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영화나 보자 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특별한 날 붐비는 곳에서 조금은 힘겹게 있어보고 싶은 것도 사람의 마음. 준비가 서툰 남자들은 예쁜 옷과 센스 있는 화장을 하고 나온 여자에게 눈치가 보여 "다리 많이 아프지? 미안"이라는 말을 여러 번 남기며 상황을 넘기기 급급할 것이다. 그러는 것도 한두 번. 여자에게 '괜찮아라는 게이지'가 떨어져간다.
예약을 미처 하지 못한 날, 준비를 외려 많이 한 발제자가 더 입이 굳는다는 자기만의 개똥철학을 대입해 우연의 기적을 믿어보자고 하며,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발품에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다라고 하며, 여기저기 식당을 찾아보지만, 남은 것은 연인의 손에 서린 땀. 그리고 곧 대기 중인 "그냥 여기 들어가면 안 돼?"라는 여자의 음성.
남자는 우연의 기적 대신 우연의 오기를 따른다. "조금만 더 찾아보고 아니면 정말 거기 가자"라는 맹세는 오기에 묻힌다. 그러다가 그 오기는 유머도 아닌, 화도 아닌
이상한 표현들로 채워진다. 여자는 지금 이 남자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의아할 것이다. 이미 남자는 혼이 나간 상태. 자기가 미리 검색해놓은 옵션 1,2,3가 무너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드디어 찾았다"(자리 있다)라는 말과 "여기 맛있다"라는 말은 흥정을 해야 하고, 남자는 그래두 이 시간에 이렇게 나오니 좋다는 '의의평론가'로, 여자는 그 '의의평론가'가 매긴 별점과 코멘트에 반격을 할 차례다.
여자의 깨작깨작이 신경 쓰이고, 남자는 식당을 나와 걷다가 어렵게 들어간 카페 구석자리에서 여자와 어색하게 커피 한잔을 마신다. 침묵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야 인상 좀 펴라. 아 참말로 느무하네" 갑자기 사투리가 나온다.
"왜 화를 내?" / "아니 좀 사람이 그럴 수 있지. 너는 그걸 또 꿍하게 그러고 있냐"
남자는 내심 여자가 말없이 그냥 나가지 않을까 두렵다. 말을 주워담기엔 이미 늦었고 현실은 정말 그렇게 된다.
남잔 집으로 혼자 뚜벅뚜벅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아씨 그 돈만 내버렸지 맛 더럽게 없네'를 면발을 거세게 빨아들이는 소리에 입힌 뒤, 냄비뚜껑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계속 쳐다볼 것이다. 식당 예약은 잘 못하지만(모르지만) 남자는 자신의 미래만큼은 예약을 잘해왔다.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고 달다.
(*김애란의 <성탄특선>을 읽고 마음속으로 새겨본 반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