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 서문 1화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을 읽고.
잡지에 서문은 있는가? 나에게 잡지 편집장의 칼럼은 서문의 기능을 한다. 이번 호가 기획한 컨셉을 아우르는 글이든, 편집장이 쓰는 공간을 통해 맥락 없는 ‘주저리주저리 모드’의 글로 편집장 스스로의 권력을 행사하든. 가령 〈씨네21〉의 전 편집장이었던 고경태는 편집장 부임 초기, ‘<한겨레 21>스러운’ 분위기의 편집장 칼럼을 많이 썼다가 독자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이유는 왜 영화 잡지 편집장이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참고로 그는 <한겨레 21>을 담당하던 사람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런 고경태 편집장의 고집이 좋았다. 물론 그 고집이 그가 편집장을 그만 둘 때까지 지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 편집장의 공간은 이런 직업을 꿈으로 삼는 이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글, 간명하면서도 사회의 시류를 놓치지 않으려는 ‘포인트’ 있는 열정, 그리고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함을 동반한 유머를 보여주기. 특히 패션잡지의 편집장 칼럼은 이 세 요소가 더 ‘엣지있게’ 드러나야 한다. ‘구리지 않는’ 패션 스타일을 창조한다는 자부심만큼이나 편집장 칼럼은 이 시대의 ‘구림’과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패션 잡지는 독자에게 차이를 ‘선언’하는 것을 즐긴다. (여기서 ‘차이’를 잠시 의인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인기 있었던 것과의 ‘작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덮은 것으로부터의 ‘탈출’ 등. 차이를 선언한다는 것은 정적일 수 없다. 누군가 차이를 따라온다면, 차이는 도망가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차이가 나올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도망가려면 앞만 보고 갈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차이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타자’의 앞모습을 힐끔 쳐다보면서, 내 모습이 달라져야 함을 의식한다. 그래야 차이가 ‘생기는 법’이다.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뭉쳐 있는 <데이즈드>에서 이번 달 한계라는 주제로 사서 고생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점점 더 풍족하고 풍요로워지는 패션 매거진에서 오히려 한계 상황을 만드는 기획을 하고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역발상에서 시작됐죠. <데이즈드>의 여섯 에디터는 공간의 제약, 감정의 제약, 패션의 한계 등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 이를 기획하고, 힘겹게 진행했습니다.(16쪽)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의 2011년 6월호 편집장 칼럼을 보자. EIC(Editor In Chief) 안나윤은 칼럼을 통해, 풍요와 한계를 대립항으로 놓았다. 이런 구도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한 번 상상해보자. 그녀와 이 책을 만든 여섯 에디터들은 그동안 패션 매거진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상황을 축약할 키워드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래서 ‘풍족’과 ‘풍요’가 나왔다. 그렇다면 매일 새로이 론칭되고 있는 패션 브랜드만큼이나 풍부해지는 패션 세계의 글자와 이미지를 채우고 있는 패션잡지를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까. 그들은 식상함에 물린 독자들을 위해 ‘한계’, ‘제약’이라는 레시피를 만들기로 했던 것 같다. ‘차이’가 빈혈 상태가 올까봐, 차이의 신봉자들은 ‘충격’, ‘파격’ 혹은 ‘전복’과 가까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예술 또한 이런 언어와 가깝고, 그래서 패션과 예술은 오늘날 가장 끈끈한 교우지간이다.
패션잡지에서 패션과 예술의 조합은 아직 유효한 ‘핫’ 트렌드인 것 같다. 마이크 페더스톤이라는 사회학자가 쓰면서 유행이 된 말(그 이전에 페더스톤에게 조상급인 선배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쓴 ‘사회학적 미학’이라는 개념도 세트로 챙겨두자), ‘일상생활의 미학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예술적’으로 보이도록 힘쓰고 있다는 설명은 ‘이 사회의 요즘’을 분석하는 인기 있는 시선이 되었다. 굳이 말장난을 하자면 사람의 ‘라이프’는 ‘스타일’을 갖춰야 하는 시대이다.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은 (시기를 타는) ‘유행어’의 위치에서 우리 시대의 영원한 ‘표준어’로 올라섰다. 전후 시기 후, 패션이 전시장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주목했다는 것은 패션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안고 가는 패션사가들의 시선에 따르면, 더 이상 상류층은 패션의 주도자가 될 수 없었다.(이러한 내용에 관심이 많다면 제니퍼 크레이그의 《패션의 얼굴》을 권한다)
오히려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그것과 관련한 패션이 ‘도발적’으로 탄생하면서 패션은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이 ‘공/시간대’를 자극하는 사회적 언어가 되었다. 이후 패션은 늘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진단하는 청진기 역할을 도맡고 있다. 병명은 지루함, 식상함이며, 패션 잡지는 이것을 치료하기 위한 그리고 이것을 치료하라고 명령하는 조언자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나는 ‘함께’한다고 해서 ‘같은’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함께’와 ‘같은’의 거리를 벌리기. 그것이 곧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패션 잡지가 건네는 ‘차이 유지법’이었다.여기서 패션 잡지는 예술을 빌려 기품을 유지해야 했고, 예술은 패션 잡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 다음 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