 영화속 사람들과 그것을 보는 사람도 이어져 있다고 하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도 영화에 있어야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아가사라는 이름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각납니다(예전에는 아가사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본래 영화에는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더 거기에 끌어들이는 듯하군요

말과 글의 힘이라고 하니, 보는 것이 더 실감날 수 있지만 말을 듣고 글을 읽는 게 더 상상하기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갑자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은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군요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작가(감독)가 그런 것을 보여주는군요

이어지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4-14 15:15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예전에는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했었죠. 예전에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 많이 읽었었는데...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내용에서 아가사가 사건해결(?)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영화를 참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영화가 소설을 절대 이길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아우라를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낼 때 그 아우라들이 많이 깨지잖아요.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까닭도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예를 들어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그 완벽한 주인공을 실제의 배우가 어떻게 커버할 수 있겠습니까. 다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하고 보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가 저는 또 말과 글이 하지못한 많은 부분을 해냈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참 많은 것을 영화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부분에서 봐도 말이죠.

저도 조금 엉뚱한 얘기를 했네요.

Shining 2014-04-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습니다. 아직도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프 파인즈의 연기만큼은 흥미롭던데요. 제가 본 상영관에서는 화면비가 바뀔 때 조정을 하지 못해 일부 장면에서 자막이 짤리거나 몽땅한 비율로 바뀌던데 맥거핀님이 보신 상영관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 보통의 기존 영화관에선 flat과 scope 둘 밖에 맞추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없을테지 하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만든 웨스 앤더슨은 (어쩌면) 자신이 영어권 감독이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회전목마나 고전적인 인형 그림이그려진 틴케이스에 담긴 고급 수제 쿠키. 그의 영화는 제겐 그런 느낌이에요.

덧) 맞아요, 저는 L시네마에서 봤는데 개봉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지금껏 상영하고 있는데 좀 놀랐어요. 그런데 미국 대장님이 별로신가요? 저도 영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데 주변 사람들은 꽤 재밌다고 하던데요. 평도 좋구요(웃음).

맥거핀 2014-04-14 15:24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그 화면비에 대해 정확하게 눈치채지 못했어요. 어..뭔가 살짝 이상한데, 라고 느끼기는 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다른 리뷰들을 보고 알았죠. 뭐 한편으로는 웨스 앤더슨이 고전영화의 어떤 느낌을 전체적으로 많이 살려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구도나 장면들을 많이 집어넣었던 것이고, 일부러 엉성한 느낌의 장면들을 삽입하기도 했겠죠.

그러니까 제가 영화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은 건 그만큼 현대영화에 길들여졌다,라는 의미도 되겠죠. 아무튼 그래서 이동진씨던가요..평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던가...그런 내용을 썼던데, 저는 솔직히 약간 갸웃했습니다. 그런 것을 향수라고 불러도 될까..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었어요. 회전목마는 저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제가 워낙 히어로물을 안좋아하는 것도 있고..사실 좀 지겹지 않나요? 뭐 맨날 그렇게 새로운 악당들이 나오고, 또 왜 그렇게 맨날 결국 히어로들이 이기는지..저에게 영화의 전권을 준다면, 저는 각종 히어로물에 나왔던 악당들이 결국 연합하여 이기는 걸로 끝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어벤저스 촬영한다고 난리떤 것도 왜 그런건지 모르겠어요. 국내영화는 촬영도 못하게 하면서...새빛둥둥섬이 파괴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Shining 2014-04-15 23:12   좋아요 0 | URL
우연히 맥스무비 매거진을 봤는데(산 건 아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더군요) 웨스 앤더슨 특집이 있더라구요. 오오, 재밌게 읽었어요. 혹시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운 기사였어요. 그의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고, 위에도 말했듯이 당최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프로필 부분에 좋아하는 것, 이라고 해놓고 키덜트가 있길래 빵터졌어요. 로알드 달의 영향도 받았다고 하고.

쿡쿡. 악당들이 이겨버리면, 그 다음에 우려먹을(!) 이야기가 없어서 아닐까요? 다음에 두고보자, 크윽.. 해야 또 시리즈가 나와서 돈을 벌잖아요.......킥킥.

2014-04-1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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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늘 느끼게 되는 것은 어떤 책이든지 기대치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신간평가단은 책을 스스로 고르고, 어떤 책을 받아서 읽게될 지 미리 알게 된다는 점에서 보통의 독서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책을 읽기 전에 어떤 기대, 혹은 단정을 은연중에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서 읽고나면 그런 기대와 단정이 바스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책은 매우 좋을 것 같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고, 어떤 책은 별로 흥미를 가졌던 주제도 아니고, 식상한 내용일 듯 싶었으나 예상외로 매우 좋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예상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도 온다. 개인적으로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꼭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같은 책을 읽고 있는 다른 평가단 분들의 글을 읽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알라딘의 모든 책들은 대체로 리뷰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서 읽을 수도 있으나, 평가단의 경우처럼 같은 책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읽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만은 않고, 또 평가단 분들은 대체로 일정 정도 이상의 독서이력을 지니신 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인문 분야의 평가단 분들이 올리는 글들은 (거의 의무적인 마음을 가지고)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인데, 읽을 때면 상당수의 글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고는 한다.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도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기본적인 부분에서도 그러하지만, 많은 그 글들에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며, 같은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즉 이는 기존의 어떤 (나의) 고정된 사유가 바스러지는 것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며, 또 배울 점이기도 하고, 자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간 나름 고민하며 좋은 글들을 쓰기 위해 노력하셨을 다른 평가단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 앞으로도 건필하시라는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또한 좋은 책을 선정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을 평가단 담당자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어떤 분께서 쓰셨듯이 나에게는 (비록 약간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는 일이었을 터. 성실히 일을 수행해주신 그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 이번 평가단에서 좋았던 책 5권

 

마지막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나름의 객관적인(?) 수치를 따르기로 했다. 내가 이번 평가단 도서 중에서 별 5개를 준 것은 다음의 세 권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지그문트 바우만

 

바우만의 이 짤막한 글은 경고이자, 호소이며, 선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노학자의 필사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예언했던 그리스 신화의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올 파국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우리들은 눈앞에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가올 파국을 결코 보지 못한다.

 

 

 

명작순례 / 유홍준

 

책을 읽으면 잠시 다른 세상이 보이는 책이다.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조용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유홍준 교수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춰 세워 예술품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의 깔끔한 만듦새도 인상적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산책자 고유의 리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로드 무비. 그가 제시하는 공간에서의 사유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조각들, 그러니까 일종의 결정적 씬(scene)들이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영화 감상의 기본은 공감이며, 공감을 낳지 못하는 영화는 결코 보는 이를 매료시킬 수 없다. 아마도 이 멈칫거림은 산책자 구보에게, 혹은 언젠가 그 앞에서 구보와 같이 맴돌았을 나 자신에게 보내는 공감과 응원의 흔적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별 4개를 받은 것은 총 6권인데, 팬심을 담아 과학과 관련된 책 2권을 고른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로버트 트리버스

지구의 정복자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기대했던 것이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았을 때에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친밀하지만 낯선 공간 서울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기대했었는데(그래서 추천도서 중 1권으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산책이었고, 말 그대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이번 평가단 활동 중에 가장 좋았던 도서로 선정하고 싶다.

 

 

덧.

휴..드디어 마지막 도서에 대한 리뷰를 썼구나..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 페이퍼를 써야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부랴부랴 써서 올린다. 아..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이 ‘신간평가단’이라는 명칭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딱딱하기도 하고, ‘평가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뭘 평가하나...싶어서 참 민망하다. 이왕이면 우리말 이름으로 하나 새롭게 지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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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평가단' 대신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맥거핀님의 의견이 궁금하네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담아갑니다. ^^

맥거핀 2014-03-07 00:56   좋아요 0 | URL
하하..질문을 한 사람에게 다시 질문으로 받아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런데 저도 막상 생각해보니 마땅한 게 떠오르지는 않더군요.
한 번 생각해보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댓글을 달죠.^^
근데 '신간평가단'은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요..? (나만 그런가...)

희선 2014-03-0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글도 다 찾아보신다니 맥거핀 님은 부지런하시군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시는군요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달랐을 때는 저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 어떤 글(책)에서든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좋을 텐데요

가끔은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때는 있군요 하지만 같은 책을 보고 쓴 글은 거의 안 보기도 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분이 우연히 그 책을 보고 글을 쓴다면 모를까, 그래서 같은 책을 보는 때가 적어요 제가 더 늦게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나서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할 때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1   좋아요 0 | URL
하하..아뇨. 저 위의 글은 그래도 약간 포장을 한 거구요. 물론 위에 쓴대로 인문서평단 분들의 글들은 거의 보기는 하지만, 그렇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도 많아요. 어..저 의견은 조금 이상한데..하면서 반박할 거리를 찾아보거나 혹은 책을 다시 확인해보는 때도 있고, 혼자 툴툴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 그것도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책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니까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근데 특히 이번 서평단 분들은 약간 고수 느낌(?) 나는 분들이 많아서 책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을 많이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소설 부분이나 영화와는 또 달라서 인문이나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 같은 것은 어떨 때는 책 그 자체보다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다른 글들을 보며 더 많이 배우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쓰면 좋을까..정해진 건 없으니까요.
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요.^^

희선 2014-03-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는 위에만 쓰려고 했는데... 댓글저장을 누르니 바로 위에 맥거핀 님이 쓴 답글이 나타났습니다 언젠가도 그런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때는 1분 차이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말을 더해서 몇 분이나 차이가 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4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아무래도 야행성에 가까우신 것 같군요. 저도 요새는 거의 새벽에 알라딘에 오게 됩니다. 컴퓨터 앞에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때가 요새는 새벽 외에는 잘 없네요. 예전에는 일 때문에라도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때도 있었는데..뭐 그래서 '댓글 조우'를 하는 건 좋지만요.^^

아이리시스 2014-03-1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제 끝난다, 그럼 이제 소설리뷰 많이 볼 수 있는 건가요? 신난다, 아싸~+_+ (뒤늦게와서 이러고 있다..) 저는 오늘부터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읽을 거예요. 요즘은 독서가 쫌 뜸하기도하고 책못산지도 한참됐고, 아, 시간없어서 포인트 쌓이는거 오랜만입니다. 좋아요^-^(좋은거맞냐?)

2014-03-15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0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풍경, 장률, 2013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2013

 

 

(위 두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것들이 이어지는 영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의 꿈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지는 장률의 <풍경>과 같은 영화. 꿈이라...꿈. 사실 생각해보면 '꿈'만큼 조금 이상한 단어도 없다.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것, 가상의 것, 허구의 것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 가능성 있는 무엇인가, 희망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꿈'이라는 이 말은 그 자체만 놓여져 있을 때는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양쪽의 어느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장률이 말하는 꿈은 그 중 어느 쪽인가. 일차적인 의미는 전자에 가깝다. 이주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 중에 기억에 남는 꿈이다. 질문이 영화 속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질문도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에 온 첫날밤에 꾸었던 꿈이라든가, 혹은 며칠 전에 꾸었던 꿈이라던가, 혹은 며칠을 반복해서 꾸었던 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꿈들은 조심스럽게 이차의 의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꾸었던 상당수의 꿈에서 그들은 고향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그리워하던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가진 희망, 혹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꿈'이라는 말이 가진 양쪽의 의미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꿈'이라는 말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거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들의 꿈과 그들이 현재 서 있는 곳의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거리. 그들이 꿈을 말하는 이 공간들의 배경은 그들의 꿈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이 인터뷰를 한다. 목공소, 공장, 도축장, 좁은 작업공간, 혹은 작은 자취방이나 아니면 병원. 그들은 단순하고 힘든 노동이 계속 반복되는 공간에서,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제주도에서 가족과 휴양을 보내고 있는 풍경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가장 처음에 나온 노동자의 인터뷰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간은 출국을 위해 있는 인천공항이니까. - 조금 이상하게도 이 인터뷰는 "여기는 한국의 인천공항입니다."라는 마치 기자의 리포트처럼 끝난다. 그리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특별히 지명이 언급되는 경우는 없다. - 이 인터뷰는 이 영화의 일종의 프롤로그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인터뷰 후에 이어지는 것은 먼지가 자욱한 혹은 매우 뿌연 도로의 풍경이다. 그리고 다른 꿈과 괴리된 공간에서의 인터뷰들이 이어진다. 즉 우리는 이 뿌연 공간을 거쳐 이 '거리' 혹은 '괴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에필로그가 붙기전에 이 먼지가 자욱한 도로의 풍경은 반복된다.)

 

즉 장률이 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도) 이 괴리를 계속 반복하여 지켜보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꿈을 담은 이 음성정보와 주물이나 핏물이 쏟아지는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공간에서, 약간은 생기를 잃어보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담은 이 시각정보의 괴리. 장률은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우리가 지켜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장치를 건다. 그것은 이 괴리를 붙이려는 시도의 어떤 으스스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말하는 꿈의 경우가 있다. 이 노동자는 꿈에서 귀신을 만나 도망다니고 불에 뛰어든 꿈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고 있는 이 공간은 병원이다. 그리고 그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큰 화상을 입은 상태이다. 이 꿈과 현실의 무서운 도킹. 혹은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꿈을 이야기하는 이주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저절로 마당에서 움직이는 자전거의 불가사의한 숏을 붙이는 것, 아니면 제주도에 가는 꿈을 꾸었다는 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있다가 지하철이 지나간 후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이주노동자의 숏을 붙이는 것은 꿈의 실현이나 어떤 판타지라기보다는 으스스한 느낌에 가깝다. 즉 화상을 입은 이주노동자가 꿈에서 얘기한 것이 그의 예지가 만들어낸 귀신이라면, 이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귀신이다.

 

   

그러니까 장률은 여기에서 이 괴리를, 혹은 이 거리를 붙이지말고 이것을 어쨌든 계속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에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텐데, 왜냐하면 이 모든 꿈들이 실현되는 것을 억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극장의 객석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혹은 현실에서 그들을 보게 되는 우리는 결국 객석과 스크린만큼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그것을 계속 풍경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나 혹은 괴리는 다른 방식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다고 장률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른 방식'이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가능한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하나는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 괴리를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 반복을 아주 조금이라도 견뎌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견뎌냄이 다른 것을 불러오기를 기대하는 것. (물론 이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말하겠지만 에필로그의 색다른 시도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식의 반복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자본주의 포르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나는 단지 그 반복되는 적나라한 노출 장면들 때문에 포르노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방점은 도리어 '적나라한 노출' 보다는 '반복되는' 쪽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포르노야말로 일단 그 반복이 생명이다. 포르노도 기꺼이 영화의 하나라고 부른다면, 포르노만큼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같은 것을 반복하는 영화도 없다. 매번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단지 배우만 바꿔서, 포르노는 계속 찍고 또 찍어낸다. 그리고 이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동안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한다.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 친구들은 계속 멍청한 대화를 반복하고, 코로 흰가루를 흡입한 다음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고, 여자와 그짓을 한다. 그리고 이 시퀀스는 계속 무한히 반복된다. 다만 그 규모나 상대가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물론 나는 단지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본주의 포르노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물론 여기에는 비난의 의도도 없다. 나는 포르노를 옹호했으면 했지, 욕하고 싶은 입장은 아니다). (많이 이야기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포르노와 다른 야한 이야기의 차이라면 과연 무엇을 잘라내고 있는가의 차이이다. 포르노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여 한 침대에 들어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길게 보여줄 이유도 없거니와 설혹 어떤 판타지의 충족을 위해 길게 보였주었다고 해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건너뛰어 버릴 것이다. 반면 보통의 야한 이야기들은 침대도 중요하지만, 그 침대 이전도 나름 중요하다(물론 침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포르노보다 화끈하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다). 즉 포르노가 침대 이전을 자른다면, 다른 야한 이야기는 침대의 어떤 부분을 자른다. 그런데 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그런 측면에서 조금 재미있는데, 이 영화에서 이미 잘라내 보여지지 않는 것은 침대 이전, 아니 소비 이전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어떤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면 그 영화는 소비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 소비를 가능케 해준 축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나에 비슷한 중점을 둔다. 그런데 이 영화는 벨포트 패거리가 돈을 벌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축약되어 있거나, 거의 희화화하여 오그라뜨린다.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소비, 소비, 소비이다. (포르노가 섹스, 섹스, 섹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소비, 소비, 소비의 강조가 어떤 영화적인 왜곡인가, 아니면 그것이 이 포르노적인 자본주의의 속성인가. 마틴 스콜세지의 강조는 아무래도 후자쪽인 것 같다. 즉 현재의 이 자본주의에서 축적은 그저 우스꽝스럽게 이루어진다. 거의 완벽한 사기로 자본의 축적은 가속화되고(그들이 컨테이너 공장에서 거의 사기에 가까운 전화로 처음 계약을 성사시키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일단 한번 축적된 자본은 알아서 몸집을 불려가며, 무절제한 소비만을 반복한다고 마틴 스콜세지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틴 스콜세지가 우스꽝스러운 화면 앵글과 시각적인 화려함과 정신없는 음악으로 수를 더 놓기는 했지만, 이 구조 자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조던 벨포트가 실존 인물이며,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틴 스콜세지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의 포르노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 스스로가 거의 포르노로 변신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 극대화된 시각적 자극을 거리낌없이 3시간 동안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반복이 다른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3시간 동안 꼬박 앉아서 포르노를 - 그것도 기계적인 섹스와 사정만 반복하는 -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물론 이는 위험한 선택이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에 제시된 대로 보는 이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포르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우리가(미안하다. 내가) 포르노를 보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포르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환상을 이용하여 우리의 일차적인 욕구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이 반복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해도 이 반복은, 동시에 그러면서도 우리의 욕구와 환상을 충족시키며, 일시적이나마 우리를 그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환상은 때로 거대해져 실제로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 제시된 포르노적인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조던 벨포트가 월스트리트에 출근한 첫날 선배 브로커가 그에게 알려준 월스트리트의 첫번째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법은, 큰돈을 벌고 싶은 고객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리는 것이라는 그 얘기(그것은 물론 포르노가 돈을 버는 방식과 동일하다. 고객의 욕망을 이용하여 그것을 더 크게 부풀릴수록 그들은 돈을 번다. 실물을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내내 이어지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연결된다. 조던 벨포트의 강연을 들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사람들로 끝내는 이 마지막은 이 우려를 조금은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본 당신도 혹시 잠깐이나마 눈을 반짝이지 않으셨어요,라는 질문이다. 혹은 당신도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이다.

 

아니면 장률의 <풍경>의 에필로그에서의 카메라의 질주라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견디다못해 질주하고는 결국 쓰러져버리는 이 카메라. 그 카메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장률은,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질문을 제시해줄 뿐 답을 주지는 않는다. 반복을 무엇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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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인가를 되풀이해서 보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참아내게 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세뇌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중독... <풍경>이라는 영화에서는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풍경에서 빠져나와 달리는군요 그거 좋은데요 달리다보면 어딘가 다른 곳에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두번째는... 그런 것도 자꾸 보다보면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지기도 하는군요 그것도 결국에는 돈을 쓰게 하는 것과 같겠습니다 광고처럼...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네요 바로 무슨 말을 하기 어려워서 좀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59   좋아요 0 | URL
저도 별 생각없이 좀 늘어놓자면,

여러가지의 갈림길이 있겠죠. 반복은 때로는 인내를, 혹은 혐오를, 혹은 탐닉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겁니다. 뭐 그 중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겠습니다만, <풍경>은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에 빨려 들어가려는 관객을 꾸준히 거리를 두며 제어하고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반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혐오를 의도적으로 노렸지만, 저는 그것에 상당히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금 더 과잉을 보여줬어야 합니다. 조금 더 역겹게 만들어야 했습니다만, 관객에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너무 많이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상업영화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요.

아이리시스 2014-01-2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 저번 작품 좋았잖아요. 장고. 개츠비는 제가 안봐서. 책읽고 보자 했는데 그 책이 지금 어디.. 옛날에 친구 빌려줬더니 유명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안읽혀서 화장실에 갔다놨다길래 똥냄새 배인 책은 안갖겠다, 너가져라 한 기억이 있는데 그후로 안샀나봐요(또 딴소리). 장고 이미지 좋았는데 그래서 월가의 늑대 먼저 읽자 이러고 생각만..하는데.. 저는 딴소리 제조기인가 봅니다.

장률 감독의 <풍경> 저 풍경.. 작품들이 항상 마음을 끌어당기는 포스터를 가졌다고 매번 생각해요. 뭔가 있을것 같고 그리울것 같고 애틋할 것 같고. 우리나라 감독 중에서는 전수일 감독.. 근데 마음과 달리 보면 졸려고 하고!

문득 <마이 라띠마>랑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은 <겨울왕국>에 빠져서 예전에 좋아한 애니 <눈의 여왕>이랑 현빈.. 현빈 내레이션이 기가 막힌 드라마 생각하고 있어요(흠).

이 영화들은 어려워서 안보고 글로 뭐라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쓸데없는 말만 쓰고 말았어요.


맥거핀 2014-01-29 00:10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댓글에서 냄새나요. ㅋㅋㅋ 아무튼 주인장이 요새 나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자주 못 들르는데, 이렇게 잊지말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카프리오는 더 할 수 없는 적역을 만난 것 같구요. 너무 적역이라 도리어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왜 그렇잖아요. 보기도 전에 왠지 어떤 캐릭터로 나올지 미리 예상이 된달까..예를 들어서 이번에 <남자가 사랑할 때> 같은 영화에 나오는 황정민도 사진만 봐도 대강 어떤 역이고,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느낌이 와요. 물론 예상한 것과 조금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장률 감독 영화는 뭐 그 말이 맞죠. 저도 글은 이렇게 하지만 보다보면은 졸립다기 보다는 멍해지는 때가 있어요. 더구나 이 영화는 계속 인터뷰가 반복되는 구조이고, 더구나 그 얘기도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한 얘기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멍하게 만들다가도 가끔 번뜩이는 순간이 있어요. 어쩌면 영화라는 게 그렇게 버텨내다가 가끔 번뜩이는 순간을 보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사는 것도 그런 거겠죠. 대부분 지루하고 미칠 것 같지만, 가끔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잖아요.

<겨울 왕국>이 매우 좋다고 그래서 보러가고 싶은데, 몸도 마음도 잘 시간이 안나네요. 그래도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한 번 보러가야할 것 같습니다.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영화제도 한 번은 들러줘야 하는데 못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제 서재는 자주 안와도 아이리시스님 새글은 보러가야죠. 글보러 갈께요. 후훗.

희선 2014-01-3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인사 못했으니, 지금 해도 괜찮을 듯하네요 새해 첫달이 거의 가고 있지만, 그래도 설날이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낫기도 합니다 늘 이러지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즐겁게 보내세요(영화를 보며 보내실지도 모르겠군요) 첫달이 가고 있지만, 남은 달 동안 맥거핀 님이 하고 싶은 거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희선

맥거핀 2014-02-03 23:23   좋아요 0 | URL
설날은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간만에 영화 한편 제대로 못본 팍팍한 설날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 힘차게 시작해야겠지요. 희선 님도 2014년 한 해는 하시고자 하는 일들 즐겁게 하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나면 서재도 종종 들르시구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영화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오프닝은 이 영화를 읽는 하나의 방향지시등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관객을 다짜고짜 시민과 나데르의 이혼법정의 심사관으로 앉혔다. 관객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불충분한 정보들을 놓고, 미심쩍은 판단을 해야만 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공항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마중나온 여자. 이들은 분명히 서로 잘 아는 사이인듯 하나, 그 관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감돌고, 그들은 무엇인가 대화하려고 애쓰지만 유리창에 막혀 대화가 전달되지 않거나, 대화하지만 그 대화는 빗소리에 가려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조금 이상한 말이겠으나,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그들은 대화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화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서 우리가 내내 불충분한 정보들에 둘러싸여 불충분한 판단밖에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우리는 대화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들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무엇인가를 판단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이 아쉬가르 파라디가 파놓은 덫이다.

 

즉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에서 말들은 계속 쌓인다. 우리가 처음 알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리고 계속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면, 통상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태는 전혀 다르게 보이며, 판단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영화가 영화적 속임수를 써서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에 따른 최선의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내가 등장인물이라도 비슷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당사자들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어떤 진실이 있지만, 작가나 감독의 속임수에 의해 그 핵심의 진실이 감춰진 (보통의) 추리극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사건의 핵심인 라지에의 유산이 무엇으로 인해 벌어진 것인지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감독이 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당사자들도 그 사건에 대해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라지에를 밀친 나데르는 자신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라지에 역시 유산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데르 때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건의 진실, 즉 사미르(타하 라힘) 부인의 자살 이유도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자살 시도의 장면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설혹 그녀가 죽으려고 한 날 그녀의 행적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몇몇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야기는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즉 문제는 무엇이 답이고, 진실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무엇을 믿을 것이며, 그 믿음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는 그 어떤 답도 확실한 근거를 가진 확실한 답이 아니며, 어떤 선택이든 불확실한 무엇인가가, 즉 그 불확실함이 가져다주는 미심쩍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라디의 영화는 전작과 조금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전작에서 한 걸음 나아간 선택을 한다. 전작에서는 마지막에 우리는 다시 어떤 판단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파라디는 그 선택의 한가운데에서 어떠한 조망이나 믿음도 주지 않고 영화를 끝냈다. 그런데 이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마지막은 조금 흥미로운데, 아내의 병원에 간 사미르는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날지 모르는 아내를 놔둔채 병원을 돌아나오려고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영화를 끝낸다면 이는 전작과 동일한 끝맺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미르는 별안간 다시 뒤돌아 병실로 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으며 향수냄새에 그녀의 손이 반응하는지를 살핀다. 이 끝맺음, 그러니까 아내의 손과 맞잡은 사미르의 손을 오랫동안 비추며(방금 말한 이 일련의 장면들은 롱테이크로 찍혔다)  끝내는 이 마지막은 우리에게 다시 믿음의 문제를 상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미르의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독이 제안하는 우리의 믿음 작동 요구이기도 하다. 그녀의 손이 사미르의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그 손은 역시 아무 반응이 없는 손일까(내가 여기에서 떠올린 것은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이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나, 혹은 보지 못했나). 양쪽의 두 가지의 믿음. 그러나 어떻게 믿든 간에 사미르의 그 꼭 쥔 손은 단순한 진실게임이 아닌 그가 이제 감내해야하는 나머지 것들을 말해준다(딸 루시가 말한 진실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 마리(베레니스 베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굳이 다시 나가서 딸을 데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파라디의 이 새로운 유형의 믿음의 게임, 혹은 도덕극은 지금의 세계에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세계. 이와 달리 예를 들어 중세의 도덕극(morality play)에서는 거대하고 확실한 저편의 세계가 있고, 등장인물들은 매우 성스럽거나, 매우 어리석거나, 혹은 매우 악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유형화되고, 유형화된 인물들은 결국 어리석은 주인공, 그러니까 우리 인간을 선의 길로 이끈다. 그러나 아쉬가르 파라디의 세계에서는 모든 인물들은 비도덕적인 면이 있으나 대체로 도덕적이다. 똑똑하고 도덕적인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놓여진 공백이다. 그 괄호로 이루어진 공백들, 바로 이러한 오늘의 세계에 당신을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답을 적어낼 것인가. 혹은 그 공백을 비워둔채, 고통을 감내할 각오를 가지고 '답없음' 혹은 '모두정답'을 기꺼이 선택할 것인가. 나는 지난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리뷰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영화로 치르는 윤리학 시험'이라고 썼었는데, 이 시험은 어쩌면 모든 답이 정답이거나, 모든 답이 오답인 것 같다.

 


덧.
이 수입사의 번역제목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적극적인 제목을 굳이 달았는지 모르겠다. 이 제목이 아쉬운 것은 앞서 말한 오프닝 때문이기도 한데, 차에 탄 그들이 뒤에서 부딪힌 'Le Passe(과거)'라는 이 영화의 원제를 와이퍼가 지워버리는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감독이라면 상당히 짜증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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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1-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제가 많이많이 보낼게요 :)

맥거핀 2014-01-10 00:14   좋아요 0 | URL
응..고마워요. 아이리시스님. 새해 복많이 받아요. 제가 요즘 알라딘에 자주 못와서 늦었어요. 흑흑.

희선 2014-01-23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가 많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알아내기 어렵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읽지 않았지만 온다 리쿠 소설 에는 어떤 사건에 대해 여러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조금씩 다르답니다 이런 일은 흔히 있기도 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9   좋아요 0 | URL
네..그런데 아무리 정보를 그러모아도 결국 알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런 문제를 놓고 싸우지만요. 그리고 쉽게 단지 그건 우리가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정보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 때야말로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말 '그 때'인가, 즉 이것이 믿음을 작동시켜야 할 때인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먼저 답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