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오늘을 마지막으로 무슨무슨 그룹이 활동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니, 정말 무슨 잘못을 해서 이제 가요계에서 그들을 못 보는 것일까? 아니면, 더 좋은 음악을 들고 오기 위한 '오래된' 휴식기로 접어드는 것인가? 그들은 전자의 경우에도 속했었고, 후자의 경우에도 속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참 상이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빈번하게 들리는 것이 '활동중단' 그것으로 인한 '굿바이 무대'다. 어떤 이들은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팬들에게 그 나름의 예의있는 처신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내 입장은 다르다. 이것은 한국 가요계의 뼈아픈 현실이다. 아니, 쉽게 소비되고, 쉽게 인기를 얻는 만큼,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현.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짧은 주기 속에서 '고별 무대'라는 말을 자주 쓰고, 이와 동시에 빈번하게 '컴백'을 한다. 그래서 '굿바이'는 굿바이 같지가 않고, '컴백'은 컴백같지가 않다.
이러다보니 작곡가들은 죽어 난다. 이 죽어남이라는 표현은 작곡가들을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장처럼 음악을 찍어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늘날 음악 현실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 주기들의 주름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그 주름짐의 고통을 만회할 '패스트 뮤직'의 범람이 급증하고 있다.
물론, 하나의 앨범을 내고 나서 그 다음의 앨범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그 시간의 오래됨이 앨범의 퀄리티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앨범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 동안, 그 앨범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들을 조사하고, 음을 책임지는 앨범 제작자, 그리고 음악을 직접 목소리로 체현하는 가수들, 그리고 앨범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적 지식과 정보들을 조직화하며, 그들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들을 비롯한 다양한 관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기간이 보장된다면, 그러한 시간은 음악의 성숙과 진보를 위한 충분한 자양분일게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존재, 특히 타인으로부터 받은 명성과 결부된 흔들리는 존재 욕구에 과민할 수밖에 없는 연예인으로서의 숙명이 너무나 깊숙하게 스며든 오늘날 아이돌 그룹을 비롯한 대중음악인들에게, 그러한 존재 욕구를 지탱하는 중심이 '음악성'에 있는가 묻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거기서 좋은 음악의 생산이 기대되고, 좋은 음악을 소비하는 차원과의 관계가 설정된다. 이 관계 속에서 소비자인 우리는 음반이 아닌 '음원'적 성향이 갖는 소비주기의 신속성에 너무나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음원이 주는 퀄리티에 대해 생산자에게만 일임하는 차원을 떠나, 나름 진중한 소비를 추구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결국 표절보다 보기 싫은 가요계 풍경은 표절과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풍경인 듯하다. 너무나 자주 '굿바이 무대'를 외치고, 그 '굿바이'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자신이 정작 잊혀질까봐 겁먹은 체취를 뿌리고 다니는 문제적 행위들. 나는 이것을 생산의 문제에서만 떠넘기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음악을 소비하는 우리들도 각성해야 하는 문제다.
카라의 <루팡>이란 신곡이 유고의 모 가수가 부른 <인썸니아>란 곡의 인트로와 비슷하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점점 그 문제가 커지고 있나보다. G드래곤과 씨앤블루의 전례를 볼 때, 뜬금없이 떠올랐던 건, 가수들의 빈번한 굿바이 무대 인사와 컴백 무대 인사 였다. 왜 그랬을까?
적어도 나는 그들이 '헤어짐의 미학'을 알았으면 좋겠다. 헤어지는 사람은 '안녕'을 말하면,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오랜 시간의 침묵을 지키는 게 미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듯이, '안녕!'이라는 말을 해놓고, "아, 갈려고 했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서 다시 돌아왔어"라고 여러번 말하며, 주변을 서성거리는 자들은 매력이 없다.
표절 논란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도 바로 이런 '헤어짐의 미학'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 김작가와 인터뷰한 와이낫의 멤버 주몽의 음악적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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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작곡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표절 논란에 자주 휘말리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더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김도훈 씨의 '전적'이 화려하다보니 선입견이 생길 수 있다. 그걸 배재하고 비교해서 들어도 사실 비슷하단 말이지. 노트나 코드와 같은 전문적 개념을 떠나서, 유사성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듣는 사람들의 직관이라고 본다. 그 직관들이 쌓여 논란이 되고 여론이 되는 거다. 나도 곡을 쓰다보면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그 곡을 버려야 한다. 나중에 표절에 걸릴까봐라기보다는 곡 쓰는 사람으로서 '쪽' 팔린거다. 살면서 수많은 곡을 들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영향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노래 만드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자체 검열을 해야지. 자기 색깔을 갖고 곡을 쓰는 건 창작자의 프라이드 아닌가.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의 'You're Not Alone'의 코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산와머니' '담다디'와 똑같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 노래를 듣고 다른 노래가 연상되는가? 그게 프라이드고 작곡가가 지켜야할 미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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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지금 표절 논란에 휩싸인 사람들이 보이는 프라이드가 정작 음악성이라는 본질과 결부되어 있는가. 오히려 그들의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가 대중음악에서 '대중'을 소외시키는 '생산자적 마인드' 산업지향적 마인드, 심지어 '동종업계의 인식'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인정 욕구는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불안정한 열정을 지닌 팬덤의 '쉴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결국 '좋은 음악'을 추구하는 대신, '좋은 방어막'찾기에 더 골몰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런 그들은 헤어짐을 모르고, 자신들의 음악성의 부재 대신, 자신의 부재에 더 신경을 쓴다. 그래서 늘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소모적 '부재 놀이'를 하고 있다. 헤어지려면 확실히 헤어져라! 그리고 돌아오려면 확실히 돌아와라! 안 그럴 것이면 제발 그놈의 '몇 개월만의 굿바이 무대'니, '몇 개월만의 컴백 무대니'하는 빈번한 '헤어짐 놀이'는 중단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결국 오선지에 걸린 콩나물은 쉴 틈이 없지 않은가.
자신의 음악성에 자신감이 없다면, 진정 헤어짐을 고해야 할 것은 기계처럼 찍어내는 음 속에서 자신들이 관습적으로 저지르는 듯한 '업계지향적 음악 생산'이다. 그리고 이런 음악 생산자들을 단순히 체현하는 위치에서 가수들을 바라봐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목만 건강하면 가수라는 입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우리는 가수가 책임져야 할 분명한 윤리의 범주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수가 단순히 곡을 받아서 부르는 입장이라는 둥의 의견으로 가수가 불쌍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닌 것 같다.
결국 우리가 무수히 봐 온 최근의 표절 논쟁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건 음악의 완성은 작사,작곡가의 차원,가수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음악은 더군다나 그 사회적인 성격의 강조를 통해 지극히 '관계적'인 차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로 음악의 완성은 음악을 듣는 소비자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 음악을 둘러싼 주고 받음의 소통을 통해 우리는 '음악'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그 이해의 장에서 우리는 책임을 전가하는 차원이 아닌 책임을 공유하는 입장을 모색하는 방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