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실패해서 생긴 먹먹한 감정이 아니다. 오늘날 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왜 자신을 낄 수 없는가에서 비롯된 좌절감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듯하다. 고로 우울은 세계를 향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간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사회학자 워너 본펠드의 말을 떠올려보면,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세계를 향한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린 이들의 영역일 뿐이다. 허나 우리의 비판적 기획은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렸을 때 많은 걸 놓치고 만다. 고로 부정의 부정에 대한 생각은 세계와의 대결을 벌이는 주체 자신을 강조하듯 소묘하고 그 비극적 결말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부정), 그 부정의 방식을 감안한 채, 자신이 기대고 있는 세계의 잔혹함 자체에 방점을 찍고 생생히 그려냄으로써 주체의 필연적 실패를 이야기한다(부정의 부정).
주체의 필연적 실패는 앞에서 말했듯, 세계와의 대결 자격을 둘러싼 박탈감, 초조함, 무력감이 혼재된 우울의 상태다. 그러했을 때 부정의 부정이란 사고를 받아들이는 우울의 주체들은 이 세계를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왜 세계는 나를 혼내지도 않는가(김소진이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보여주듯, 이 세계가 괴물 같은 이유는 세계가 더 이상 나를 혼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울의 주체는 우울의 기예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비해 더 기민하게 신경쓰게 되며, 선망할 수 있는 '우울가'를 분석하면서 동경한다. 분석되는 우울가는 자신이 분석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따라할 이가 생긴다는 걸 안다. 고로 모방할 수 없으면서도 슬며시 모방을 할 수 있게끔 틈을 벌려준 채, 도망쳐 새로운 우울의 구역을 만든다.
그러했을 때 앞서 나간 우울가는 우울과 가까이하는 세계를 향한 냉소와 그 냉소에 반하는 지극히 평범한 감정을 능숙히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우울로부터 '당황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타격한다. 우울가의 우울에 당황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던 이들은 이제 우울가의 우울이 실은 평범성에 기초해 있다는, 누구나 누리고픈 행복의 상태에 귀속되었다는 반전에 당황함으로써 우울가를 동경한다.
최근 우울과 세계를 문제의식으로 삼은 여러 젊은 해외 뮤지션의 앨범 리뷰와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면서 나는 어떤 공통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내향성에 기초한 사운드 속에서 굉장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그 내향성의 사운드를 실생활에 관한 선망의 영역으로 구성해낼 줄 아는 기예를 가졌다. 나는 이들을 '포스트 멜랑콜리'의 주체들이라 명명해보려 하는데, 이들의 '문화적 우울'은 가장 전략적이지 않으면서 그렇기에 전략적인 감정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