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30세상보기에 <위플래쉬 증후군>이란 칼럼을 썼다. 보험사기에 잘 활용되는 이 증상을 통해, 보상시장이 국내에도 점차 활발해진 가운데, '보험사적 사고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았다.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전문링크)



올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위플래쉬(whiplash)’. 직설을 서슴지 않는 음악가 플레처란 캐릭터 때문에 ‘채찍질’이란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한데 위플래쉬엔 흥미로운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는 ‘행복 산업’에서 ‘위플래쉬 증후군’에 대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아픈 딸 때문에 데이비스는 병원을 찾았다. 그는 진료를 기다리다 서류를 놓고 쑥덕거리는 남자 무리를 봤다. 그들은 뭔가를 상의 중이었다. 간호사가 나왔다. 서류를 쓰던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동료들은 걱정스런 낯으로 돌변했다. 데이비스가 보기에 남자는 목을 다쳤다. 허나 진료를 받으러 간 남자는 응급한 상황치곤 동작들이 과했다. 데이비스는 보험사기 공모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뒤에서 오는 차가 정차한 차를 들이박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정차해 있던 사람이 자신의 목뼈를 ‘심하게’ 다쳤다고 ‘느끼는’ 상태, 그것이 위플래쉬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보험사기에 자주 활용된다. 의사와 사고 연기자들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공모하기도 한다. 이때 의사는 다친 이의 아픈 느낌을 병명이란 사실로 진단하지만, 보험사는 다쳤다는 게 실상 느낌은 아닌지 그 ‘저의’를 진단한다. 사고를 낸 사람, 당한 사람, 이를 중재하는 사람 모두 보험금 앞에선 육체에 가해진 고통은 사실이 아니라 온갖 주장들임을 숙지하고 있다는 듯 논쟁을 벌인다. 보상의 수준을 따지기 위해서다.

여기서 내가 위플래쉬 증후군을 곱씹는 이유는 누가 정말 다쳤고 다침을 연기하는지 밝혀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위플래쉬 증후군은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보험사적 사고’를 돌아보게 해준다. 사건ㆍ사고 속 의도 읽기에 단련된 보험사들은 제대로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허나 타인의 의도를 읽는 데 치중하면 그 혹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꼼수’로만 해석되기 마련이다.

일이 터지면 기꺼이 보험사가 되길 바라는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사건을 바로 나누고, 갑을이란 관계를 쉬이 들이민다. 피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속된 말로 ‘피해자질’을 자처하진 않는지 꿍꿍이를 검사한다. 이 과정에서 보상금은 누군가의 육체적ㆍ감정적 손실을 막는 차선의 비용이기보다는, 돈을 받은 이상 피해자도 채찍질할 구석이 있으리란 의혹의 비용으로 탈바꿈한다. 사람들은 ‘을질’이란 표현으로 을이라면 을로서 감수해야 할 비난의 비용을 책정한다. 새삼스럽지만 오늘날 보상금은 누군가의 이유 없는 화풀이나 혐오를 응석 정도로 받아줘도 되지 않겠냐, 당신은 돈이라도 챙겼으니까라는 메시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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