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좋았던 영화 10편 (무순)

 

 
설국열차, 봉준호

후쿠시마의 잔해 제거를 위해 노숙인들이 헐값에 투입되었다는 세밑의 기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설국열차에서 그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들어가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윌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가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세계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때 봉준호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칸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집단의 서사를 개인의 서사로 능숙하게 압축시킨 다음,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보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 각자의 비어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든다.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과 코맥 맥카시는 관객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다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차가운 성찰을 요구한다. 올해 최고의 공포물. 리들리 스콧의 의외의 간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가 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편으로 리듬의 조절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절한 포인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종종 멈춰서서 관객을 차분히 성찰하도록 내버려둔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타비아니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고대 로마와 그것을 연기하는 재소자들의 과거와 그들이 보여주는 현재의 무대.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시저'는 누구인가.

 


스토커, 박찬욱

단 한 숏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는다. 박찬욱은 늘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번에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한 세계를 마감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홍상수의 명계(冥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홍상수의 줌은 누군가를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그 명계에서 해원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집요한 도덕극이자 말(言)이 만들어내는 환영들의 향연. 전작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롭게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의 스릴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블러드 브라더, 스티브 후버

진짜 기적이 있는지 늘 의심하는 나와 같은 자들은, 진짜 기적을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EIDF에서 만난 단연 올해의 다큐.

 


일대종사, 왕가위

모든 것이 쇠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으며, 한껏 자신만만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소한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왕가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경의를 보낸다.
 



2013년 보았어야 할 영화 10편 (무순)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잠 못 드는 밤, 장건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풍경, 장률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제로 다크 서티, 캐서린 비글로우

가족의 나라, 양영희

필름 소셜리즘, 장 뤽 고다르

비념, 임흥순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1-0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대종사, 풍경,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언급된 것 중 보았어야 한다고 (특히) 생각하는 영화 3편이에요. 아 아쉽다!
2. 영화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모두 고개 끄덕이게 하는...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거핀 2014-01-03 20:35   좋아요 0 | URL
아..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러서 인사해주시고..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경은 저도 아직 못봤지만(사람이 너무 없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일대종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강추할 수 있습니다.^^ 아..아직 개봉하고 있는 영화중에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영화도 참 좋아요.

2014-01-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알면서도 그 영화 못 보고 있어요.ㅠㅜ 심지어 동네 극장에서 하는 월터..도 못 보고 있는!! 이대로 출국 2월초 귀국하면 봤어야 할 영화에 월터와 아델이 떠억하니 오르겠죠. 넘흐 보고 싶었던 이무지치의 사계마저도 1월에 내한 공연!!!!!!!! 뭡니까.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왜!!!!! 난 너희 나라에 지금 갈 건데! 진짜 저주받은 타이밍요...ㅠㅜㅜㅜ /아 풍경....ㅠㅠ 장률 감독 GV도 기회 있었는데 못 가보고...

맥거핀 2014-01-03 21:07   좋아요 0 | URL
아..저 사실은 월터..도 봤어요,라고 염장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건 뭐 염장을 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섬님인듯..이태리요? 저는 이 팍팍한 서울에 갇혀서 TV속에서 그네 언니 얼굴이나 보고 있는데..

저는 영화 같은 건 안봐도 좋으니..(;;) 어디나 좀 갔으면 싶은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디 갈 일이 없어요. 매일매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 속의 공허함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요(라고 하지만, 사실 술도 좋..).

2014-01-0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안 달려고 했는데 우껴서.. 그네 언니야 트윗 탐라 조정하듯이 인생에서 편집해 주시고, 사실 술이 좋다고 괄호 속에다 부끄럽게 고백하셨으니 행복 인증이네요. 알콜은 어디서나 손닿는 곳에 있어주시니.. 일상 속 찰랑이는 행복...후후후 근데 이건 어떻슴까? 전 이딸리아에서 싸고 맛있는 와인, 좋은 친구로 날밤을 보낼 거라는... (월터, 그래도 제게 염장입니다.ㅋ 휴~)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어제 저도 조촐한 신년회가 있어서 와인 마셨어요.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와인 정도는 안되겠지만, 뭐 그래도 많이 먹었으니..질보다 양으로다가..(정신승리중. ㅋ)

근데 월터씨는 좀 별로였어요. 그거 아시죠? 남들 다 웃을 때, 하나도 안 웃겨서 소외되는 기분..개인적으로는 왜 우리나라에서 평들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외국에서는 평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탈리아 잘 다녀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가연 2014-01-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본 영화가 하나도 없... ㅋㅋㅋ 정말 삭막한 작년을 보낸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다 안타깝네요. 뭐 그런데 가연님은 그 이상으로 좋은 책 많이 보시니까.^^

Shining 2014-01-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를 뒤늦게 봤어요. 덕분에 제 페이퍼에선 언급도 안 된;;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작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최고작일줄 알았는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한 컷도 낭비하지 않은 철저함과(편집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이라죠) 그러나 넘치는 서정과 설정숏도.

새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구정을 찾을 거에요, 그래서 아직 나이를 먹지 않은 거라 믿고 그래서 인사도 안 하는 겁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실은 연말연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들어오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건강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맥거핀 2014-01-06 18:43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 시간이라는 것의 무게를 관객에게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 영화입니다.

사실 위의 BEST10은 마지막에 두 개의 좋은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기 때문에 나온 글입니다. 그 두 개의 영화를 연말에 못 만났으면 리스트 같은 것은 안 썼을 거예요.ㅋ

저도 연말에 이웃분들에게 다 인사를 쓸까, 아니면 다 하지 말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죠. 뭐.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받으니 참 민망하네요. 저야말로 Shining님의 좋은 글을 잘 읽고 있으니,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해야겠군요. 어디 도망가지 마세요.하하.

아..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희선 2014-01-2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말(글말)을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졌군요 저는 영화는 한편도 못 봤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데 한번도 안 가봤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사람이 학교에 더 자주 늦기도 하잖아요 꿈 이야기가 나오는 책에 영화는 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저는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는 보는 것(듣기)이니까 더 생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희선님. 그렇군요. 영화를 안 보셨군요. 사실 제 서재의 상당수의 글들이 영화에 대한 글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래서 한편으로 여러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서재에서 영화란 맥거핀입니다(그러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놓고 늘 그것과 어쩌면 관계가 없을지 모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제 희망입니다만, 솔직히 아직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그거야말로 어쩌면 대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뭐 아무튼 저는 그럴 능력이 턱없이 안됩니다.^^

영화관에 있다가 나오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 같은 영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운이 나쁘면 가끔 진짜 꿈을 꾸기도 합니다.
 

 

 

 

 

 

 

 

 

 

 

변호인, 양우석, 2013

 

 

(영화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긴 글을 쓰기는 생각이 짧아 어려울 것 같고, 짧은 글로 대신하고 싶다. 영화 <변호인>은 굳이 따지자면 사건 중심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중심에는 변호인 송우석(송강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영화 <변호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캐릭터를 양분하여 전후반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 송우석이 정겨운, 밉지 않은 속물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애를 써서 영화의 전반부에 캐릭터를 구축한 다음, 영화는 후반부에 그 애써 구축된 캐릭터를 이제 지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것은 대중영화의 공식에 그렇게 크게 어긋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내 유지되는 캐릭터들도 있지만, 이렇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일 경우 중간에 캐릭터가 탈바꿈하는 것은 흔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에 비하여 탈바꿈의 고리가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 송우석이 변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이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가능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들의 포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식의 접근. 그래서 그는 고교동창 기자(이성민)와 싸울 때에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냉소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노력하기 싫으니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약한 태도일 뿐이지,같은 식의 말들. 이렇게 어떤 태도와 정치적인 스탠스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모습에서 그 태도는 여전히 후반부에도 남아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자세는 어떻게든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무죄방면 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뀌었는데(혹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생겼는데), 이는 어쩌면 앞의 질문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태도는 바뀔 수 없어도,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뀔, 혹은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 혹은 상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을 고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치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것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것은 도리어 어떤 태도에 가까운 것이고, 송우석이 눈을 뜨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도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송우석은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각성에 가깝고, 그런 각성은 통상 느린 것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런 각성은 (기본 상식을 갖춘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끈덕지게 물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영화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변하는(각성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제는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에는 당연히 준비된 대답이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영화가 아니예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거든요. 그런데 이 준비된 대답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가 의도한(혹은 의도하지 않은) 이차적인 질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인간 노무현을 환기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즉 영화의 2부를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끝, 그러니까 99명의 변호인이 변호해 준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만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일종의 자기기만이나 자기위안에 가깝다. 우리가 노무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나머지에 대한 씁쓸함을 견딜 각오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니, 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송우석이 박종철 군의 죽음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추모는 원래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그의 말과는 달리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99명의 변호사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한명 일어설 때,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이야기하던, 아무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조금은 우회해서 찾고 싶은데, 예를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어 악질적인 고문 경찰 차동영(곽도원)이나 건설사 대표의 아들(류수영)과 같은 도리어 어떤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무서워보이는 캐릭터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송우석의 앞과 뒤만을 보고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 그러니까 빨갱이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차동영은 과거만을 보고 있고, 민주주의를 하고 싶지만, 현재는 아직 그 역량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건설사 대표 아들은 미래만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얽혀 있거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현재의 인간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국가의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혹은 미래의 무엇 때문에 현재의 국민은 희생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왜곡된) 국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우석은 일갈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가는 국민입니다! 현재 눈 앞에 있는 이 푸른 수의를 입은 국민을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만족을 위해, 노무현이라는 실제의 기표를 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일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씌워야만 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내가 포함된, 그가 수장이었던 우리의 정부는 무엇이라고 답했나. 비디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를 보았나, 보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쓸씁해진다. 국가가 국민이라고 답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이것은 단지 영화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씨네 21>에 실렸던 이 영화 <변호인>에 대한 정한석의 글은 노무현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왜 그것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한석은 말한다. "<26년>과 <그때 그사람들>은 저들이 반드시 전두환과 박정희라는 인물 자체로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변호인>은 영화 안에는 송우석이 있고 그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요한 건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물과 바깥의 인물.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보는 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떠넘긴다(예를 들어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허구입니다."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그 간극을 극도로 줄여 현실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응축시킬 것이고, 누군가는 그 씁쓸함에 괴로워하며 소주 한 잔을 들이킬 것이고, 누군가는 비웃으면서 평점 1점의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간극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이고,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다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이 씁쓸함에 맞서는 작은 내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간극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혹시 각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뜻 보면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결국 각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라는 송우석의, 혹은 노무현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쩌면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태도가 그의 비극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간 포기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답은 어렵고, 짧은 글을 쓰겠다고 했으니 이제 글을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저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변해버린 자기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환멸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이든, 자신에 대한 환멸이든(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영화의 처음을 생각한다. 선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박카스를 하나 꺼내 꿀꺽 마시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나중에 그에게도 다른 의미에서의 박카스가 필요했다).


덧.
짧은 글로 대신하겠다,고 처음에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뒷 부분은 그저 씁쓸함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여두자면 이 영화가 올해 조금만 더 빨리 개봉했더라면 상당수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어쩔 수 없이 또 송강호에게 줘야만 했을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12-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설적이게도....일배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의 무지막지한 별점테러가 이 영화를 살려주는 역작용을 하고 있어 보이더군요...^^

맥거핀 2013-12-20 13:55   좋아요 0 | URL
예전에도 말씀드린적이 있지만, 본 사람들이 그러는 거에 대해서는 전혀 뭐라고 할 마음이 없습니다만, 왜 안본 사람들이 그러는지..(뭐 보았다고 해도 '감성팔이'니 뭐니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지만요. 뭐 그 친구들에게 영화란 원래 감성을 파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먹겠죠.)

프레이야 2013-12-2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성에 대한 영화군요. 그분을 연상시키는 영화라 꼭 보자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잖아도 볼 생각이었지만 맥거핀님의 리뷰가 또 더욱 부추깁니다

맥거핀 2013-12-23 14:39   좋아요 0 | URL
누구의 이야기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영화 자체적으로도 그렇게 흠잡을 만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쯤 볼만한 영화인 것 같아요.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2013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본 코맥 맥카시의 작품은 겨우 3편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봤다는 말을 하기가 조금은 애매한 것이 소설로 읽은 것은 <로드> 한 편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카운슬러>는 영화로 봤다. 그럼에도 감히 코맥 맥카시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파악한 그의 세계는 어긋나 버린 공간에 놓인 자들의 세계이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공간에 불려나와 서있는 사람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세계, 혹은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세계를 본다. 예를 들어 그들은 <로드>에서는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이후의 세계 어느틈에 놓여져 있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보는 것이 더 좋았을 단발머리 사신 안톤 쉬거를 본다. 그것은 영화 <카운슬러>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카운슬러(마이클 패스벤더)가 보게 되는 세계는 그가 꿈에서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 끔찍한 평행우주다(이 영화 카운슬러는 이 두 가지를 평행하게 놓고 초반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전혀 섞일 수 없는 두 세계가 교차되며 영화가 전개된다. 이 무시무시한 대비. 예를 들어 영화의 중반부 총에 맞은 마약운반원이 트럭을 몰고 겨우 도착한 낡은 주유소. 마치 F1의 피트 스톱처럼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어린아이가 포함된 그들은 도대체 이 일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실수이든, 혹은 다른 누구의 잘못이든, 혹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든 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간과 공간, 놓이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인다. 아마도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시간과 공간이 있을까. 그러나 코맥 맥카시는 능히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자이다. 그것을 <카운슬러>는 냉혹하게 그려서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대사로서 가르쳐 주기도 한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그리고 우리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에게 누군가가 <카운슬러>가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입니다,라고 답할 것 같다. 아니,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라니, 이거 무슨 허무개그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카운슬링을 이어붙이는 영화다(돌고도는 마약이나 누가 범인인가라는 문제는 그저 맥거핀이다). 한 인물은 어떤 상황에 대해 모르거나,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거나, 선택의 순간에 놓여져 있고, 다른 한 인물은 그에 대해 카운슬링을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영화는 중간중간 약간의 흐름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카운슬링의 시도들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인 카운슬러의 사업파트너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또다른 중개인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 같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보석판매상, 혹은 성당의 신부, 혹은 위험한 골목에서 음식을 파는 사내 등등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카운슬링을 하거나 카운슬링을 받는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하고도 재미있어 보이는 사실은 가장 카운슬링을 할 것처럼 보이는 명칭도 카운슬러인 주인공(물론 카운슬러counselor는 변호사라는 뜻도 있다)은 사실상 한번도 카운슬링을 하지 않고, 받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카운슬링이 명백히 필요해 보이는 시점, 예를 들어 감옥에서 여죄수를 만났을 때나, 라이너가 말키나(카메론 디아즈)의 이상한 성적 취향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시시한 농담으로 일관하는데, 이 카운슬링의 부재는 결국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첫번째 카운슬링의 부재는 그를 결정적으로 놓이지 말아야 할 세계로 내몰았으며, 또한 그는 두번째에서는 라이너의 이야기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어야만 했다.)

 

 
어떤 것이 계속 이어질 때,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조금 쉬운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그것의 끝과 마지막을 보는 것이다.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과 마지막 카운슬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판매상의 카운슬링이다. 그가 얘기해준 좋은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법, 그것은 반짝거리는 부분보다도 흠집을 보는 방법이며, 그것은 명백히 경고이고, 동시에 영화의 나머지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길한 신탁으로 시작하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대략 짐작한다(동시에 그 다이아몬드 판매상은 이런 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는 죽음에 대한, 혹은 죽음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진 자는 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재산을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중국으로 떠난 말키나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경고의 카운슬링은 영화의 전반부의 카운슬링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새로 위험한 사업에 뛰어드려는 카운슬러에게 라이너도 경고하고, 웨스트레이는 보다 강도높게 경고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카운슬러는 그것을 거의 귓등으로 흘려듣고, 이것은 영화의 뒷부분을 익히 예상하게 만든다. 그 경고는 카운슬러에게만 닥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말키나는 카운슬러의 약혼녀 로라(페넬로페 크루즈)에게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짜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경고의 의미처럼 보인다. 그것을 네가 가지고 있는 의미 혹은, 그것을 감수하기 위해서 그의 약혼남이 뛰어든, 혹은 버린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로라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결국 그의 대가를 치른다. 물론 그녀가 치러야 하는 대가보다 엄청나게 큰 대가였지만.

 

즉 우리는 흔히 카운슬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주로 선택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선택할까, 혹은 저것을 선택할까 하는 갈림길. 그러나 영화가 이야기해주는 것은 사실 이 카운슬링을 받는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택의 갈림길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쳐왔고, 듣게 되는 것은 그것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선택은 어떤 행위(바로 이 카운슬링)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빌어먹을 카운슬러가 아니라 바로 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른 세계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말대로 실수를 한 세계와 실수를 되돌리려고 하는 세계는 이미 다른 세계라는 점 말이다(그리고 물론 그 실수가 거의 회복된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모든 카운슬링은 실패한다. 결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제시되는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위에서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라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즉 영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계속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영화다. 카운슬러는 다이아몬드 판매상에게 경고를 들었지만 흠집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라이너와 웨스트레이에게 경고를 받았지만 사업에 뛰어들고, 라이너는 카운슬러에게 말키나의 이상한 성적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안들은 걸로 해달라고 하며, 로라는 말키나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신부는 말키나의 고해성사, 즉 그녀에 대한 카운슬링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카운슬링의 실패를 보고자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카운슬링에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을 다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집에 앉아있는 카운슬러에게 술집의 주인은 카운슬링한다. 여기는 밤이 되면 나가면 총을 맞는 위험한 곳이니 조금 있다가 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카운슬링은 역시 실패하고, 카운슬러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기어이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나 어쩌면 총을 맞기를 애타게 바랬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총알이 쏟아지는 무서운 공간이 아니라, 총기에 희생당한 소녀들을 추모하는 집회의 현장이다. 이것은 그가 보고 싶지 않았던, 혹은 보지 말았어야 할 어떤 세계일까, 아니면 어떤 연대의 공간, 혹은 그를 앞으로 다른 길로 이끌 수도 있는 희망의 신호일까. 어떤 절망이나 어떤 희망이나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섣부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이며, 그가 다른 세계에서는 아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을 세계임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실패한 카운슬링이 인도하는 것은 그가 애타게 바랬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전혀 모르는, 그래도 여전히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는 살아있는 세계이다.

 

그것을 코맥 맥카시의 어떤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말한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코맥 맥카시는 그것을 냉혹하게 그리며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그 냉혹함에서 어떤 아이러니와 미세한 의지를 조심스레 느낀다. 살고자 할 때는 죽음으로 가까이 보내지만, 그가 다시 기꺼이 죽고자 할 때 끝끝내 코맥 맥카시는 그를 살려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세계를 본다. 그것은 분명 그가 보고자 한 세계도 아니었고, 그가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 세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적어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살아남아서 본 그 세계란 또다른 세계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세계가 어떨지는 그 누구도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다. 혹시 어쩌면 그것은 더 잔혹한 것일까. 영화의 후반부에 카운슬러가 들은 여자친구가 죽고 시인이 된 남자의 이야기처럼, 살아남아 시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 더 잔혹한 것일까. 그런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코맥 맥카시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그래도 시가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지 않을까). 다만 이 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선택된 세계이다. 그는 그가 벌인 일에 대해서 살아남아서 어쨌든 마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는 어찌되었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절망이 있든, 혹은 한줌도 안되는 희망이 있든.  카운슬링은 필요가 없다. 어차피 선택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내가 이미 한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2008년 4월 30일에 쓴 글입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의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기억은 만년으로 해도 되겠습니다...

맥거핀 2013-11-28 00:56   좋아요 0 | URL
오...왠지 그 말을 하는 금성무의 얼굴을 상상해버렸습니다. Mephistopheles님이 닮았다고 믿을께요.

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기대에 못미치겠군요..(이참에..페이스오프를..??)

맥거핀 2013-11-28 22:29   좋아요 0 | URL
그냥 금성무로 기억하고 싶어요. 제 판타지를 위해. 훗.^^

넙치 2013-11-2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극장에 가기 전후의 기억으로 방부처리 돼는 거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좋아서 왕가위 영화에 한동안 충성심을 바쳤는데 나이들고 다시 보니 내가 뭐 때문에 열광했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답니다.-.-;;어렴풋하게 짐작은 하지만 그 나이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기도.ㅎㅎ;

맥거핀 2013-11-28 01:00   좋아요 0 | URL
네..영화라는 게 참 시간이 지나면 영화의 내용보다는 정말 그와 관계없는 다른 기억,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대체되죠. 저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대체로 개인적인 추억이 관계된 영화들입니다. 그래요? 저는 왕가위 영화는 옛날에도 좋았고, 지금도 좋고, 다시 봐도 좋아요. 물론 그 때 좋은 이유와 지금 좋은 이유는 다르겠지만요.^^

감은빛 2013-11-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역시 맥거핀님의 글은 참 좋네요.
저는 [동사서독]을 교수님 추천으로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 시절엔 영화란 때려 부수거나, 날아다니거나, 총질하는 액션 영화 위주로 보았고,
간혹 야한 장면이 조금 들어간 공포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를 주욱 이어서 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어요.

이 글 읽고 나니, 다시 찬찬히 보고 싶어지네요.

맥거핀 2013-11-28 01:05   좋아요 0 | URL
음..<동사서독>을 추천하는 교수님이라..어떤 분이실지 궁금하군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참 90년대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용적으로 볼 때도 홍콩반환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앞둔 홍콩의 어떤 분위기가 녹아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혼돈과 과잉, 그러면서도 어떤 특유의 정서가 있다랄까요..그 때 극장에서 보았어야만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쉬워요.

감은빛 님의 좋은, 인간미 나는 글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2013-11-2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경삼림, 95년에 개봉관에서 봤어요. 그치만 밤샌 후 이전 영화의 기억을 안고 피폐한 상태로 비됴방에서 비몽사몽 본 맥거핀 님 경험이 추억으로선 더 훌륭한 듯요.ㅎㅎ 스틸라이프는 역시 개봉관에서 봤는데, 잠과 꿈 사이사이로 스틸 사진처럼 장면 장면 끊긴 채로 봤지요..ㅋ

맥거핀 2013-11-28 01:28   좋아요 0 | URL
드디어 진짜가 나타나셨군요.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보신 분. 섬님도 그 당시 개봉관에서의 추억을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얘기거리가 많이 나오실 것입니다요. <스틸라이프>는 저도 개봉관에서 보기는 했어요. 저도 좀 멍하니 봤던 것 같구요. 마지막 장면에서 이건 뭐지 싶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섬님 오랜만..잘 지내세요?

2013-11-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개봉관 추억. 이러면 뭐 줄줄이 안 나올 영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책도 안 읽고 영화도 많이 안 보는데, 지난 얘기나 반추하며 서재 생활을 해 볼까나요~ㅋㅋ 스틸라이프는 그렇게 좋게 본 것도 아닌데 장면 장면의 기억은 남더군요. 배경이 남다른지, 영화가 남다른지 모르지만요.^^
저는 왜 맨날 오랜만일까요? 자주 글 좀 남겼으면 하며, 저 자신에게 바라는 소망이~ㅋ 잘 지내긴 합니다. 가을도 좋았고, 겨울도 좋고~~

맥거핀 2013-11-28 22:40   좋아요 0 | URL
섬님도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여러 재미있는 추억이 많이 나올듯 한데요. (뭐 지방이 더하지만) 서울에도 참 사라진 영화관들도 많고 해서요.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늘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스틸 라이프는 영화를 볼 때에는 무슨 얘기인가 좀 어리둥절했는데, 영화를 보고 여러 글들을 읽으며 뒤늦게서야 많이 생각하게 된 영화입니다. 그게 남다른 영화라는 증거일까요?

잘 지내신다니 좋습니다. 좋아요.

네오 2013-11-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플픽 일대종사네요,,왕가위를 이야기하면 추억을 안 말할수는 없죠,,ㅋㅋㅋㅋ 저도 중경삼림으로 그의 필모를 시작했지만 아니 어쩌면 내 희미하게나마 영혈남아일수도 있겠군요,,저는 처음중경삼림보고 친구들에게 타란티노뻬껴네 하며 주절주절 떠든게 생각이 나네요,, 그이후 마음을 고쳐잡고 그를 다시 숭상하긴 했지만 지금은음 별로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요^^,,누군가가 왕가위 베스트를 뽑아길래 저는 그러한 마음에 동참하고자 일위 2046, 이위 동사서독, 그리고 삼위는 화양연화 이정도요,,(앗 나도 한번 추억에 젖어 왕가위를 써볼까나;;;;;)

맥거핀 2013-11-28 22:47   좋아요 0 | URL
아..왕가위 영화하면 다들 누구나 추억 한가지 씩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만의 왕가위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군요. 아..<열혈남아>도 있었죠. 영화보다는 음악이 더 생각나는 영화...

왕가위 베스트라..저도 심심한데 꼽아볼까요. 1위는 중경삼림, 2위는 일대종사...3위는 이거 참 애매한데...2046하고 아비정전 중에 무엇을 꼽아야할지...

Shining 2013-11-2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저를 위해(?) 가져오신 글인가요? 어쩐지 뿌듯해지는데요(웃음).

저는 가장 처음 본 영화가 중경삼림이었던 것 같고 극장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비디오나 비디오나 비디오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는 작년엔가 VOD로 봤는데 기억 나는 장면은 블루베리 케이크였던가 밖엔;; 그의 영화는 (제게) 영화의 제작이나 개봉 시대가 아니라 제 머릿속에 90년대에 대한 관념 자체. 몇 번이고 돌려본 비디오의 낡은 줄과 약간 튀는 소리까지도 하나의 영화처럼 기억이 되요. 그러고 보니 왕가위에 대한 추억을 쓰라면 페이퍼 몇 개쯤은 다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독인 것 같아요. 회상같기도 하고 회한같기도 한 추억.

저는 DVD를 구매해도 코멘터리를 잘 안 보고 안 들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되네요.

Shining 2013-11-28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에서 하는 영화를 하루에 세 편 몰아서 본 적이 있어요, 하루는 세 편 다 뮤지컬 영화였고 하루는 또 다른 주제였고 그랬는데. 다같이 영화를 봤는데 일행의 반은 잤고 나머지 반의 반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좋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난 좋았는데, 라는 말을 삼키고 말았어요. 다같이 같은 영화를 본다고 결코 같은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뼈 아픈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죠. 근데 이상하죠? 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장면은 대충 기억이 나고 마음 먹고 찾으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이제는 뭐, 모르면 어떠냐 싶은 마음이에요(하하).

나중에 보니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은 트뤼포 것으로 기억하고 잠깐 본 자료 때문에 에릭 로메르의 영화 한 편을 다 본 줄 알고 착각도 하고. 생각해보면 제대로 본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계속 영화를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고 기억한다고 믿는게. 가끔은 신기해요 제 자신이.

덧) 댓글이 길고 중언부언이라 죄송합니다(꾸벅).

맥거핀 2013-11-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이 예전 왕가위 영화 얘기하시길래,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이 나서요. 근데 요즘에 무슨 왕가위 회고 주간인가요? 서울에도 왕가위 영화 특별전하던데..별 관심없었는데, 예매자들 대상으로 왕가위 친필 싸인 DVD를 준다는 이벤트에는 좀 혹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왕가위는 가히 90년대의 아이콘이라 불릴만하죠. 당시 영화 좀 본다 하는 친구들은 왕가위 얘기 안하는 친구들이 없었죠. 이제는 좀 지나간 옛이름 같이 여겨지기도 하지만, 얼마 전에 일대종사 보고는 와...그래도 왕가위다,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아..그렇군요. 저는 코멘터리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어떤 영화들은 코멘터리를 듣기 위해 DVD를 구입하기도 합니다. 물론 또 그중 상당수의 영화들은 아이 참 정말 내용 허접하네, 싶은 코멘터리들도 많지만..아무튼 확실히 칭찬만 하는 코멘터리보다는 까는(?) 코멘터리들이 재미있기는 해요.^^

맥거핀 2013-11-28 23:21   좋아요 0 | URL
네..같은 영화를 봐도 다들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나쁨에도 농도가 있고, 또 좋음에도 농도가 있죠. 아무튼 그 때는 대학 잔디밭에 턱 앉아서 영화를 보던 그런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추우니, 바닥에 풀 뭍으니, 소리가 제대로 잘 안들리니 불평하면서 안보겠죠. (쓰다 보면 슬플 줄 알았는데, 감정이 메말랐는지 안 슬프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예전에 대학 때 이러저러 본 영화들은 기억이 잘 나는데,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은 잘 기억이 안나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약간 그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데, 이제 기억보다는 기록에 의존하게 되요. 그리고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예전에는 기록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는 했었는데...영화들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내 기억력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훨씬 둔감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아마도 맨 마지막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래비티 Gravity, 알폰소 쿠아론, 2013.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그래비티>는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중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상한 영화다. 아니 분명 이 말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영화로 인해 많이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와 근접한 우주 공간에는 여전히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물론 지구와 멀어진다고 해서 중력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주 미미하기는 하나 중력은 여전히 작용한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적했듯 <그래비티>는 실제와 맞지 않는 영화 나름의 과학법칙이 존재한다. 아무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과학법칙들이란 '영화에서 말한' 과학이다). 그런데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런 중력과 (위성이) 지구를 도는 원심력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여전히 힘의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기는 힘과 회전하는 힘. 영화의 주인공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회전하는 힘, 즉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잔해들에 의해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렀다가 당기는 힘, 즉 지구의 중력에 의해 살아 돌아온다. 전혀 멋대가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애초에 무(無)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소리도 산소도 없다.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와 같은 '없다' 시리즈를 메인카피로 내세웠을 때, 그것은 그 대신 보여줄 다른 '꺼리'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것들이다. 즉 소리도 산소도, 그리고 중력도 없는(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뉴턴의 구닥다리 법칙들이다. 예를 들어 줄이 끊어진 스톤 박사는 한 번 돌기 시작하더니 계속 돌며 떠밀려나간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돌며 떠밀려가면서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 (지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우주에서 뉴턴의 관성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모는 무서운 역학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길에서 그녀를 구원하는 것 역시 뉴턴의 역학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말이다. 우주에서 우주선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뒤 꽁무니로 무엇인가를 맹렬히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 힘의 반작용으로 우주선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이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스톤 박사가 소화기를 추진체로 이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이동하는 장면이다.  

2.
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로 나타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극의 초반부를 이루고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들, 예를 들어 우주인들과 지구의 본부(휴스턴)가 교환하는 대화들, 그리고 우주인들이 교환하는 이야기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도 있지만, 외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농담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그 사이에서 확인받고 싶은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선과 우주선 외부의 우주인을 연결한 물리적인 끈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니 그들은 우주선과 연결한 물리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보다 우주선과의 교신, 즉 정신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 더 큰 멘붕에 빠진다. 끈을 잡아당기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신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우주선으로, 혹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여전히 작용-반작용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세계는 관성의 세계, 죽음과 가까운 세계이다. 영원한 회전, 혹은 줄을 손에서 놓고 영원히 멀어지는 것. 그것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보여지거나 이야기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아이를 잃어버린 스톤 박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몇 시간동안 끝없이 운전만 했다고 말한 경험은 그것은 관성에 대한 투항일 것이었다. 관성에 내맡겨서 자신을 죽음으로 가까이 내모는 것이다. 아마도 스톤 박사가 기꺼이 먼 우주로 떠나온 것도 분명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을 제외하자면 이 곳은 관성의 세계니까. 영원히 지구 주위를 도는 세계. 위성은 한 번 지구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엄청난 힘(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 그 위성을 지배하는 것은 위성의 원심력과 지구 중력의 평형인 관성이다. 그 궤도에 한 번 오르게 되면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3.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아무런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즉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힘이 상쇄되는 것이다. 다시 스톤 박사의 경우로 돌아간다면, 죽은 아이는 스톤 박사의 마음에 그대로 있지만, 죽은 아이가 스톤 박사를 당기는 힘을 운전이나 우주에서의 위성 회전과 같은 원심력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영원히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영원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하거나 영원히 지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서 죽은 아이를 영원히 잊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스톤 박사는 그래비티, 즉 중력이라는 힘을 피하여 우주 공간에 왔다. 지구의 중력, 아이의 기억은 그녀를 잡아당기고, 그녀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구를 돌다가, 이제 우주를 도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언뜻 무중력의 공간, 다시 말해서 힘이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순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지구의 중력과 물체의 원심력의 균형으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힘이 존재했다. 그녀는 균형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존재하는 힘들을 깨닫는다. 물체의 원심력이 없어져 관성으로 영원히 우주 어딘가로 떠밀려갈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중력의 따스함, 혹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깨닫는다. 즉 아이를 잊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를 도는 그녀를 돌 수 있도록, 죽음으로 떠밀려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아이였다. 즉 우리에게는 완전한 무중력, 혹은 완전히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우리는 가능한 힘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가능한 힘들 중에 죽음은 가장 최후의 불가피한 고려대상이다.

결국 스톤 박사는 그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내몰리는 것이다. 최후까지 교신을 하려 애쓰지만 그 교신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다음, 그녀가 돌연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 죽고자 하는 액션이 살고자 하는 의지의 동일한 힘임을, 즉 결국 그것에서 최후까지 살고자 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가 만들어낸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이렇게 표현해준다. 착륙은 이륙과 같다고. 다시 말해서 그 얘기는 우주선이 남은 최후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며, 그녀 안에 살기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기 위한 에너지란 죽기로 결심하고 산소를 끄는 힘이다.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의 중력을 뚫고 이륙한 힘이다. 즉 착륙하는 힘과 이륙하는 힘은 같다. 무엇인가를 떠나오기 위해 이륙을 결심한 자라면, 무엇인가로 돌아가기 위해 착륙을 결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은 말하고 있다. 떠나오기 위해 혹은 잊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돌아오기 위해 혹은 기억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돌아오는 것에는 댓가가 따른다. 어쩌면 돌아오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더 괴롭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댓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영원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인, 우주공간을 영원히 떠도는 삶이다. 돌아오는 것, 혹은 그래비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접힌 부분 펼치기 ▼

 

4.
그러나 여러 장점들이 있음에도 이 영화 <그래비티>를 걸작이라고 부르기가 주저되는 부분들이 있다. 개인적 서사를 너무 쉽게 전체로 확대하거나 혹은 전체를 너무 쉽게 개인에게 봉합하는 것, 서사를 전개하는 간편한 방식(이는 사실 불가능한 귀환이다), 익숙한 할리우드의 가족주의, 영웅주의 등 언뜻 보이는 부분들도 그렇지만(그리고 왜 사고는 항상 러시아나 북한이나 중국이 치는가), 조금 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의 흔히 말하는 '고난의 체험'이라는 구조이다.

물론 몇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영화에서 온전한 체험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고통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더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으며, 고난을 받는 스톤 박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웅장한 음악을 우리 귀에서도 빼버린다고 해서 그다지 더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될리는 만무하다. 주인공이 목마름으로 허덕인다고 해도 우리는 옆에 놓인 콜라를 한모금 들이켜면 되며, 스톤 박사가 모든 사람과 교신이 끊겨 공포에 떨 때도, 우리는 여전히 최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 아니 도리어 영화는 고통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는다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영화가 "실감이 난다"고 이야기할 때, 그 실감은 적어도 고통이 상당 부분 제어된 실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영화는 쾌감을 전달하기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고통을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한 매체일는지도 모른다(도리어 글이 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관객에게 당신이 이것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고문받는 자의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관객을 고문받는 자의 자리에 위치시킨 다음 고문하는 자를 보도록 했던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도 결국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영화관의 자리가 저 고문받는 자의 자리와 얼마나 먼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럼으로써 그 고문에 멀어져 있는 자신의 안도감에 깃든 내면의 허위와 공포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지금 영화 밖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5.
그런데 이 영화 <그래비티>는 그러한 방법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 영화는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와 여러모로 비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이 결국 홀로 헤쳐 나와야 하는 재난이라든가, 결국은 땅을 밟는 것이 최후의 목표라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의 구조로 볼 때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두 이야기 모두 사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 고통의 많은 부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사실 거대한 재난, 혹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았음에도 주인공의 고통보다는(혹은 적어도 고통만큼이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이나 멋진 지구의 풍경을 기억한다(또한 이는 두 영화 모두 일종의 환상씬이 등장한다는 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관객이 이 두 사람 모두 살아서 귀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으며, <그래비티>에서는 코왈스키가 떠나가는 장면이 나올 때 스톤 박사의 귀환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혹은 그런 장면이 없더라도 스톤 박사는 당연히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거의 모든 관객이 믿는다. 왜? 이건 우리의 믿음에 보답하는 할리우드 영화니까).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재난은 고통스러운 경험보다는 도리어 멋진 체험이나 아름다운 기억에 가깝다.

그 이유를 한편으로 카메라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영화의 초반부 스톤 박사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그녀의 헬맷으로 가깝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시점숏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있다. 허문영이 <씨네21>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던 그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체험으로 전환하겠다는 신호다. 그리고 이후에도 몇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이 시점숏들이 그녀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내가 기억하는 예외적인 거의 유일한 장면은 얼굴이 뚫린 동료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하거나, 지구로의 귀환을 견뎌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비추고 있으며, 이 때에는 영화는 체험이라기보다는 관찰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도리어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웠을 장면, 예를 들어 코왈스키와 줄을 잡고 있는 장면 같은 것은 (나쁘게도) 스펙터클하게 찍혔다. 물론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지는 지구의 장관이다. 즉 우리에게 체험을 극대화하여 느끼도록 하는 장면은 사실 그녀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 체험은 결국 무엇을 위한 체험이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부의 카메라는 허문영의 말대로 '외설적이다'. 허문영은 다른 의미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관객을 향한 그 장면의 무람없음 때문에 외설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6.
그래서 지구로 돌아와 발에 땅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에서 다시 명백한 1인칭 시점숏으로 돌아오지만 그 체험에 미심쩍은 잔상이 남는다. 그녀의 귀환과 땅에 발을 내딛는 첫 발걸음에 응원의 의미로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웅장한 첫 발걸음에 그렇게 마음이 동하지가 않는다. (또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적어도 이 뒤에 파이의 고백을 붙여놓는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길을 간다.)

반 농담으로 한 마디 붙여두자면 최근에 들어서 어떤 영화가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 진정으로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나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다. 좋은 영화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가 아니다. 나는 <그래비티>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맥거핀 2013-11-1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왜 영화DB가 연결이 안되지...근데 이럴 때가 아니라 서평단 리뷰 써야하는데..책이 참 진도가 안 나간다..;

아이리시스 2013-11-1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접힌 거 이렇게 길꺼면 왜 접은 건데요, 왜요, 왜, 왜, 왜.

정말 추워요, 제가 토욜에 응답하라 보면서 혼자 겨울모드 되어가지고 겨울잠도 좀 자고 바깥활동도 줄이고 눈왔으면 좋겠다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거기는 눈이 왔다는데 그게 진짭니까, 맥거핀님?

겨울은, 남쪽 도시에서 겨울은, 어쩐지 공짜로 먹는, 뭔가 잃어버린 텅 빈 계절 같아요 :)
그나저나 저 아직 리뷰 다 안읽었음. (이런 댓글 좋아하죠? 징징대는 거)

맥거핀 2013-11-20 16:0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까는 내용이라 덜컥 겁이 나서요. 근데 뭐 예전에도 엄청 호평 일색이었던 영화(예를 들어 <아바타> 같은 영화) 비판하는 글 쓸 때 살짝 긴장하고 그랬는데, 뭐 악플도 없고, 거의 무플이라 허허허...참 쓸데없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들 다 예스 할 때, 아니오 하는 글을 쓰려면 왠지 걱정이 되요. 허허.

그날 서울에 눈이 오기는 왔었나요? 눈 못 본 사람들 엄청 많을텐데 저도 온다는 말만 인터넷에서 봤지 실제로 눈을 보지는 못 한 사람들 중에 한 명입니다. 눈도 오고 나면 겨울이 좀 실감이 날텐데, 저도 아직 겨울이 실감이 안나요.

요새, 여러모로 몇 가지 일들 때문에 글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닥입니다. 힘 좀 내고 살아야 할텐데...(나도 징징)

Shining 2013-11-2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열심히 살아야겠다, 고 생각했고 좋은 영화라고도 생각했는데(먼 산...). 열심히 살아야겠다, 와 그냥 살아야겠다, 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함께 들었어요 실은 하하하.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착륙 이후 스톤 박사의 삶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을까. 그 때 그 숭고하기까지 한 다짐도, 일상의 부딪힘과 상실과 기억의 부재 속에서 다시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나를 각성시킬 무언가가 필요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삶이란 얼마나 지루한지. 최초란 얼마나 막대한지. 그런 생각이요.

영화가 쾌감을 전달할 순 있어도 고통을 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말씀엔 저도 동의합니다. 극장이란 공간, 화면과 나 사이의 거리, 영사기와 스크린의 도달 정도. 그렇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하려고 여기 앉아있나 문득 생각할 때도 많아요. 인간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이나 고난도 이해할 수 없으면서. 안전한 곳에 앉아 울고 웃으려고. 그렇게 자문하다가도 영화를 봐요, 네, 그렇게 되네요.

우리는 그녀처럼 우주 공간에 혼자 머무를 일이 아마도 없겠지만 그녀가 가진 두려움과 절망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순 없는 것 같아요. 극단적인 가정이고 상상이지만, 그래서 서사로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도 이상하죠, 저는 그녀가 슬펐어요.

Shining 2013-11-25 14:38   좋아요 0 | URL
(아이님께 쓰신 답글 읽고 쓰는 덧)

저도 <아타바>를 혹평...그럼에도 걸작이라고도 생각하긴 했어요. 영화의 역사적 측면에서. 하지만 그 서사.... <인셉션>같은 경우도 다들 엄청 열광했는데 저는 주인공 캐릭터가 영 거슬려서 혼자 (속으로) 혹평한걸요... 그런데 제가 사실 <인셉션>을 꽤 좋아한다는게 이상한 점;; 잘 만든 영화같은데 별로 좋지 않은 영화도 있고 헐렁한 점이 있어도 무척 끌리는 영화도 있잖아요, 신기하게도. 근데 왠지 눈치 보이긴 해요, 모두가 호평하는데 혼자만 혹평하려면. 소심한 저는 그냥 의견을 안 쓰는 방법을....

맥거핀 2013-11-2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확실히 Shining님 식대로 생각해보면 더 슬픈 결말이기는 합니다. 드라마틱한 끝과 시작이 아니라, 다시 반복으로 돌아가는 루틴으로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일까요? 그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이라는 증거일까요?

아무튼 저는 Shining님처럼 그녀가 슬펐다,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감동..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 좀 의아했습니다. 감동이 나쁘다 혹은 감동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동이라고 할 때에 그 감동이 과연 무엇에서 어느 부분에서 오는 것일까 의아해서 말이죠.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말 조금 궁금했습니다.

물론 의아한 것은 그런 것만이 아니지요. 여전히 제 자신이 영화를 보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카운슬러>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요.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CGV의 지루한 광고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오늘 무엇을 보러 여기에 온걸까. Shining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글을 봐서 분명히 나는 오늘 비참한,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보게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고통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굳이 여기에 왔던가. 그것은 영화가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 혹은 '영화'라는 것을 보는 즐거움과 다른 지점에 위치한 질문입니다. 나는 단지 고통을 즐기러 온 것인가, 아니면 고통 이상의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여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약받고 싶은 것인가,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거핀 2013-11-27 01:16   좋아요 0 | URL
흠..맞아요. 저도 서사 때문에 <아바타>를 비판했었는데, 그 글을 올리고 한 30분이나 되었을까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공격적인 댓글을 달았더라구요. 영화를 다시 보고 오라고..

그래서 엇..하면서도 그래 이거야!,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그 댓글을 반박하는 댓글을 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냥 그 두 분 싸우지 말라고 중재하고 끝냈습니다.

아무튼 그 글에는 그렇게 달랑 두 개의 댓글만 달렸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

Shining 2013-11-28 21:11   좋아요 0 | URL
음, 아마도 저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회의를 가진 사람이라 이런(?) 영화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까지도 도무지,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도통 믿지 못하겠습니다....(물론 반대의 근거도 무수하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요), 안타깝지만요.

아마도 여기서의 감동, 은 숭고함, 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도 감동 비슷한 걸 받은 기분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저는 그녀가 대단하기보단 짠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동, 보다는 슬펐다, 는 마음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예지만) 가끔 맘껏 슬퍼지고 싶어서 혼자서 꺼내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사실 이게 무슨 짓인지. 영화를 이용하는건지 활용하는건지. 슬프지만 보는것인지 슬프려고 보는건지 우습고 슬플 때가 있어요, 전혀 다른 예지만요(웃음).

그나저나, 두번째 댓글 정말입니까? 재밌네요, 하하.

맥거핀 2013-11-28 23:33   좋아요 0 | URL
까기 위해 오로라 공주,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심리일까요. 현실에 있는 정말 부조리한 일들은 대놓고 깔수가 없으니까 드라마라도 보면서 대놓고 까고 싶은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요. (그러고보면 임성한 씨가 확실히 영리해요.) 카타르시스라고 얘기하기는 힘들겠지만, 그 비슷한 어떤 것을 나는 어쩌면 원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Shining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그렇군요. 숭고함...숭고함이라..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숭고함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영화라는 것과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먼산.^^) 아. 그런데 숭고함이라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최근에 EIDF에서 <블러드 브라더>라는 다큐를 보고 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이만 댓글을 마쳐야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아..그러고보니 'EIDF 영화 단상들 2' 써야 하는데..이래서 제목에 함부로 숫자를 달면 안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