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프카에게 꿈은 자신의 "개념적 인물"(들뢰즈&가타리)을 만드는 공장이다. 이 공장은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 몸에 생기가 돌아야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공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피로가 출근 조건이 된다. 일을 하다 보면 능숙해진다. 이 공장에서 능숙함이란 그곳에 출근하거나 퇴근한다는 시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능숙할수록 이 망각은 의식적이기보다는 천연덕스럽다. 공장일에 능숙해진 카프카는 잠이란 현실적 구분선을 자유자재로 부린다. 꿈에서 깬 자신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하고, 때론 잠과 절취된 꿈 자체를 담담하게 읊조린다. 이 꿈의 숙련공은 이제 습관적으로 말한다. 

나는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거라고

2
카프카만큼이나 꿈을 소중히 다룬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게 꿈이란 '소망이미지'의 생성과 파괴가 변증법적으로 일어나 폐허가 된 곳을 '각성'의 자세로 거니는 통행로였다. 벤야민은 꿈을 통해 희망을 소망의 실현이 나타나는 이미지로 보지 않고, 소망의 실패 속에서 지연되는 역사의 도래와 그 기대로 보았다. 이 도래와 기대는 이미지의 연이은 생성이 아니라, 이미지의 파괴와 구축을 오가는 '파상력'의 목적이다.

3
카프카의 '예술이 된 꿈'은 벤야민의 파상력과 닮았다. 그는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었다는 강조를 통해 꿈의 영역을 파괴하고 꿈의 이미지로 현실의 영역을 생성해낸다. 현실 속 도처에 있는 사물에서 신들을 발견했던 벤야민처럼, 카프카는 꿈이라는 공장 속 컨베이어벨트로 운반되는 꿈속 사물에서 신과 요정을 찾아낸다. 허나 카프카의 신과 요정은 보다 고딕적이다. 꿈이라는 공장의 분부는 노동시간의 한계를 따지지도 묻지지도 말라는 것이며, 이에 적응한 카프카는 이 공장에서 자신을 내맡겨버린다. 카프카는 꿈을 꾸기 위해 피로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피곤해진다. 꿈에서 피로해진 인간이 만난 사물과 인간, 그것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또다른 꿈이다. 카프카가 꿈을 꾸어 만난 또다른 꿈은 절로 카프카의 '이명'이 된다. 

4
이명의 존재가 된 카프카는 <판결>에서처럼 친구와 아버지에 자신을 투영하듯, '카프카들'이 된다. 그러한 '카프카들'은 꿈속에서 대체로 두 가지 물음을 던지지만,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 답을 향한 물음이다.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여기 온 거죠?" 

허나 이 물음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카프카의 파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이란 이름 아래 이미지들을 '앞으로 나타날 것'이란 소망에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처럼. 그는 꿈이라는 공장에서 생성이 아닌 파괴를 꿈꾸는 노동자로서, 상식과 배치된다. 그가 꿈에서 만난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파괴되어진 것들'일지 모른다. 진리는 이렇게 불현듯, 전혀 새로운 형성과 창안에서 파괴의 숙명을 안은 채 나타난다. 
카프카가 꿈속에서 만난 이미 파괴되어진 것들은 허나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기에,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고 있는 공간 속 사물은 어쩌면 예전의 당신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고로 우리가 내일 당장 그레고르 잠자의 삶을 산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게 잠 없는 꿈은 시작된다.


* '파상력'에 대한 생각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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