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관계는 ‘매개’에 의존하고 있다. 관계가 매개적이라는 건, 나와 타인 사이에 나름의 벽이나 창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벽이 있어야 타인에게 편히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따가운 반응을 듣지 않아도, 가상의 벽에서 반사된 내 목소리를 그 반응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창이 있어야 안정감 있게 목소리를 낸다. 내가 짜놓은 틀 안에서 본 모습으로 표현해야 당황하지 않고 의사를 강하게 표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개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기까지 나름의 단계와 우여곡절을 겪는다. 길로 치자면 지름길보다 기어코 에움길을 택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 또한 고양이성 인간의 특색이다.


문제는 에움길에 주저앉아버리는 때다. 결국 내 앞에 놓인 벽과 창이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 채,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자기 자신과 섹스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은 관계의 에움길에 정착해버린 고양이성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웹디자이너 마틴과 건축가 마리아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둘 다 누군가에게 어떤 교감을 느끼다가도 이유 없이 확 식어버린다. 특히 이 작품엔 심리 전문가도 주인공들의 관계 실패를 제대로 짚어주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마틴은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심리학자를, 마리아나는 수영장에서 심리 상담사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지만 카메라는 취향에 대한 교환에서부터 섹스까지 욕망의 접점을 찾지 못해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들을 지긋이 보여준다. 차리리 마리아나가 행복한 순간은 물건을 쌀 때 쓰는 뽁뽁이를 터뜨리며 분을 풀거나, 자신이 디자인한 마네킹에 올라 타 자위를 할 때다. 마틴 또한 우연히 알고 지내는 도그 시터와 섹스를 하는 것보다 컴퓨터에 설치된 온라인 채팅 사이트, 미니 컴포넌트와 텔레비전, 강아지와의 대화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마틴과 마리아나는 일찍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탐구해왔던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리는 사람들’에 가깝다. 




지젝은  "나는 나 자신과 결혼했네"라는 뷔욕의 노랫말에 감명받은 중년 사진작가 그레이스 젤더의 삶을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결혼 서약을 했고, 결혼반지를 낀 채 거울 속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 타인과의 만남이 점점 불안한 시대다. 젤더가 올린 결혼식을 마냥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볼 수만은 없다. 다만 문제는 삶의 안정에 있어 자신>타인이란 부등식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의 부등식이 만연해질 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란 없을까.








여기 문이 하나 있다. 확 열리지도, 확 닫히지도 않은 문이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은 윤희의 집으로 함께 간다. 늦은 밤, 둘 다 술에 취했다. 최현과 윤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최현은 초를 키고, 혼자 운동을 하며 반쯤 열어놓은 문에 대한 해석을 벌인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많은 문들이 닫혀 있을 때, 방긋이 열려 있는 듯 마는 듯한 그런 문의 이미지에 주목하며, 감수성의 상상을 제안한다. 바슐라르의 제안에 잠시 기대어본다면, 우리는 최현과 윤희의 행동에 '찌질함'이란 반응을 보내는 이들을 싱겁다며 충분히 야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경주>가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 속에선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곤경을 겪은 사람들 뿐이다.  다들 관계의 에움길, 욕망의 에움길에 안주한다. 영화 초반부, 친구의 문상을 치르고 추억이 묻어난 경주를 찾은 최현은, 역 앞에서 담배를 피려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에게 "여기서 담배를 피면 안 돼요"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 최현은 전 장면에서 담배를 피는 친구 옆에서 담배 냄새만 맡고 있던 터였다. 담배를 피려 하면 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가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녀는 아내의 역할을 한 셈인데, 이어지는 소녀의 질문은 더 중요하다. "아저씨, 그거 진짜 담배예요?" 최현은 흡연하기 위해 담배를 들었지만, 정작 담배는 입이 아니라 코 앞에서 맴돈다. 담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현은 자신이 담배를 피었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소녀의 말은 이중적 속박이다. 소녀는 최현에게  그곳에서 담배를 피지 말라는 사회적 규율을 전했지만, 한편으론 왜 너는 너의 욕망을 해소할 물건을 사놓고 그 물건의 효용을 제대로 만끽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소녀의 이중적 속박은 최현에겐 상처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과연 그러할까. 






최현이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장면은 옛 연인 여정을 만나면서부터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정은 최현에게 강렬한 진리를 남기고 경주를 떠난다. 서울로 올라가려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여정은 오래전 최현과 술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 최현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그때 임신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흐른 뒤에야 처음 전한다. 여정 대신 중국 여성이란 결혼한 것에 마음이 남았던 최현은 충격을 받는다. 여정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대화 속에서 교환되고, 여정의 상처는 최현의 마음속을 움푹 찌른다. 최현은 드디어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다만 최현은 이제 딱 하나, 자신의 욕망적 절제선을 끊어냈을 뿐이다. 그는 영화 내내 보이지 않는 금기를 의식하며 갈등한다. 자신을 움푹 찌르는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한 건물에 사는 이웃의 얼굴마저도 제대로 쳐다보기 어렵다. 이웃이 있다고는 느끼지만, 그것은 층간 소음에 의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해, 음식쓰레기봉투를 문앞에 내놓지 말라는 메모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의 앞 모습을 볼 때 그 놀람은 개인의 이상한 기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의 원제는 'medianeras', 건축 용어로 측벽이란 뜻이다. 건축가인 마리아나는 타인의 앞과 뒤를 제대로 보기가 두려운 요즘 세상을 증언한다. 그녀는 건축법상으로 불법인 측벽에 창을 내려 한다. 마침 그녀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디자이너 마틴도 측벽에 창을 낸다. 마리아나는 여성의 G-스팟이 연상되는 건물 벽 이미지 안에 창문을 만들었고, 마틴은 남성의 팬티 그림이 그려진 건물 벽 안에 창문을 만들어, 팬티에 구멍을 낸다.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린 사람들, 타인과의 만남이 설레지만 그 설렘과 욕망의 기한은 '우리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요?'라는 그 말을 한 순간 최고조에 올랐다가, 정작 만남이 이뤄지면 식어버리는 이 '약속 오르가슴'에 걸린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불법적인 창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러한 창은  나에게 침잠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세상을 향한 개입과 응전의 가능성이다. 타인은 곧 만남이며, 타인을 욕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외려 우리를 흠칫하게 하는 저 올바른 배려와 우회 속에 놓인 관계의 언어들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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