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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멜랑콜리아 - 서동진의 디자인문화 읽기
서동진 지음 / 디자인플럭스(현실문화연구) / 2009년 1월
평점 :
이 책을 덮는 순간, 많은 지성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표현하는 중 하나인, ‘~적’이란 것을 여기서 끌어온다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소견은 ‘푸코’적이며,‘르페브르’적이며, ‘그람시’적이다. 그리고 ‘보드리야르’적이기도 하다. 사실 ‘전문가’라는 명명 아래, 우리의 학문 세계는 늘 한 모서리에 들어가 그것만을 파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정상적인 것임을 일반화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서문에 밝힌 것처럼, 지성인들의 지적 여정을 하나로 환원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리라.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여정을 통해 일관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양한 지적 여정의 혈류들을 짚어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자인 멜랑콜리아』의 저자인 서동진 교수의 지적 여정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불가피한 물음을 던져본다. “왜 디자인인가?”
(이 질문은 쉽게 던져진 듯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이 책이 나오기 이전, 서동진이라는 이름을 한국의 문화판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것을 되짚어보고, 그의 예전 인식들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진 문제 의식과 비교, 조합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한다면, 본 책의 미덕은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을 휘감던 ‘노하우(know-how)’의 횡포를 벗어버리고, ‘노와이know-why)'의 실천적 사유를 도모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 부족한 추론이 맞다면 저자는 ’디자인‘을 하나의 인식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디자인’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디자인 멜랑콜리아』는 바늘을 가지고 풍선을 톡톡 터뜨리려는 ‘악동’의 심보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악동’이라고 하여, 당장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이 ‘디자인’에 거는 시비는 사실 저자 본인도 고백한 부분이지만, ‘디자인’이란 무궁무진한 세계에 입문하여, 아직 탐구해야 될 것이 많다는 겸손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적이다’라는 표현을 다시 끌어오자면) ‘들뢰즈’적으로 말하자면, 본 책은 ‘디자인’을 ‘문제화’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어떤 사건을 문제화한다는 것은 고요하게 흐르던 일상의 흐름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디자인’을 친숙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문제적으로 사유하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것은 ‘방법적 삶’이었다. ‘방법적 삶? 그게 무엇일까. 혹은 이 표현에서 나타나는 낌새를 어느 정도 알아차린다면, 이 표현이 뭐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술자리에서, 카페에서 말한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거니?”, “너 이제 뭐 하고 살거야?” 사람들은 여기서 “글쎄..”, 혹은 ’앞으로‘이후의 청사진을, ’뭐‘라는 괄호에 채워진 단어들을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런 순간에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방법적 삶’을 찾으러 서점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기-계발’이라는 장르에서 찾는다. 저자는 이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체계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획책하려는 ‘자기-계발’의 담론을 디자인과 묶으려한다. “요즘 시대는 왜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를 디자인하려는가?”, “왜 꼭 우리의 삶들이 몇몇의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류되어야 하는거야?”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방법적 삶’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
이 책에 깔린 논조를 보자면, 우리는 국가가 주도하던 (‘선동’에 가까운) 기조들을 재사유하게 된다. 정부는 세계화, 신지식인, 문화기술 등등의 담론을 통해, 하나의 모델을 선정하고 그 모델에 따라가라고 국민들에게 말해 왔다. 이것은 하나의 ‘방법’을 도모하고, ‘방법적 삶’을 재촉했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위해, 아이들의 혀를 병원에 맡기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어-상품’이 되어 사람들을 성공의 결핍자로 간주했다. 내가 앞에서 이 책을 ‘푸코’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 즉 미셸 푸코의 저작들 속에 늘 등장하는 국가 - 권력 - 개인의 관계 속에서 ‘지식’이 기능하는 형태로 가는 것의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은 오늘날 디자인이 침투한 삶에 자리 잡아, 삶을 디자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삶을 디자인한다는 것 자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디자인을 통해 그려지는 획일된 삶의 방법론을 각개격파할 필요성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의 표상들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 여기서 이 책은 ‘그람시’적인 면모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인식하도록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자본주의가 함몰시키는 사유의 ‘다양한 잠재성’을 깨우자고 주장하는 듯하다.
지금, 텔레비전을 틀어본다. 은행에 가서 여성 잡지를 본다.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들을 본다. 마주치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설명하는 방법들. 그 이미지대로 살 것을 명령하는 ‘무서운’ 친절들. 이 책을 읽고 나서 영화 〈파이트 클럽〉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제리 맥과이어〉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말하는 ‘디자인’에 대한 문제 의식이 본 작품들에게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저항’마저 디자인되는 이 시대에, 나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의 그 획기적인 무서움에 치를 떨 수밖에 없음 또한 고백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중단할 것인가. 발뺌할 것인가. 우리가 아직 “이 좁은 땅덩어리”라고 욕하지만, 그 땅덩어리 안에서도 무궁무진한 일들이 일어나는 기이함에 신기함을 넘은 지적 호기심을 동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따져보자면, 90년대 한국에 문화연구가 들어왔을 때, 나타났던 일상에 대한 연구자적 호기심, 그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하여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은 문화를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 문화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문화연구’의 역사성 또한 되짚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이 책 자체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공짜’심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도시가 건네는 수많은 기호의 약속들에 너무 쉽게 흥분하고, 잊어버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결국 이런 현대 사회의 기호의 약속들을 ‘디자인’이란 개념을 통해 짚어보면서,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전혀 다른 판 안에서 사유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를 둘러싼 문화를 비판한다는 것이 마치 진부해진 것 같은 요즘, 이 책이 던지고 있는 ‘문제적 사유’는 그냥 책을 다 읽었다는 ‘기능적 앎’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실천적 사유’라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지 않을까. 책을 읽고, 그 책과 연관된 영화를 찾아보고, 문학을 찾아보고, 도시를 거니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책을 접목시켜보는 것. 이런 태도를 우리는 너무나 외면해 왔다. 우리는 지금 다시 우리 행위의 ‘계보’를 그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