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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피에르 리비에르 - 내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죽인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 앨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미셸 푸코, 그는 우리가 알다시피 '정통'이라는 표현을 쉽게 갖다 댈 수 있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분과학문 상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의식과, 이후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로버트 단턴과 피터 버크의 저작을 번역했던 조한욱은 "미셸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날 학파를 비롯하여 모든 현상을 하나의 중심 주위로, 즉 하나의 원리, 하나의 의미,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종합적 형태 주위로 수렴시키려는 기존 역사학의 시도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의미가 변형되고 확산될 수 있는 '일반사 general history'를 제기하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 아래, 이 북 리뷰는 미셸 푸코의 저작을 통해 푸코의 '역사의식'을 이해하려는 데 일차 목적을 둔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구자가 시도할 '역사-쓰기'작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려 한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나는 푸코의 많은 저작 가운데,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3)』를 선정했다.

이 책은 1835년 6월 3일, 프랑스 오네 읍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미셸 푸코를 비롯하여 알렉상드르 퐁타나, 로베르 카스텔, 필리프 리오 등 콜레주 드 프랑스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20살 농부 출신의 피에르 리비에르가 저지른 존속살인과 이후 행동에 대하여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본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심층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왜 피에르 리비에르에 집착했을까. 그것은 살인범 리비에르를 둘러싼 담론의 다양한 층위들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견해와 견해의 충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충돌을 통해, 우리는 한 사건을 통한 다양한 시선으로 이루어진 두터운 글쓰기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역사의식의 효과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나, 피에르 리비에르』가 갖고 있는 위치를 푸코의 작품 세계 속에서 봐야할 것 같다. 이 책은 미셸 푸코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했던 1963년 저작 『광기의 역사』와 1975년에 발표한 『감시와 처벌』그 중간에 위치하여, 양 저서의 특성을 점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푸코는 책이 나온 1973년 당시, '정신의학의 권력'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기도 했는데, 각각의 키워드를 추출하자면 본 저서에는 광기, 감시, 처벌, 정신의학, 권력 등의 문제가 등장한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임의대로 이 책의 차례를 크게 나눠 보자면 이 저서는 1부 사료의 공개, 2부 사료에 대한 해석으로 짜여 있다. 책의 실제 목차와 나의 분류를 종합해 볼 때, 1부 사료의 공개는 살인범 피에르 리비에르의 범행과 체포, 예심,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 법의학 감정서, 재판 기록, 피에르 리비에르의 죽음 및 추가 기록 등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2부 사료에 대한 해석 부분은 피에르 리비에르를 둘러싼 연구자 각각의 시선들을 사건과 유관한 자료들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풀어놓고 있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1835년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농부 일을 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상당했으며, 반면에 아버지를 늘 하찮게 대했던 어머니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에르를 봐 왔던 동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동물을 심하게 학대하고, 동생의 다리를 불에 지지려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리비에르는 성장기를 통해 종교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후 이런 행동들은 리비에르가 왜 자신의 어머니, 누이, 남동생을 낫으로 죽였는지, 왜 리비에르가 자신의 살인 동기를 종교적 질서에 기대어 합리화하려는지 설명하는 데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이 '문제화'하고자 하는 것은 리비에르가 ‘왜 살인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다. 푸코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살인범 리비에르를 둘러싼 각계각층의 담론들이었다. 리비에르를 가까이에서 본 주민들의 증언, '리비에르 사건'을 맡은 판사의 소견과 리비에르의 범행과 그의 이후 행위를 조사했던 의사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사의 견해는 각각 자신의 위치를 재현하고 대변한다. 무엇보다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견해는 리비에르의 살인 행위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그를 광인으로 볼 것이냐, 혹은 정상인으로 볼 것이냐에 주목한 의사들의 견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리비에르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기능을 수행하는 신문사의 보도 행태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푸코가 늘 관심을 가졌던 문제이자,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1976)』에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지식과 권력이 개인과 연관되었을 때, 그 개인은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는 이 책에 드러나는 중요한 주제다.

특히 푸코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리비에르가 심문을 당할 때 쓴 자필 수기를 꼼꼼히 읽으면서, 리비에르의 행위를 둘러싼 중층적 시선의 재배치를 도모하게 된다. 리비에르는 초기에 '정신병적'인 자세를 지향하였지만, 판사와 의사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그러한 태도를 포기하고, 수기를 통해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고 싶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리비에르는 초기와 달리 아주 논리적인 고백을 써내려 가는데, 푸코와 연구자들은 여기서 하나의 틈새를 발견한다. 여기서 틈새란 곧, 리비에르를 인식하는 의사들의 견해이다. 어떤 의사는 이를 통해 리비에르는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편집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탄로났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어떤 의사는 이와 달리 이런 이성적인 리비에르의 행위가 편집증적인 자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리비에르 사건'을 통해 소식을 접할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들의 의제 설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푸코는《칼바도스 신보》등의 신문사들이 내비치는 담론의 속성을 간파하면서, 이들이 독자로 상정한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도덕성을 강화하려는 신문사의 행태를 꼬집는다. 이런 행태는 리비에르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범주에서 틀 지워지도록 기능한다. 푸코의 역사의식은 여기서 획기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즉 푸코의 역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틀의 내용이 아니다. 그런 틀 자체의 위치가 어떻게 구성된 것이며, 그 구성은 어떤 존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라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담론일 것이다. 담론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 사실의 '위치'를 부여하고, 그 위치는 각각의 입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입장'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을 더 나아가 이런 사건들이 개개별로 모인 우리의 삶을 '중층적'으로 만든다. 이는 곧, 역사가 일상과 가깝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우리의 일상이 복잡화, 다원화 되어있음을 인식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푸코는 '리비에르 사건'을 둘러싼 입장들을 수집하고 배치하면서, 그러한 '배치의 효과'들을 노렸다. 이것을 푸코의 전략이라고 표현했을 때, 푸코가 정작 노린 것은 자신의 전략으로 인해 드러나게 될 역사 속 개인의 전략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개인의 전략이라는 개념이 승인된다면, 이것을 추동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둘러싼 개인과 지식의 문제, 그리고 그 두 요인의 연관성을 통해 입장을 가지는 '나' 가 스스로의 권력을 승인, 확대시키려는 의도의 내재화가 아닐까.

 

  역사 연구를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은 성실한 사료 수집과, 사료를 꼼꼼하게 읽고 이해, 해석하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미셸 푸코는 역사학자 이영남의 말처럼, 상당히 성실한 역사가였다. 그의 이런 지적 성실성은 우리나라에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미시사와 신문화사적 흐름과도 유관한 듯 보인다. 우리 중등교육이란 잡지의 정윤경 기자는 미시사와 신문화사의 특성을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로 보면서,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카를로 진츠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등이 보여준 중요한 역사 연구의 특성을 소개한다. 역사 연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는 이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역사가들의 성실성을 교훈적으로 체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체득의 심층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지점은 연구자 자신에게 우연, 필연적으로 다가온 사료들의 배치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의 예견을 따져보는 작업의 분석이 아닐까 싶다.  

 

푸코와 동료 연구자들이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시도한 사료의 연대기적 배치는 사실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배치의 효과를 통해 푸코는 자신이 연구를 통해 노린 목적, 즉 리비에르의 범행과 이후 행위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시선들의 분열을 일정한 논리적 체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역사 연구의 결과물들을 접하는 독자들을 푸코가 강조하는 '담론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용을 한다. 만약 '담론의 시장'이란 표현을 무덤에 있는 푸코로부터 허락받는다면, 우리는 '리비에르 사건'을 통해 담론을 표출하는 행위자들의 전략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략은 결국 담론의 가격을 매기기 위한 행위자들의 노력이며, 그 노력의 구체성은 '담론가'를 책정하기 위해 필요한 '담론-공급'과 '담론-수요'의 문제로 정리된다. 푸코의 입장에 충실하자면, 높은 '담론가'를 자랑할수록, 그것을 지탱하는 데에는 수많은 지식의 동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담론의 시장 속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영세성을 띠는 행위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굳건히 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 연구자 본인이 높은 '담론가'를 확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차적인 대답으로 연구자가 다루고 있는 대상들의 견해와 직접 투쟁하여, 그 견해를 압살할 정도의 강한 주장을 만들어내기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푸코의 저작들을 통해 보건대, 푸코는 이러한 대답을 교묘하게 '포월'하는 것 같다. 즉, 일차적인 대답을 통해 나온 연구자와 사료 속 연구 대상자들의 견해와의 직접적인 쟁투는 푸코에게는 어쩌면 당장의 실리가 없을 것이라는 점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푸코는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사료를 '그대로' 소개하려 노력했고, 그것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는 데 책의 반 이상을 할애했다. 그가 이 사료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내비친 것은 '이야기되는 살인'이라는 제목의 22쪽 분량의 글뿐이다. 결국 푸코 자신의 높은 ‘담론가’를 책정하기 위해 벌인 전략은 성실한 사료 탐독이란 일차 작업 이후, '리비에르 사건'을 에워싸고 있는 담론들의 위치를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미셸 푸코의 저작이라고 해놓고, 푸코의 글이 왜 이렇게 없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푸코는 '타자'의 언어 행위를 통해 자신의 말을 줄곧 하고 있는지 모른다. 푸코는 과연 '복화술사'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수사를 통해 푸코가 차려놓은 다양한 견해의 장들을 한 연구자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주장으로 환원할 위험은 점검해야 한다. 푸코는 다만 자신의 기나긴 지적 여정 가운데, 늘 관심을 가졌던 지식 - 권력 - 개인의 관계 속에서 타자의 입을 대여했을 뿐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푸코의 테크놀로지를 보다 지혜롭게 원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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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멜랑콜리아 - 서동진의 디자인문화 읽기
서동진 지음 / 디자인플럭스(현실문화연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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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덮는 순간, 많은 지성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표현하는 중 하나인, ‘~적’이란 것을 여기서 끌어온다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소견은 ‘푸코’적이며,‘르페브르’적이며, ‘그람시’적이다. 그리고 ‘보드리야르’적이기도 하다. 사실 ‘전문가’라는 명명 아래, 우리의 학문 세계는 늘 한 모서리에 들어가 그것만을 파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정상적인 것임을 일반화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서문에 밝힌 것처럼, 지성인들의 지적 여정을 하나로 환원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리라.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여정을 통해 일관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양한 지적 여정의 혈류들을 짚어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자인 멜랑콜리아』의 저자인 서동진 교수의 지적 여정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불가피한 물음을 던져본다. “왜 디자인인가?”

(이 질문은 쉽게 던져진 듯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이 책이 나오기 이전, 서동진이라는 이름을 한국의 문화판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것을 되짚어보고, 그의 예전 인식들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진 문제 의식과 비교, 조합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한다면, 본 책의 미덕은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을 휘감던 ‘노하우(know-how)’의 횡포를 벗어버리고, ‘노와이know-why)'의 실천적 사유를 도모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 부족한 추론이 맞다면 저자는 ’디자인‘을 하나의 인식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디자인’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디자인 멜랑콜리아』는 바늘을 가지고 풍선을 톡톡 터뜨리려는 ‘악동’의 심보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악동’이라고 하여, 당장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이 ‘디자인’에 거는 시비는 사실 저자 본인도 고백한 부분이지만, ‘디자인’이란 무궁무진한 세계에 입문하여, 아직 탐구해야 될 것이 많다는 겸손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적이다’라는 표현을 다시 끌어오자면)  ‘들뢰즈’적으로 말하자면, 본 책은 ‘디자인’을 ‘문제화’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어떤 사건을 문제화한다는 것은 고요하게 흐르던 일상의 흐름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디자인’을 친숙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문제적으로 사유하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것은 ‘방법적 삶’이었다. ‘방법적 삶? 그게 무엇일까. 혹은 이 표현에서 나타나는 낌새를 어느 정도 알아차린다면, 이 표현이 뭐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술자리에서, 카페에서 말한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거니?”, “너 이제 뭐 하고 살거야?” 사람들은 여기서 “글쎄..”, 혹은 ’앞으로‘이후의 청사진을, ’뭐‘라는 괄호에 채워진 단어들을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런 순간에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방법적 삶’을 찾으러 서점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기-계발’이라는 장르에서 찾는다. 저자는 이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체계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획책하려는 ‘자기-계발’의 담론을 디자인과 묶으려한다. “요즘 시대는 왜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를 디자인하려는가?”, “왜 꼭 우리의 삶들이 몇몇의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류되어야 하는거야?”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방법적 삶’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

 이 책에 깔린 논조를 보자면, 우리는 국가가 주도하던 (‘선동’에 가까운) 기조들을 재사유하게 된다.  정부는 세계화, 신지식인, 문화기술 등등의 담론을 통해, 하나의 모델을 선정하고 그 모델에 따라가라고 국민들에게 말해 왔다. 이것은 하나의 ‘방법’을 도모하고, ‘방법적 삶’을 재촉했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위해, 아이들의 혀를 병원에 맡기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어-상품’이 되어 사람들을 성공의 결핍자로 간주했다. 내가 앞에서 이 책을 ‘푸코’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 즉 미셸 푸코의 저작들 속에 늘 등장하는 국가 - 권력 - 개인의 관계 속에서 ‘지식’이 기능하는 형태로 가는 것의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은 오늘날 디자인이 침투한 삶에 자리 잡아, 삶을 디자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삶을 디자인한다는 것 자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디자인을 통해 그려지는 획일된 삶의 방법론을 각개격파할 필요성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의 표상들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 여기서 이 책은 ‘그람시’적인 면모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인식하도록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자본주의가 함몰시키는 사유의 ‘다양한 잠재성’을 깨우자고 주장하는 듯하다.

 지금, 텔레비전을 틀어본다. 은행에 가서 여성 잡지를 본다.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들을 본다. 마주치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설명하는 방법들. 그 이미지대로 살 것을 명령하는 ‘무서운’ 친절들. 이 책을 읽고 나서 영화 〈파이트 클럽〉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제리 맥과이어〉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말하는 ‘디자인’에 대한 문제 의식이 본 작품들에게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저항’마저 디자인되는 이 시대에, 나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의 그 획기적인 무서움에 치를 떨 수밖에 없음 또한 고백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중단할 것인가. 발뺌할 것인가. 우리가 아직 “이 좁은 땅덩어리”라고 욕하지만, 그 땅덩어리 안에서도 무궁무진한 일들이 일어나는 기이함에 신기함을 넘은 지적 호기심을 동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따져보자면, 90년대 한국에 문화연구가 들어왔을 때, 나타났던 일상에 대한 연구자적 호기심, 그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하여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은 문화를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 문화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문화연구’의 역사성 또한 되짚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이 책 자체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공짜’심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도시가 건네는 수많은 기호의 약속들에 너무 쉽게 흥분하고, 잊어버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결국 이런 현대 사회의 기호의 약속들을 ‘디자인’이란 개념을 통해 짚어보면서,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전혀 다른 판 안에서 사유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를 둘러싼 문화를 비판한다는 것이 마치 진부해진 것 같은 요즘, 이 책이 던지고 있는 ‘문제적 사유’는 그냥 책을 다 읽었다는 ‘기능적 앎’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실천적 사유’라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지 않을까. 책을 읽고, 그 책과 연관된 영화를 찾아보고, 문학을 찾아보고, 도시를 거니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책을 접목시켜보는 것. 이런 태도를 우리는 너무나 외면해 왔다. 우리는 지금 다시 우리 행위의 ‘계보’를 그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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