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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신형철의 [이 사랑을 계속 변주해나갈 수 있을까]와 김소연의 [순교하는 장난]을 읽었다. 두 편 다 김수영에 관한 글이다. 읽고 나서 이 두 편을 중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철의 글이 김수영에 관한 대서사시라면, 김소연의 글은 단막극 같은 느낌이다. 신형철이 답은 지문 속에 있더군요 하는 그다운 범생이의 마음으로 김수영을 우직하게 계승하려고 한다면, 김소연은 커피에 따라나오는 냅킨에 우연히 적어본 메모들에서 출발한 소소한 선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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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선언이라고 했지만 조촐하진 않다. 김소연은 소소함 속에서 김수영의 감각들을 꼼꼼하게 포착하고 배치한다. 이 시인은 김수영에게 천진성이란 감정을 발견하고 그가 언급한 '와선'에 호감을 느낀다. 부처를 체감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성실한 기운을 내뿜기보다 방구석에 누워 허공을 보며 부처를 느껴보려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 그것이 와선이다. 와선은 단지 건방짐이 아니다. 김소연에게 와선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이에 기인한 천진성은 시대가 강압하는 정서와 맞붙기 위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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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는 김수영이 사랑을 모호하게 다뤄왔다고 말하며 이것은 김수영의 성실한 방황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김수영은 '사랑은 무엇이다' 대신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시를 통해 말해왔다. 사랑이 전자처럼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가 됨으로써 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어떤 필사적인 기운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그 기운은 419에 가닿아 있으며 김수영이 맞닥뜨린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김수영은 사랑을 통해 절망으로 주변을 다 뒤덮고 싶은 체념 대신 그래도 남아 있는 기운의 긍정을 도모하려 한다. 그리하여 신형철이 주목하는 김수영의 사물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다. 한때 김수영은 이 물 끓음에서 소시민적 안일함을 느꼈다. 시대는 험악해지는데 '나'는 방 안에서 이 '들끓음'을 외면한 채 물 끓음에서 생명의 존속을 확인하는구나 하는 그런. 그러나 시인은 그 생각을 확언하지 않았다. 사랑을 욕망의 자리, 일상의 자리에 한 단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이 외려 우리가 다시 한번 시대의 불우함을 뜨거이 이야기하기 위한 예열이자 시작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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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은 오보에와 오케스트라의 음적 조화를 위해 오보에가 반음을 낮추어온 유래를 설명하며, 시인으로서 '낮춤'의 자세가 굴복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길 소망한다. 
김소연이 주목한 김수영의 사물은 '팽이'였다. 팽이를 세차게 돌리는 어린아해.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풍경에서 낯섦과 그리움을 느끼는 어른. 그녀는 우리는 어른이라서 이미 서럽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천진성을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를 먹은 만큼 잘 발휘할 것 같지만 그 기대는 빗나간다. 어른은 자신도 모르게 정돈되어간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운에. 그래서 팽이가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 팽이가 동공 안에 들어와 접착된 상태일 때까지 그 순간에 중독되어보는 장면은 어른에게 남겨진 가냘프지만 붙잡아야 하는 새로운 선언의 동기가 된다.
김소연이 밝히는 선언은 다음과 같다.

"불온이 아닌 악동, 반란이 아닌 반동, 이것이 우리에겐 우리의 악기로, 우리의 음계를 찾는 우리의 주법이다."

신형철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듣고 보는 김수영의 옆에 다가가 그 기운에 청진기를 댄다. 정확성과 엄밀함을 목적으로 한 진단이 아니다. 고스란히라는 태도가 담긴 전달이자 공유의 목적이 담긴. 그러했을 때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속 호소력은 "넉넉한 믿음이 있어서 아들을 껴안는 아비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믿음을 믿어야 했던 아비"에서 나온다. 

믿음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했던 김수영은 신형철이 보기에 사랑을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시인이다. 그는 그가 체험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자 충성, 성실, 헌신의 윤리를 보였다. 물론 이 글 말미에 바디우의 사도바울론을 끌어들여 기념하는 신형철의 태도는 그다우면서도 그답지 않은 '물끓음'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김수영의 존재 의의에서 유훈을 이어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바디우를 '교훈적'으로 전유했던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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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필자가 시도한 김수영의 조망 속에서 다시 한번 예술에게 아니 실은 내 자신에게 부탁하고픈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을 느꼈다. 김수영이라는 인물을 사건을 기념하고 싶은 문장이 아니라 김수영의 감각들을 끄집어내고 해체하고 새로이 공유하고픈 문장 그리고 문장에 도취되지 않는 사유.
그러기 위해 이제 필요한 건 감각하다, 즉 계속 김수영을 '덜어내는' 시도일 것이다. 덧대려는 기운은 끌리지 않는다. 내가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기념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이니. 다시 김수영처럼 턱을 괸 채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복사 씨 살구 씨의 존재인 인간을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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