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과가 독해로 이어지는 작품들이 있다. 은희경의 「짐작과는 다른 일들」도 그랬던 것 같다. 제대 뒤 처음 샀던 소설집인 『타인에게 말 걸기』에 수록된 이 작품이 나는 묘하게 끌렸다. 문장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포획한 데서 온 포만감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삶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거야' 하는 자기위로로 문장들을 읽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예는 결국 내가 지금 이 작품을(그리고 이 소설집 전체를) 읽는 게 아니라 '훑고 있었구나'란 직시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10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와 대박' 이나 '쩔어' 같이 취향의 젊고 명쾌한 반응 대신 그래도 나이가 한두살 먹어간다고 뭔가 속이 먹먹해졌다. 작품 속 이 여인의 삶을 알 것 같다는 느낌 앞에 '나두'라는 말을 자연스레 넣는 게 좋다가도 좀 그러했다. 소설은 제목을 충실히 따른다. 어느 한 여성에게 그리고 그 여성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나타난다. 결혼, 이혼, 죽음, 섹스, 아이, 직장. 삶의 한 단계라면 단계인 것들이 너무 빼곡하지 않게 압축적으로 잘 담겨 있다. 


사실 짐작이라는 말 자체가 어느 정도 다가올 일들의 예견을 감지하고 있다. 사람은 그래서 선택을 두려워하고 짐작이란 자신이 좀 더 현명했었을 수도 있었다는 과거의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작을 감추어놓는 건 내 앞에 다가올 삶에 대한 수긍이 출처 없는 행복일지라도 행여나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먹은 마음이 미련이 될지, 현명한 선택이 될지, 오랜 회한이 될지 매번 정하라고 한다. 


작품은 겉과 속의 천지 차이를 대조하며 짐작과는 다른 일들에 대한 충격을 계속해서 주입시키기보단, 이것이 어느새 삶인가라는 체념의 기운으로 조용히 초대한다. 이 작품 안에서 누군가에게 덧씌우고픈 '가면'이란 용어는 짐작과는 다르게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선함과 애씀에 반한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룸이 결국 가면의 확인이었다는 전형적인 서사의 기운을 넘나들며 조금씩 그 기운과 결별하는 이 작품은 누군가를 향한 기대, 누군가를 향한 실망의 경계에서 벗어나 초탈해지려는 사람들이 갖는 세속의 창백한 우울을 풍긴다. 이 우울은 결국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짐작과 가늠의 수준을 넘어서는 유일한 문구인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장자)라는 말의 운명에 가닿아 있다. 


소설을 덮으면서 한때는 짐작이란 것이 주는 예상치와 현실치의 간극, 그 충격에 집착했다면, 이젠 그 충격으로 인해 점점 쌓이는 예비된 짐작의 다발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짐작의 인해전술'은 수많은 말풍선을 만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의 빈번함으로 사람들은 짐작과 같은 일들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삶에서 짐작은 무수히 많은 화살을 쏘아본 다음에 나온 '골드텐'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도, 어려운 스릴러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복잡해하는 한 장면을 이런저런 논리로 정리해 인정받는 것과도 같은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단언은 자기자신이 만들어놓은 짐작의 항목을 자신 있게 입밖으로 꺼내놓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가운데   '어머 웬 일이니?' 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그것 가지고 뭘'로 대변되는 인간을 부러워했던 내가 점점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은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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