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산문을 가끔 읽을 때 매체를 멀리한다는 유형의 서사가 등장해 싱겁다. 가령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이런 고백은 내 엄마 세대의 작가들이 공유하려는 연한 계몽 혹은 삶의 지혜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물론 영민하고 묵묵하게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매체의 유별난 예찬을 글로 표하는 것보단 나을지 모른다. 허나 뭔가 다른 시선을 찾고 싶은 게 독자의 마음. 작가들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벤야민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전화기에 대한 복잡미묘한 생각을 회술했던 정도까진 바라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가 「가정의 행복」에서 수수하게 표해준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어떨까(물론 이 산문은 라디오보단 공무원의 히죽거림에 대한 오사무의 분노가 더 포인트이긴 하지만).
허나 조금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우리가 신기해하던 이 매체들에 대한 서사를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 후손들이 읽었을 때 그만큼의 정감을 얻어갈 수 있을진 의문이 들긴 한다.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류의 헛소리를 미리 예방하는 정도까진 이제 우리가 생활감각으로 익혔겠지만, 여전히 떠도는 언어에 대한 자극을 둘러싸곤 반응이 갈린다. 한 편에서는 특유의 침묵주의가 흐르지만, 이는 뻔한 아포리즘 같다. 다른 한쪽은 영민하게 쓰면 괜찮다고 하지만 뭔가 자기 도취에 머문단 느낌이다.
실은 사회적, 문화적 기억의 문제인데 벤야민이 전화기가 들어왔을 때의 그 일상 속에서 겪은 곤란함과 감탄은 우리가 고수하고 싶었던 사물과 환경의 덕택도 있었을 게다. 고로 우리는 미술관에서 본 유럽의 옛 풍경화에서 느낀 우아함을 하나의 문화적 향수로 공유한 채, 지금은 '쓰이지 않는 단어들' 같은 전화기의 옛 형태를 고스란히 그려본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무덤과 병원에 더 가까이 있을 때쯤(아니 더 걸려야 할까), 지금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같은 서사로 조망하는 글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의 감각은 발전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말들을 모두 기우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의 풍경과는 좀 다른 걸 보고 싶다. 하늘나라에서라도, 가능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