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낳은 중요한 성과를 '시민의 자기계발'에 두는 것은 이 연구가 가진 핵심을 얕게 훑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을 뛰어넘는 이 연구가 제시한 잠재적 중핵은, '기업문화'가 가지고 있는 전략.기업이라는 영역 안에서,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종교학,철학,역사학, 문학 등등의 지식이 자본주의 논리에 맞춰 '문화'라는 항을 통해 재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문화라는 항을 통해 지식을 재구조화하는 전략은 새삼 새로운 전략은 사실 아니다. 다만, 더 진화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진화는 대략 2단계로 진행되는 것 같다.

 1단계

우리가 이런 사례에서 너무나 잘 떠올리는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의 수작 <혁명을 팝니다>가 제기한 문제처럼, 자본주의는 '저항'과 '혁명'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잠재태를 '문화적 상징주의'로 재현하면서, 그것을 절묘하게 소비 사회의 틀로 편입시켰다. 이를 통해, '실체적 적대'는 '문화적 적대'와 혼동되었다. 더불어 '실체적 저항'과 '문화적 저항'의 조합은 시험대에 올랐다.자본주의의 이러한 '문화적 상징주의(Cultural Symbolism)'에 대하여, '반문화주의자'를 비판하는 이들은, 과연 어떤 변화를  꿈꾸어야 하는가의 딜레마를 제기했다.  

2단계 

서동진이 '자기계발 비판 담론'을 통해 중요하게 지적했듯이, 국가와 '자본'으로 대변되는 기업의 전략, '자기계발'전략이 어떻게 지식을 재구조화하는가의 문제다. 이 구조의 문제 틀 안에서, '창의력'이라는 개념은 순수한 진공 상태에 머무를 수 없었고, 이러한 개념의 물질성이 시민 영역의 생활상에 진입하면서, 지식은 하강하였지만, 지식의 하강과 맞물린 딜레마는, '창의력'이라는 개념이 자본에 경도되면서 생성된 '라이프스타일 성'지식의 범람을 제시했다. 이 생활 양식 속에서, 지식을 둘러싼 테마는 '생산 결핍'을 동기화하여,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기 확신, 자기주도성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가상적 내면 공간'을 마련했다. 이 공간은 한 신체 안에서 움직이며, 지식은 이 공간의 융성함을 촉진하기 위한 유연한 에너지로 작용한다. 지식은 곧 무한한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아, 개인의 일상을 제약한다. 그리고 '창의력'이라는 개념이 진공상태를 깨고 자본중심적 경향의 모토로 강화되었듯이, 이제 '일상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문화주의적 발상'에 착안한, 인정될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넘어, 자본의 진화된 책략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섬세함을 자가-계발하고 있다. 

내가 2단계를 넘어 2.5단계 차원에서 고민하는 것이 바로 '경영인문학'의 도래다. 사실 이 용어가 널리 쓰여지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있는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몇 년 전부터 한 유명 원로 지식인의 <ceo를 위한 인문학>등의 강좌가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 스티브 잡스가 좋아하는 사람이 블레이크 같은 문학가라는 점을 종종 떠올리게 하면서, 이런 '경영인문학'의 확산이 낳는 오늘날 현대자본주의의 전략을 심층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2.5단계인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자기계발 담론'의 분석 기획 방향은 여전히 시민들의 일상성에 침윤된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적 개념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수용자 연구'로 정리될 수 있다면, '경영인문학'연구는 기업의 리더쉽과 그 리더쉽을 발휘하는 주체와 연관된 네트워크 체제가, 어떻게 인문학적 지식을 재통합, 재구조화시키는가라는 '생산자 연구'를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구를 고민하는 차원은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같은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이건희가 평소 많은 양의 비디오를 본다더라, 영화광이라더라 정도의 가십을 조금 더 깊이 파헤치는 정도로 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1인의 카리스마 리더쉽을 바라보는 차원을 부연하는 '부연적'지식의 개입이 아니라, 오늘날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로 대변되는 기업가들의 두뇌 안에 들어가있는 전략이, 갈수록 삶의 영역과 친밀해 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상성의 긍정적 측면과 맞닿는 전략의 개발을 통해, 그러한 기업가들의 두뇌 안에서 전유되는 지식의 성향들 자체가 '문화적'으로 친밀하게 '테크놀로지'속에 스며들어간다는 점의 주목은, '경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지식친화적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경영인문학 비판'은 특히 기업문화의 구조안에서 경영자들과 지식인들이 어떤 관계 안에서 갈등하고, 서로 조합을 맺는지에 대한 중층 결정점을 잡을 수 있다는 점. 즉 '경영인문학'을 가르치는 자들의 커리큘럼을 통해, 우리는 그 강의를 배우는 사람들의 입장과 그 강의를 직접 수행하는 자들의 입장을 서로 비교분석할 수 있다.   

+ '서동진'의 '자기계발 담론'이 운동의 전술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되려면 

나는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둘러싼 반론을 몇몇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확인하면서, 그들이 서동진이라는 아이콘을 갖고, 상당한 '운동의 전술'을 이 책이 강조하는 '자기계발'개념과 엮어보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들이 '운동가'서동진에게 기대했던 '운동적 전술'로서의 자기계발 전략에 대해 왜 그리 모호했는가 같은 '책망하는 뉘앙스'가, 얼마나 이 책이 갖고 있는 중핵 혹은 잠재성을 갉아먹는 짓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무조건 시민의 '자기계발'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진화된 구조주의'다. '진화된 구조주의'안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무조건 간과하는 구조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구조주의. 개인의 능동성에 문을 열어놓은 듯한 구조주의. 이 구조주의의 틀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에 너무 닫힌 채로, 그것을 일상적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시민적 삶의 차원 안에서 이른바 '학문적으로 '소비'하는 연구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 그 책에 운동적 전술을 갈구하는 자들이 잡아야 할 방향타는 오히려 시민의 차원을 넘어 기업의 전술에 대한 고민의 심화가 아닐까. 이른바 기업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말이다. 더 깊은 문제, 문제를 생산하는 문제적 주체(기업)들에 '자기계발'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진정 필요한 '운동적 전술'이라고 본다. 고로, 다시 문제는 '일상성'이라는 개념을 더욱 더 섬세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계발하게 된 매개는, 기업 경영가를 비롯해 지식을 구성하는 기업 주체들의 지식 재배치 작업이다. 베버식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한 언급을 넘어, 단순히 지식이 부연적 기능으로 기업 조직의 엘리트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것을 넘어, 지식 자체가 어떻게 기업가 주체들의 생산 전략에 재구성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과정 안에서 오늘날 인문학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어떤 순응과 대립의 역학을 만들어가는지를 조망해봐야할 것이다.   

문제는 기업 주체들의 반발이다. 그들은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지식 섭취 과정을 단순히 일상 안에서 편하게 구현하는 스타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은 그 스타일의 이면을 넘어, 기업 주체의 지식 섭취 -> 조직 네트워크 안에 확산,분포, -> 내부 논의되는 과정과 그 생산물이며, 여기에 우리가 '비판적이며 성역이라고 여겼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메시지들은 기업 주체들의 가면에 선함을 덧씌워주는 전략으로 자리잡는다.  

공부라는 것을 하는 우리들에게 정녕 지식은 우리들의 편이었다는 희망은 점점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이 적극적 회의주의에 기반한 도전적 물음, 사회학적 사유를 좀 오랫 동안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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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ot 2010-02-1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제목이 아무래도 '자기계발의 의지'이다 보니 그 부분에 많이 천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책의 목적 자체는 거기서 더 나아가잖습니까. 결국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작업이구요. 그러나 실은 저도 '경영 인문학'이 과연 후속논의의 주제가 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탁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도 좀 더 밀고 나가서 특히 교육 부분에서는 어떤 분석이 가능할지 기대해보고 있습니다. 물론 책에서 어느 정도 다루고는 있지만 단지 담론 형성 과정에서 그 맥을 따라가는데 그쳤다고 보고, 현재 상황과는 아무래도 좀 유리되어 있지요. 그 시간적, 과정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작업들이 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덧. 그러고보니 네트에 재미 있는 서평 하나가 떠나니더군요. 본 책에도 인용되는 공병호 씨께서 서평을 쓰셨는데 그렇게도 수용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한낮 2010-0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브 잡스 운운하며 '시詩'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책도 나왔군요.
 

"여러분, 오늘을 마지막으로 무슨무슨 그룹이 활동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니, 정말 무슨 잘못을 해서 이제 가요계에서 그들을 못 보는 것일까? 아니면, 더 좋은 음악을 들고 오기 위한 '오래된' 휴식기로 접어드는 것인가? 그들은 전자의 경우에도 속했었고, 후자의 경우에도 속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참 상이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빈번하게 들리는 것이 '활동중단' 그것으로 인한 '굿바이 무대'다. 어떤 이들은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팬들에게 그 나름의 예의있는 처신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내 입장은 다르다. 이것은 한국 가요계의 뼈아픈 현실이다. 아니, 쉽게 소비되고, 쉽게 인기를 얻는 만큼,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현.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짧은 주기 속에서 '고별 무대'라는 말을 자주 쓰고, 이와 동시에 빈번하게 '컴백'을 한다.  그래서 '굿바이'는 굿바이 같지가 않고, '컴백'은 컴백같지가 않다.  

이러다보니 작곡가들은 죽어 난다. 이 죽어남이라는 표현은 작곡가들을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장처럼 음악을 찍어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늘날 음악 현실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 주기들의 주름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그 주름짐의 고통을 만회할 '패스트 뮤직'의 범람이 급증하고 있다.   

물론, 하나의 앨범을 내고 나서 그 다음의 앨범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그 시간의 오래됨이 앨범의 퀄리티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앨범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 동안, 그 앨범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들을 조사하고, 음을 책임지는 앨범 제작자, 그리고 음악을 직접 목소리로 체현하는 가수들, 그리고 앨범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적 지식과 정보들을 조직화하며, 그들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들을 비롯한 다양한 관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기간이 보장된다면, 그러한 시간은 음악의 성숙과 진보를 위한 충분한 자양분일게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존재, 특히 타인으로부터 받은 명성과 결부된 흔들리는 존재 욕구에 과민할 수밖에 없는 연예인으로서의 숙명이 너무나 깊숙하게 스며든 오늘날 아이돌 그룹을 비롯한 대중음악인들에게, 그러한 존재 욕구를 지탱하는 중심이 '음악성'에 있는가 묻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거기서 좋은 음악의 생산이 기대되고, 좋은 음악을 소비하는 차원과의 관계가 설정된다. 이 관계 속에서 소비자인 우리는 음반이 아닌 '음원'적 성향이 갖는 소비주기의 신속성에 너무나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음원이 주는 퀄리티에 대해 생산자에게만 일임하는 차원을 떠나, 나름 진중한 소비를 추구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결국 표절보다 보기 싫은 가요계 풍경은 표절과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풍경인 듯하다. 너무나 자주 '굿바이 무대'를 외치고, 그 '굿바이'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자신이 정작 잊혀질까봐 겁먹은 체취를 뿌리고 다니는 문제적 행위들. 나는 이것을 생산의 문제에서만 떠넘기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음악을 소비하는 우리들도 각성해야 하는 문제다. 

카라의 <루팡>이란 신곡이 유고의 모 가수가 부른 <인썸니아>란 곡의 인트로와 비슷하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점점 그 문제가 커지고 있나보다. G드래곤과 씨앤블루의 전례를 볼 때, 뜬금없이 떠올랐던 건, 가수들의 빈번한 굿바이 무대 인사와 컴백 무대 인사 였다. 왜 그랬을까? 

적어도 나는  그들이 '헤어짐의 미학'을 알았으면 좋겠다. 헤어지는 사람은 '안녕'을 말하면,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오랜 시간의 침묵을 지키는 게 미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듯이, '안녕!'이라는 말을 해놓고, "아, 갈려고 했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서 다시 돌아왔어"라고 여러번 말하며, 주변을 서성거리는 자들은 매력이 없다. 

표절 논란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도 바로 이런 '헤어짐의 미학'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 김작가와 인터뷰한 와이낫의 멤버 주몽의 음악적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김도훈 작곡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표절 논란에 자주 휘말리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더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김도훈 씨의 '전적'이 화려하다보니 선입견이 생길 수 있다. 그걸 배재하고 비교해서 들어도 사실 비슷하단 말이지. 노트나 코드와 같은 전문적 개념을 떠나서, 유사성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듣는 사람들의 직관이라고 본다. 그 직관들이 쌓여 논란이 되고 여론이 되는 거다. 나도 곡을 쓰다보면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그 곡을 버려야 한다. 나중에 표절에 걸릴까봐라기보다는 곡 쓰는 사람으로서 '쪽' 팔린거다. 살면서 수많은 곡을 들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영향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노래 만드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자체 검열을 해야지. 자기 색깔을 갖고 곡을 쓰는 건 창작자의 프라이드 아닌가.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의 'You're Not Alone'의 코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산와머니' '담다디'와 똑같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 노래를 듣고 다른 노래가 연상되는가? 그게 프라이드고 작곡가가 지켜야할 미덕인 것이다.

 
   

그렇다, 지금 표절 논란에 휩싸인 사람들이 보이는 프라이드가 정작 음악성이라는 본질과 결부되어 있는가. 오히려 그들의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가 대중음악에서 '대중'을 소외시키는 '생산자적 마인드' 산업지향적 마인드, 심지어 '동종업계의 인식'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인정 욕구는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불안정한 열정을 지닌 팬덤의 '쉴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결국 '좋은 음악'을 추구하는 대신, '좋은 방어막'찾기에 더 골몰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런 그들은 헤어짐을 모르고, 자신들의 음악성의 부재 대신, 자신의 부재에 더 신경을 쓴다. 그래서 늘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소모적 '부재 놀이'를 하고 있다. 헤어지려면 확실히 헤어져라! 그리고 돌아오려면 확실히 돌아와라!  안 그럴 것이면 제발 그놈의 '몇 개월만의 굿바이 무대'니, '몇 개월만의 컴백 무대니'하는 빈번한 '헤어짐 놀이'는 중단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결국 오선지에 걸린 콩나물은 쉴 틈이 없지 않은가.  

자신의 음악성에 자신감이 없다면, 진정 헤어짐을 고해야 할 것은 기계처럼 찍어내는 음 속에서 자신들이 관습적으로 저지르는 듯한 '업계지향적 음악 생산'이다. 그리고 이런 음악 생산자들을 단순히 체현하는 위치에서 가수들을 바라봐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목만 건강하면 가수라는 입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우리는 가수가 책임져야 할 분명한 윤리의 범주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수가 단순히 곡을 받아서 부르는 입장이라는 둥의 의견으로 가수가 불쌍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닌 것 같다.  

 결국 우리가 무수히 봐 온  최근의 표절 논쟁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건 음악의 완성은 작사,작곡가의 차원,가수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음악은 더군다나 그 사회적인 성격의 강조를 통해 지극히 '관계적'인 차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로 음악의 완성은 음악을 듣는 소비자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 음악을 둘러싼 주고 받음의 소통을 통해 우리는 '음악'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그 이해의 장에서 우리는 책임을 전가하는 차원이 아닌 책임을 공유하는 입장을 모색하는 방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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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문 사회 안에서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만큼 "누구나 한 번 발을 담궈봤다"는 관용어구를 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 장 내부 안에서 문화연구를 돌아보자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강명구, 유선영 정도가 원로에 다가가고 있다면, 전규찬, 원용진이 한때 뜨겁게 문화연구에 대한 자성적 분위기를 지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이영주와 박성일 등이 '주기적으로' 문화연구에 관한 성찰론을 논문의 형태 혹은 학술적 에세이 형태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 이상길이 <문화연구의 아포리아>라는 아티클로 내가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의 관행적 성찰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 정도다. 이기형은 좀 다른 형태로 성찰론을 제시하는데, 즉 자신이 제시하려는 안을  하나의 대안적 연구를 통해 사례화로 만들어 놓고, 그 사례를 수행하면서 생긴 사유를 중심으로 문화연구에 현존하는 문제점들을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밝히는 편이다.  이렇듯,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은 기존의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목소리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제시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문화연구를 연구 성과로 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회적으로 문화연구의 부정성을 파헤친다.  

그러나, 대부분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학문 사회 내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스승의 위치에 있다면 말이다, 그들이 왜 '교육'의 차원에서 문화연구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오류는 없는지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문화연구의 기본'을 대충 깔아놓은 상태에서, "문화연구는 대개 이런 흐름이야, 알았지? 이제 할 수 있겠지?"라는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화연구의 교육적 현실이라면, 나는 여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스승의 입장에 있는 그들은 많은 문화연구 생도들이 스튜어트 홀과 레이먼드 윌리엄즈 등의 견해를 다 통달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은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엄 터너의 <문화연구 입문> 하나 달랑 읽고, 거기서 '문화연구'를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그 오만함의 팽배는 사실 지금 문화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젊은 생도들에게 확산되어 있는 태도이다. 그렇기때문에 어느 세션에 가보면, 문화연구자들이 백전백패하는 것은, 늘 새로운 이론의 경연장이 열리면, 꿀먹은 항아리가 되거나 터무니 없는 수사로 덮어버린 견해로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는 못된 방법만 터득하는 것이다. 리처드 호가트의 <읽고 쓰는 것의 효용>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문화와 사회>등의 원전을 대부분 제대로 공식적 제도 안에서 공부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화연구의 초보자들은 입문서 하나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중급반'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특히 언론학에 회의를 품고, 좀 새로운 형태로 미디어 연구를 하고 싶거나, 아니면 미디어 연구 자체에 회의를 품은 자들은 버밍엄문화연구소의 업적과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미디어,문화연구의 정전들 , 데이비드 몰리나 이엔 앙, 래니스 재드웨이 등이 누적시킨 성과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계속 '새로운 것' 타령을 한다. 이 '새로운 것'타령이 안전한 이론적 습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회의 변화와 경향'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문화연구적 성향이 연구자의 태도로 체화되는 것의 한계는, 이론적 안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문화연구의 정전을 꼼꼼하게 읽어봄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수고로움을 거부하고, 늘 근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 트렌드에 의지한다. 나는 그래서 최근 이영주, 박성일 등이 쓴 미디어,문화연구의 비판적 성찰에 대해 심각한 반발감을 갖고 있다. 왜 그들은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또 외부적 지식에 기대려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또 스스로 문제의 굴레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수고로운 역사적 분석을 통한 논쟁의 장을 마련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문화연구의 비판적 견해, 그것도 제법 명망있고, 유력해보이는 위상으로서의 견해 한 가지를 가지고 와, 거기에 접붙이기 정도로 문화연구의 문제점을 살피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유력한'견해를 '무력하게'전유하여 '색채없는' 관행적 성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과잉진술은 지나친 '문화연구에 대한 위기론 표출'이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과거에도 위기는 없었고, 오늘날에도 위기는 없었다. 그 위기론 마저도 문화연구가 경계하는 이론의 실용적 수입으로 느껴질 정도다. 문화연구의 위기담론은 솔직히 말해서, 문화연구 내부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만한 성과가 안 나왔다는 '옹알이'의 과장이다. 즉, 문화연구가 학문 사회 안에서도 주변화되어 있고, 대중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이,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론 자체는 사실 어느 학문도 다 겪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지나치게 위기론을 '특수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의 텅 빈 실체 안에서, 스스로 적대를 만들거나, 혹은 적대를 과장되게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문화연구의 이 '없는 위기'를 다루는 위기론 자체의 주기적 표출과 과잉이, 문화연구의 지지부진한 성과보다 더 심하게 '문화연구의 종언'을 예고하는 듯하다. 

문화연구의 과소진술은 문화연구를 성찰하는 자들이 문화연구 내부 안에서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견해의 싸움들을 중요한 참조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제시한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과 유관하다. 그들은 아감벤이니,랑시에르니 하면서 이론의 소비 시장에 우수한 소비자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강한 반면에, 몰리 같은 이들의 견해를 너무 쉽게 '이론적 박물관'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연구를 비판할 때, 자신들이 제시한 견해가 상당히 새로운 비판적 지점에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은 순환한다. 이 순환이 주는 교훈은 비판적 태도를 단순히 허무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자들이 정작 문화연구의 텍스트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화연구자들 개인의 정치적 스탠스와 더불어  반복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진보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좌파 문화연구자들에게 제시하는 내 조언이다. 사실상 이기형이 계속 도시로 돌아가자, 미디어라는 연구 주제 범주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확장시켜보자라며 민속지학적 연구, 현장중심적 연구를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목소리를 제시하면서 계속해서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여기에서 이영주나 박성일,전규찬 등은 일부 만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론의 인본주의적 과잉 전술을 보면, 과거 리처드 존슨이 민속지학자들에게 내렸던 무서운 판단, 즉 엘리트적 온정주의로 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제기(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늘상 들어온 비판이지만)와 묘하게 겹쳐있다. 즉, 과거에 비해 민속지학적 연구와 현장중심적 연구가 '이론적 깊이'를 갖추고 연구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에서 정작 그들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은 '연구와 결부된 운동'임을 볼 때, 그들은 운동과 연구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즉 그들이 이론적 깊이를 더하면 할수록, 이것이 운동의 전술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여전히 이러한 비판 전술 안에서 문화연구를 둘러싼 위협이자 위험은 사실상 학문 사회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의 인정투쟁이 문화연구를 발전시키는 성찰론에 교묘히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성찰론이라는 제법 과학적이며 진정성있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이것은 정말 '제스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연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런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은 요즘 들어 문화연구를 퇴행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놓여진 것은 그냥 지금 이 상태로 문화연구를 하는 것이든지, 혹은 아예 작심하고 문화연구에 대한 철저한 내부 성찰에 돌입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런데 문화연구의 교육 현실에서, 이런 철저한 내부 성찰이 오랜 시간 유지되려면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비판한 기원 회귀의 전략이 아니다. (나는 이영주 등이 주장했던 결국 문화연구의 문제는 신좌파적 사유의 상실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오히려 우리는 '문화연구의 형성 시기'를 다시 탐독하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문화연구'를 창조,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무자비한 문화연구적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과거를 탐독하면서, 거기서 걸러내야 할, 혹은 새롭게 바라봐야 할 견해들을 제시하고, 그것의 충분한 바탕 안에서 현재와의 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과정이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젝이니 아감벤이니 하는 인기있는 현재인들과의 대화를 바로 시도,유입하려하니 문화연구는 더욱 이론의 연골이 닳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적어도 이러한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망각되었던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보물같은 성찰론을 마치 새로운 발명품 같은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그동안 부재했던 담론이었던 듯 말하는 ) 성찰론으로 대체,포장하는 환영 효과가 계속해서 나타나리라 본다. 이것이야말로 문화연구의 문제적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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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216090718&section=03 

-> '금메달'도 모자라 싹쓸이 타령인가? 

정희준 교수가 <프레시안>에 올린 본 칼럼을 보면, 어떤 관습적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 글이 워낙 감정적이어서, 칼럼으로서의 어떤 격을 상실한 것은 일차적인 문제로 치더라도, 평소 스포츠에 관해 색다른 견해를 종종 제시하던 필자가 이런 '식상한 시선'을 견지한 글을 너무 자랑스러운 태도(그것도 격앙된 태도를 덧붙여)로 내놓은 것이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정희준은 정확히 왜 사람들이 이호석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덩달아 이 칼럼을 손 본 편집기자들도, 인터넷 매체를 다루는 기자들이라면, 좀 온라인 상에서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필자와 의견을 공유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을텐데, 아무래도 이 칼럼은 인터넷 용어로 '떡밥을 한 번 던져보겠다'라는 의도가 강해 보입니다.(아마 언론의 속성상 편집부가 그런 성향을 더 드러냈겠고, 정희준이라는 필자가 때마침 있었던 것이겠지요)  

칼럼의 전문을 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제가 처음에 언급한 '관습적 사고'가 발견되는지, 지적해보겠습니다. 아래는 칼럼의 전문입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어찌 보면 도발적이고 어찌 보면 무례한 슬로건을 앞세운 나이키 광고들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여기에 기념품이나 교환하러 온 게 아닙니다(I didn't come here to trade pins)." "당신은 은메달을 획득한 게 아니라 금메달을 놓친 겁니다(You don't win silver, you lose gold)."

1984년 올림픽 수영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던 에이미 화이트는 이 광고가 누구든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의 얼굴에 따귀를 때리는 격이라고 비난했고, 많은 이들이 나이키가 올림픽의 이상을 내동댕이쳤다고 꾸짖었다. 그런데 나이키 외에도 오랜 세월 선수들에게 따귀를 때려온 이들이 있다. 언론이 바람을 잡으면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거국적'으로 집단 따귀를 때린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은메달, 동메달을 딴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패배자'로 여겼다. 금메달 획득에 '실패'해서 안타깝고 실망한다는 사람들이다. 지려면 미리 져야지 결승에서 지면 역적이 된다.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나. 그래서 젊음을 불태우며 국가에 은메달, 동메달을 바친 젊은이들은 머리 처박고 뒤로 물러서 있어야 했다. 한국은 '1등만 기억한다'지 않는가. 

-> 필자는 한국이 '1등만 기억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나이키 광고의 한 사례를 들었는데, 이런 장황한 사례를 들만한 수고가 없었더라도, 한국 사람들 스스로도 한국 사회가 '1등만 기억한다'는 점 자체는 내부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지점입니다. 근데 저자는 이 점을 환기시키고자, 유난히 한국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아직 각성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로 자신의 비판대상을 정하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한국 사회의 부정적 폐해 - 여기서는 금메달 지상주의가 되겠지요-를 한국인들이 이제 좀 버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논지를 전개시키는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번 '이호석 사태'는 '금메달 지상주의'와는 다른 방향의 이야기들을 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또 다른 시선으로 공분이 일어났는지 말이죠.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유도 금메달을 땄던 최민호가 그랬다. 그는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부상과 체중 감량의 고통 속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동메달을 땄다. 체중 조절에 문제가 생겨 경기 3일 전부터는 땀복을 다섯 개나 입어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 속에 사우나만 드나들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먹었다고 한다. 그 고통을 한국 사람들은 알까. 그들은 금메달만 안다.

그런 상태에서 출전한 경기에서 그는 동메달을 땄다. 고통을 이겨낸 동메달에 자신은 너무 기뻤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눈초리를 싸늘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는 졸지에 '루저'가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시선이 무서웠다…동메달을 따니 외면하고 혼자 외로웠다"고 했다. 특히 금메달을 딴 1년 후배 이원희만 챙기는 협회와 언론, 그리고 국민들을 보며 너무 속이 상해 혼자 소주 7병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로움과 절망감을 한국 사람들은 알까. 그들은 금메달만 안다.

혹시 장미란 이야기는 아시는가. 그는 "도하 아시안게임 때 은메달을 따낸 뒤 박태환과 함께 입국할 때 비참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 정말 모르시는가. 하긴, 그 비참한 심정을 한국 사람들은 알까. 그들은 금메달만 안다. 

-> 고로 최민호의 이야기 등등등은 그의 잘못된 방향으로 인해, 어설픈 부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 1500미터 결승에서 이호석과 성시백이 충돌해 한국의 금·은·동 싹쓸이가 날아갔다고 한다.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코너에서 이호석이 성시백을 인코너로 추월하다가 스케이트 날이 엉키며 두 선수가 모두 넘어져 버리자 누리꾼들은 이호석을 맹비난 하는 중인가보다. 한국의 금·은·동 싹쓸이가 날아갔다면서. 이정수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는가. 금메달도 모자라 이젠 싹쓸이 타령인가.
 

한 언론 보도를 보니 이호석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14일 하루에만 30만 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다녀갔고 이들은 1000건이 넘는 비판 댓글을 쏟아냈다고 한다. 미니홈피가 닫힌 15일에도 이날 오전까지 6만 명이 넘는 누리꾼이 방문했다고 한다. 

-> 소위 언론이 이런 경우를 '마녀사냥'이란 표현으로 잘 쓰고 싶어하지요. 근데 저는 더 나아가,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어떤 개념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는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뭔가 아리송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지나치게 욕을 먹고 있다' ; 그래서 이 '지나침'을 좀 거두어라, 대중들이여 ' 물론 개인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욕지거리를 남기는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야한다는 또 하나의 대립적 구도로 이 칼럼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희준이 좀 정성을 들여 '이호석 사태'를 바라봤다면, 사람들의 분노가 "너때문에 금,은,동 될 걸, 금만 되었잖아"라는 의견만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이런 경우는 지식인들이 자신만의 견고한 입장을 제시할 때, 즉 남들이 예!할 때, 아니오!라고 본인이 말을 할 때, 그래도 이 '아니오!'라는 입장에 대해 남모를 지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 양심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감과 만나는 것일텐데요. 그런 기대감이 주는 공명이란, 보통 칼럼을 읽었을 때, "그래 내가 봐도 너무했어."라는 응답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일겁니다. 하지만, 이번 칼럼은 좀 게을러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또 이런 시선이야!"라는 반응이 가장 먼저 왔습니다.


어느 누리꾼은 한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려 "정당하게 아웃코스에서 추월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코스가 뻔히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쪽으로 무리하게 치고 들어왔다"며 "분명히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결승선을 앞두고 마지막 코너를 도는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인코스, 아웃코스가 어디 있나? 쇼트트랙이 마라톤인 줄 아나.

또 어느 누리꾼은 관련 기사에서 "이호석 선수가 금메달 100개를 따와도 반갑지 않다"고 했단다. "올림픽 경기 중이라도 이호석 선수와 그의 담당 코치를 징계해야 한다"고도 했단다. 한국에 이렇게 정신 나간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솔직히 이런 분이 둘만 되도 참 문제다. 이런 분에겐 이호석을 대신 해 한 마디 해드리고 싶다. "네가 타라. 스케이트."

그럼 이호석은 무엇을 위해 올림픽에 나가 승부를 거는 걸까. 국가 대표는 누굴 위해 올림픽에 나가는 것일까. 국가를 위해서? 그런 생각 별로 안 할 거다. 국민을 위해서? 조금 하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절실한 것은 아니다. 이호석은 자신을 위해, 자신이 초등생일 때부터 매달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젊음을 불살랐던 빙판에서의 승부를 위해, 엄청난 땀과 고통의 결실을 맺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간 것이다.

그럼, 두 번째로 국가? 웃기지 마라. 이호석 같은 선수들은 어린 그를 데리고 1년을 하루 같이, 아니 십몇 년을 하루 같이 훈련장으로, 대회장으로 다니며 코흘리개를 국가 대표로, 올림픽 선수로 키워 준 부모님을 위해 뛴다. 이게 내 자식 잘 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내가 굶어도, 내가 힘들어도 내가 참는 게 내 새끼 잘 되는 길이라며 낳은 죄를 즐거움 삼아 뒷바라지 해온 어머니를 위해 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하형주가 경기 후 온 국민이 듣는 가운데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뭐라 했나. "어무이, 이제 고생 끝났심다."

그럼 세 번째로 국가? 미안하지만 아니다. 그를 길러준 감독님이다. 그 다음은? 그 동안 지원해 준 협회일 것이다. 그럼 국가는? 내가 열심히 뛰었는데 그렇게들 좋아하시니 그게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성시백과 이호석이 미끄러지면서 싹쓸이를 놓쳤다. 그래도 이정수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나. 그렇게 좋아하는 금메달을 땄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좋아하면 되지 왜 엉뚱하게 최선을 다했던 선수를 비난하나. 이호석이 이미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두 개나 국민들에게 바친 사실은 싹 잊었는가.

싹쓸이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언제 은메달, 동메달 쳐주기나 했나. 대접해 주기나 했나. 싹쓸이가 금메달보다 '폼'이 더 나서 그런가. 그게 그리 근사해 보이는가. 욕심도 좀 점잖게 부려라. 그 경기, 그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 한 젊은이를 욕하지 말고. 국가 대표 선수가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인가.

이호석은 양보하기 위해 올림픽에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스케이터다. 당연히 승리를 위해, 금메달을 따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다. 그의 신체와 머리는 오직 승리를 위해 프로그램 되어있다. 그리고 쇼트트랙은 경기의 특성상 마지막 20~30초에 승부가 결정된다. 또 쇼트트랙에서 신체 접촉은 경기의 일부다. 그래서 올림픽 같은 초특급 선수들이 겨루는 시합에서는 마지막 코너에서조차 승부를 가늠할 수 없다.

마지막 코너를 도는 그런 상황에서 이럴 땐 양보하고, 저럴 땐 치고 나가고 식의 작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 견제 등의 작전도 마지막 바퀴 전까지의 이야기지 마지막 바퀴에서는 혼신에 사력을 다한 질주만이 있을 뿐이다. 없는 틈도 만들어 돌파해야 하는 게 쇼트트랙 선수다. 이호석은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번엔 너무 했다. 어느 멍청한 국가 대표가, 어느 못난 운동 선수가 올림픽에 양보하러 나가는가. 제발 바랄 걸 바래라. 그 순간에 파고들지 않으면 그는 운동 선수 아니다. 그 상황에서 양보가 스포츠맨십인가. 그게 도대체 어느 나라 스포츠맨십인가. 그건 승부 담합이다. 승부 조작이다. 건달도 아닌 '양아치 스포츠맨십'이다.

그리고 금메달 아니면 '루저'라는 공식은 누가 만들어냈나. 언론이 만들어 놓고, 그리고 그 공식을 한국 사회가 이제까지 철저하게, 그리고 비정하게 지켜와 놓고 왜 이제 와서 은메달, 동메달 날아갔다고 죄 없는 선수를 죄인 만드나. 논란은 무슨 논란. 나라도 그렇게 할 건데.

하나 더 있다. 인기와 관심도 금메달이 싹쓸이 하지만 이거야 잠깐의 신기루일 수도 있고 실질적인 가치, 즉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경제적 가치'도 이참에 한 번 따져 보자. 국위 선양한 운동 선수들에겐 연금이 주어지는데 이것도 금메달만 대접한다. 점수로는 올림픽 금메달 90점, 은메달 30점, 동메달 20점. 연금 액수로는 금 월 100만 원, 은 45만 원, 동 30만 원. 상식적으로 예를 들어 80만 원, 60만 원, 40만 원 뭐 이런 식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 차별 치고도 이렇게 더러운 차별이 어디 있나.

각설하고, 이호석은 들어라. 당신을 욕하는 사람 신경 쓸 것 없다. 국가? 집어치워라. 올림픽 무대에 선 운동 선수에게 국가는 무슨 국가. 올림픽이 무슨 국가 대항전이더냐. 자신을 위해 뛰어라. 너를 위해, 너만을 위해 뛰어라. 이깟 수준도 안 되는 비난에 굴하려 지난 4년을 기다렸느냐. 

 

 
   

고로 정리를 해 보면 이렇습니다. 정희준은 '한국인'이라는 비판 대상을 내세워 소위 '박노자 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정희준의 '박노자 놀이'가 좀 엉뚱한 이유를 짚어보겠습니다.   

http://yhhan.tistory.com/1150 

-> 쇼트트랙 그리고 사이버 민중주의  

한윤형이 본인의 블로그에 올린 이 칼럼은 똑같이 '이호석 사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칼럼의 분위기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다만, 한윤형의 이 지적은 인터넷 분위기를 나름 열심히 살펴봤다는 느낌을 줍니다. 

   
  동계올림픽의 어느 쇼트트랙 경기에서 스스로 반칙을 저질러 실격하고 동료까지 넘어뜨려 한국 대표팀의 금, 은, 동 싹쓸이를 무산시킨 어느 선수에 대한 웹상의 비난 여론이 거세다. 피상적으로 보자면 WBC 결승전 마지막 순간에 이치로에게 얻어맞은 임창용에 대한 분개처럼 과잉된 '스포츠 민족주의'의 발현처럼 보이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네티즌들의 문제제기는 '한국의 메달 획득을 방해했다'고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이 사건에서 읽어내는 것은 실력을 견주는 공정한 경쟁을 왜곡하는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파벌주의다. 과거의 기사들과 경기동영상을 토대로 네티즌들은 문제의 선수가 어떤 파벌에 속해 있으며, 국가대표 선발전과 세계대회 등에서 그 파벌선수들의 승리를 위해 어떤 반칙을 범해왔는지를 고발한다. 살펴본 것만으론 근거가 너무 정연해서 반박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 네티즌들의 의견에 반대근거를 내세우려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사이버 민중주의'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네티즌들이 제시하는 자료는 몇년 전에 이미 완성된 것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인터넷상에는 이미 이 논란이 예전 대회에서부터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리'가 폭로되었을 때, 보통의 사회에서라면 문제해결과 재발방지를 위한 조처가 취해졌을 것이다. 비리가 없는 사회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리를 남들이 모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떠벌리고 다니는 사회도 희소하다. 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적어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비리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판례에 따른다면 명백한 범죄행위를 '삼성 예외주의'를 적용하여 면죄해주는 한국 사회가 회피하는 부분이다. 네티즌들이 비리를 폭로해도 누구도 이 의혹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는 여론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기득권을 유지한 채 그저 '별 일 없이 산다
 
   

그렇습니다. 정희준이 '박노자 놀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 것은, 이제 워낙 많이 나온 일종의 '인민재판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시선이 분명 필요함을 느끼면서도, 대중들의 행위 방향이 이런 시선틀 안에서, 마치 당연한 행위들만을 딱딱 들어맞게 보일 것이라는 지식인들의 안이함을 질타하고 싶습니다. 

본 칼럼은 이제 지식인들이 이러한 상황(언론에서 마녀사냥이라고 관습적으로 표현하려는 경우)에 대해 어떤 시각과 열의를 가지고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를 과제로 내놓은 것 같습니다. 정희준은 국가지상주의, 금메달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버려라!고 외치기 이전에, 대중들이 과거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을 두고 나름대로의 치밀함을 갖고 한국 사회의 파벌주의를 질타했다는 점에 대해 조사를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싸이월드에 폭증하는 비난 글로, 이 상황이 가진 오류를 다 파헤쳤다는 그 자신감넘치는 격분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국가우선주의와 개인의 욕망을 대립한 채, 한국사람들이 가진 국가우선주의에 대한 부정성을 비판하는 것도, 저는 좀 시각이 다른데요. 차라리 이 말은 인터넷을 좀처럼 하지 않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칼럼의 한 자, 한 자를 확성기로 읊어가면서 했다면 좋은 설교가 되었겠지만, 분명 지금의 이 분노에는 '국가우선주의'와 '금메달지상주의'가 이호석이라는 개인을 지나치게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는 입장으로 귀결된 것이 아닙니다. 

한윤형이 '사이버 민중주의'라고 개념화한 것에서, 나름대로의 그 긍정성을 보여준 것이라면, 네티즌들이 이호석 사태를 통해,개인의 오류를 사회적 구조 안에서 함께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지점은 바로 한체대 와 비한체대 간의 파벌 싸움이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여기서 안현수와 이호석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 안현수의 손을 들어주는 그런 입장도 있던데, 여기에서는 좀 더 신중하고 싶습니다) 

정희준 선생은 자신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 전문을 한 손에 들고, 유명한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이호석 사태'에 대한 정황들을 좀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사태는 정작 '이호석'사태가 아닌, 한국 사회의 깊숙한 '파벌주의'가 문제화되고 있는 지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임) 물론 이호석과 파벌주의 연관성이 확실한 사실인지, 아니면 짐짓 추리해봄으로써 나온 '편집된 견해'인지는 쇼트트랙 당사자들 만이 알고 있는 숨겨진 진실이겠지요. 그런데 이번 사건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것이 제 솔직한 입장입니다.

근데, 더 큰 문제는 언론의 게으름이지요. 정말 우리나라 언론사 종사자들, 공부 안 한다는 것을 이번 칼럼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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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그 지겨운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다시 발을 담그는 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우연히 본 한 소논문이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한국언론정보학회 '비판언론학 20년의 성찰과 전망'세미나에서 나온 <현존하는 적대,부재하는 이론 : 미디어문화연구의 비판적성찰>이란 글인데, 나는 미디어문화연구자들이 그동안 미디어문화연구의 위기를 진단하는 성찰과 논쟁을 보고, 이를 '미디어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성찰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 성찰이 문화연구에 더 나은 진전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뭔가 그러한 성찰을 제기하는 연구자의 과잉된 욕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미디어문화연구의 진보라는 큰 목적을 뒤로 제낀 채, 연구자 개인의 무오류성과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필드 안에서 선구자적인 성찰적 위치에 자리 서서,문화연구의 오류를 발가벗기겠다는 과욕의 수사만이 넘치다는 걸 예전부터 느껴왔다. 

문화연구가 맥을 못추고 있는 현실은, 정작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알맹이가 없다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자고 하는 이들도 지극히 제한적인 점도 문제다. 전규찬,원용진,이영주,박성일 등등등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맛을 들인 자들이 보이는 전술은 좌파,우파라는 정치적 스탠스와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하지 못한 채, 그들만의 계몽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삶의 정치라는, 그 지겨운 비판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그런 진보를 자처하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속한 학문 사회 내 삶의 정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벌이고 있는 착각은, 자신들의 성찰, 사실상 문화연구가 왜 이 모양이 되었냐라고 한탄하는 그들의 성찰이 당위 >현실이라는 입장에서 지나치게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 고로 그들은 마치 앤서니 기든스가 '설득'이라는 말을 상당히 모호하고 교묘하게 자신의 대안으로 내세워, 수사를 실체적 대안으로 포장한 것처럼, 그들은 성찰과 논쟁이라는 말, 그것에서 오는 구체적인 경합 지점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채, 그들의 강령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문화연구가 정치성이 약하다, 미국의 실용적인 포스트모던한 문화연구 때문이다, 문화연구에 한국이 있는가, 문화연구가 소수자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연구는 이론을 너무 실용적으로 소비한다 등등등 문화연구에 대한 비판과 옹알이는 사실상 새롭게 더 제시되는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의 순환'을 체현하고 있다. 그러한 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는, 바로 이 논문이 드러내는 문제점이다. 이들은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돌아보고,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이들은 여기서 지젝을 건드린다. 지젝이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견해를 가져와서, 한국의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자들의 의견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나는 사실 이런 시도가 불만이다. 이것은 사실상 문화연구자들이 지겹게 문화연구에 대해 쓴소리를 해대는 것, 문화연구의 그 탐욕스로운 이론의 습득,소비,이식과정, 특히 나름 유행이되고 인기가 있는 지식에 대한 열정적 섭식을 또 한 번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문화연구를 정공법적으로 비판하는 게 필요하다. 홀,윌리엄즈,그로스버그와 싸우며 문화연구를 보다 키울수는 없는 것인가. 결국 문화연구를 진정성있게 비판한다는 그들도, 가장 '트렌디하게'비판하는 굴레에 들어가고 만다. 문화연구에 대한 비판적 지점을 문화연구 내부에서 찾자. 즉, 역사적인 작업을 통해, 문화연구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돌파하자. 그러나 이 논문의 저자들은 정작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이 우회의 길을 걷고 있다면서,오히려 자신들이 문화연구의 이론적 다양성을 무기 삼아, 이른바 권력적 외부 형태의 지식(지젝,무페)을 무기로 하여, 그렇게 문화연구를 비판하고 있으니, 이것만한 모순이 없다. (차라리, 제임스 커런과 몰리 간의 논쟁이 훨씬 문화연구에 더 유익한 시간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연구 방법의 오류 -기호학과 텍스트 과잉 이라는 챕터는 더욱 가관이다. 이것은 흡사 구조주의와 문화주의에 대한 문화연구적 개관의 시기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데, 논문의 저자들은 한국적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돌아본다면서,되려 한국적 문화연구에서 기호학과 텍스트 분석에 제대로 천착한 논문들이 최근까지의 경향인가를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묻고 싶을 만큼 괴리적이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연구는 텍스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망각하고, 그것을 컨텍스트의 분석으로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이들은 구조주의가 전통적으로 받아왔던 비판, 역사적 시각의 망각 운운하며, 자신들의 강령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오늘날 문화연구의 한국적 현실과 괴리적이다. 한국적 문화연구에서 지금 젊은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상태에서 비롯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컨텍스트와의 긴장감 설정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문화연구는 마치 '반텍스트'적이며, 심지어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도, 문화연구를 컨텍스트 연구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내가 점점 기대를 가지지 않는 이유는, 문화연구의 성찰을 강령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들은 감정과 논리를 혼돈하고 있다. 그래서 더 과장된 수사와 우회의 전략이 성찰을 뒤덮고, 문화연구적 본질에 대한 정공법적 탐색을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헌납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은 좀 다른 형태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다시 호가트를 불러내고, 몰리를 불러내며, 헵디지를 불러내야 한다. 왜 성찰을 한다면서, 계속해서 문화연구의 내부자를 소외시키고, 문화연구의 외부자로 내부의 문제를 덮으려 하는가. 오히려 이것은 문화연구에 신념을 가진 성찰적 주체들이 문화연구를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또다른 절망의 반영인가. 우리가 들일 노력의 시간은 지젝의 문화연구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쌓아야 할 비판적 자성의 시간은, 버밍엄문화연구소이며, 스튜어트 홀이며, 레이먼드 윌리엄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왜 이 당연한 성찰의 지점을 망각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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