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밤길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살아온 길을 듣게 될 때가 있다. 내릴 사람은 다 내린 가운데 "그냥 잘 사는지..."로 시작된 통화 소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데시벨 조절에 잠시 실패해 목소리가 커져버린 상태를 넘어선다. 

2. 보통 취기 가득한 남자들의 몫이긴 하나 오늘은 어느 아주머니가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아주머니 특유의 고소한 하이톤 속에서 구사되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반응으로 보아 통화는 랠리가 제법 긴 저녁 배드민턴과도 같았다.

3. 누군가의 자식은 좋은 회사에 다니고, 누군가의 친척은 결혼을 앞두었고, 누군가라는 그 익명의 당사자는 자신의 근황을 담담하게 "그냥 살지요"로 정리하며 '당당한 평온'을 자랑했다.

4. 엿듣는다는 쾌감에서 아주머니의 통화를 인생 제법 산 이들의 재미로 느끼고 싶진 않았다. 외려 궁금했던 건 왜 저 누구나가 하고 보고 듣고 그러는 저 그저그런 '겪음들' 자체가 흥미롭고 심지어 미간을 찌푸려가며 집중하게 될까라는 태연한 의문 자체가 괜시리 신기했다.

5. 한때 '살다보면'이란 말은 삶을 뻔히 우려낸 관용구인 줄 알았다. 삶을 늘 모험으로 대했고 독특한 서사를 보유하지 않은 사람이 시시해 보이고 얻을 게 없다는 관계론에 도취되었던 시기. 
나이가 들어 사십대 중반이 되면 모험적 서사를 몸소 생산해낼 시기도 지나가면 모험적인 (젊은) 여성의 서사에 기대어 그 에너지를 빨아먹어야겠다는 예비 뱀파이어 선언문도 구상했었던 시기. 

6. 허나 간혹 만나는 이들이 겪고 견뎌나가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대를 불문하고 '살다보면'이란 어찌 되었든 내 지난날들을 영민하게 포장해보려는 엄살이 아님을 느낀다. 모험은 생산도 재구성도 아닌 편평한 지금이었다. 편평함은 탓이 아니라 덕분으로 다가오고 자잘한 말들은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모험적인. "그래 몸조심하고...응 네 편한 시간 잡아보고....응 그래" 고성 섞인 통화가 끝났다.
아주머니의 발목까지 내려간 짧은 스타킹과 허름한 샌들, 손에 꼭 쥐고 있는 종이가방 사이로 미세한 목소리가 끼어드는 것 같았다.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그 아주머니와 함께 이규리 시인의 시집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이규리의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시인은 성실한 심리학적 관찰자로서 '살다보면'의 비밀을 공유한다. 고소하면서도 쓴맛나는 시어는 기름진 체념을 따르지 않는다. 삶을 아련한 사담私談으로 두지 않고 인간의 최선으로 조망하려는 시들의 말미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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