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과 김엄지의 작품을 비교해보면서, 과연 작품을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범위인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두 작품 다 표면적으론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의 경계를 되묻는다. 물론 당신은 이런 '시도' 자체에 대해 이미 기대치를 낮추고, 실험이란 용어에 냉소라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할 이야기를 비교적 냉랭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줄 믿는다. 아울러 나 또한 실험이란 용어를 내걸어 언급하는 작품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어떤 성공작으로 둔갑시키고픈 마음은 없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명백한 실패작을 완성도 있는 성공작으로 둔갑시키는 독창적인 해석'이란 지젝의 견해를 고스란히 내 시야로 전유할 능력은 아직 내겐 없다. 물론 내가 언급하는 작품들 또한 명백한 실패작도 아니다.

2. 난 두 작품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물성을 띤 출판이 과연 그 작품에 어울리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이란 장르에 대한 신경 씀에서 온 것은 아니다. 특히 김엄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손은 검은 글자를 지면에 새기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내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게 맞는 걸까, 아리송했다. 소설도 일종의 조형이라면, 소설가는 자신의 언어를 '디자인을 기다리는 말들'로 규정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에 대한 디자인까지 책임지는 것이 작품을 쓰는 것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까.

3. 어느 문학 웹진에 실린 김엄지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한 번, 데스크톱으로 한 번 작품을 읽었다. 그리곤 스크롤바를 내리는 내 손가락의 감각과 눈의 이동, 이 감각적 배치에 스며든 작품의 행갈이와 어떤 호흡, 서술하는 언어들의 헤엄침을 보면서, 과연 웹진이라는 형태의 공간, 더 나아가 책이라는 형태의 공간과 그 공기는 김엄지가 글자로 자아내는 공기와 어울리는 걸까. 나의 눈과 몸은 그리 익숙하게 작가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여전히 우리는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어떤 미적 결과물을 위한 오퍼레이터 정도로 염두에 두고선, 텍스트에 대한 보완적 성격으로 디자인의 미적 가치를 한정해버린다. 그러나 과연 디자인은 소설을 위한 어떤 전략이자 소설의 언어를 뒷받침하는 테크놀로지로만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5. 가령 나는 최근 한 계간지에 실린 이종산의 단편을 보면서 '페이스북화된 관찰기'라는 특성을 떠올렸다. 본 작품 속 등장하는 카페에서 주인공 화자가 선보이는 어떤 '심리적 눈'은 페이스북 사용자 중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자신이 카페에 앉아 주변을 살피던 내용을 1. 2. 3. 순번을 매겨가며 공유하는 것과 유사했다.(물론 이종산 작가가 직접 그런 행위를 벌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실천의 감각 또한 우리 삶의 신체적, 심리적 재배치를 유도하는 '디자인적인 것'으로서 저 소설이 책이라는 지면이 아닌 다른 영역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6. 여기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은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에 의해 어떤 의미를 갖는다. 그러했을 때 우리는 어떤 단촐함과 평상심으로 독서 경험이라는 자체의 향수와 여전한 매력을 공유한다. 하나 우리 손이 느끼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과감함을 느껴봐도 되지 않을까.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은 문학과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재설정을 도모해봐도 되지 않을까. 디자이너의 어시스트와 소설가의 텍스트라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기존의 시각적 실험 체제라는 영역 대신, 우리는 좀 더 소설가 본인의 직관에 따른 시각 체제의 구상과 그 실천을 작품을 쓴다는 것이라는 범위로 더 밀어붙임을 같이 모색해봐도 되지 않을까.

7. 언젠가 웹투니스트 이자혜 작가가 너의 아버지는 부자란다라는 암호와도 같은 짧은 말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암호를 제각각 받아들이면서도 뭔가 해석될 수 없는 기운 가운데 리트윗을 하고 관심을 보였다. 나는 김엄지의 작품이 외려 책이 아닌 트위터를 통해 공유되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했을 때 비평가들은 자신의 앎의 깊이로 표층 너머를 해부하려는 데서 오는 허탈함을 돌아볼 경우가 올 것이다. 암호와도 같은 말에 대해 그 암호를 푸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이 아리송한 고민에 대한 답을 풀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표층 너머의 세계를 '소설 너무 쉽게 쓰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작가의 태만으로 몰고 싶은 유혹과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 바퀴에서 나는 탄 냄새 자욱한 '공회전식 물음' 같은, 비평은 왜 하는 걸까란 마주하기 싫은 질문 사이에서 또 한 번 방황한다. 나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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