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30세상보기. 연재 마지막 글입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잠시 일상성이란 용어에 취했다. 관객은 자신이 목욕탕 한증막에서 자주 보인 습관, 사과를 감자 깎듯 할 때의 당황스러움, 가끔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냄새를 맡는 동작까지 영화가 담아낸다는 것에 공감이란 반응을 보냈다.


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영화비평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선 홍상수 감독의 작품과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작품이 주목 받으면서 일상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만 일상성을 주목한 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출판계에서는 ‘○○가지’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습관’처럼 일상은 소소한 미담과 체험이 가득 찬 에피소드로 가지런히 수집되었다.

뒤돌아보면 일찍이 이게 대체 일상성인가라며 의문을 표한 사람들은 많았다. 당시 평자들은 ‘쇄말주의’란 용어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쇄말주의는 삶에 대해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질문을 던지는 대신, 삶을 유난히 자잘하게 표현하는 데 그치고 마는 어떤 기교를 비판할 때 쓰인다. 이 기교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은 일상 속 한 장면을 ‘~하는 법’으로 재현하는 경우였다.


과거 영화계나 출판계가 주목해온 일상성은 최근 피키캐스트 같은 생활플랫폼, 웹툰 그리고 독립출판계로 옮겨온 듯하다. 선뜻 입 밖으로 꺼내기엔 창피하거나 곤란한 생활상을 ‘짤방’과 위트 있는 짧은 글로 보는 게 낯설지 않은 요즘, 기존 언론사와 포털도 주요한 카테고리에 ‘~가지’로 수렴되는 이야기를 자주 게시한다. 작은 서점, 독립 책방에 꽂힌 다종다양한 잡지와 책들에는 생활들이 난무한다. 가히 생활이 폭발 중이다. 나는 이를 ‘가지 저널리즘’이라 부르려 한다.

가지 저널리즘에서 눈여겨보는 지점은 배려와 배움이다. 가령 생활툰이라 불리는 웹툰, 그리고 우리 삶을 유머러스하게 재구성해내는 피키캐스트의 감각엔 배려가 있다. 특히 피키캐스트는 삶 속에서 신경 쓰이는 여러 순간을 재치로 전달한다. 이때 재치는 우리가 예민하게 고민한 생활상을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배려의 기술이다. 하나 뒤틀어 보면 배려란 당신이 사회가 세워놓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게 권하는 삶의 소극적 방어술일 뿐이다.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푸는 법 TOP5’ ‘조별 과제할 때 챙겨야 할 갈등 5가지’를 통해 얻은 재치에서 내가 속한 세계를 탈바꿈할 수 있는 상상은 없다.

가지 저널리즘이 우리에게 재촉하는 것은 이른바 ‘생활 지능’이다. 우리 삶이 베스트로, ○○가지로, 탑으로 항목화되는 사이 개인은 생활의 미세한 장면을 그때그때 어떻게 신경 쓸지 요구 받는다. 이는 어린 시절 들었던, 몇 살 인데 아직도 형광등을 제대로 못 갈아?, 신발끈도 못 묶어? 같은 부모들의 ‘생활점수’ 채점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다.

가지 저널리즘은 개인의 눈에 심리를 부여한다. 카페, 칸막이 책상, 술집, 고시원, 교실에 위치한 ‘나’는 상대의 마음을 활달히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러나 성격상 내향적인 관찰자로 규정된다. 관찰자인 나도 누군가에게 생활지능을 평가 받는다. 관찰 속에서 생활은 점차 오디션이 된다. 그럴수록 내 관찰은 정찰로 변한다. 조용한 당신과 내가 일상 속에서 언제 음침하고 괴물 같은 적으로 다가올지 모르니 미리 조심하자는 정찰. 여기엔 서로 부대끼며 얻는 배움의 예상치 못한 묘미란 없다. 예측 가능한 심리적 패턴을 접하면서도, 공감이란 이름 아래 전혀 생각지 못한 삶에 관한 고민을 만난 마냥 연기(演技)할 뿐이다. 생활의 세밀화(細密畵)에만 집착하는 가지 저널리즘이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공감이야말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괴물이 아닐까. 난 여전히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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