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분명히 밝히는 용어가 아닌, 그러한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 방어에 가까운 용어임을 우리는 이미 실생활에서 느끼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취향을 밝힌다는 것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다. 물론 이는 내가 어떤 영화를, 음악을, 회화를 보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이런 걸 밝힘으로써 누가 날 공격할까?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버린다. 

이번 《문학과사회》 여름호 기획 ' 취향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가'에 참여한 필자들 또한 이런 시선의 바탕 안에서 흥미로운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오늘날 '취존(취향을 존중합니다)'이니 '개취(개인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라는 표현은 곧 진정한 상호 존중이 아닌, 사실은 내가 당신과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소, 라는 단절과 폐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처럼 취향을 밝힌다는 것의 피로감은 별것 아닌 듯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취존과 개취는 곧 취향을 두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기 싫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서동진 선생은 "사악한 윤리적 기회주의"라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취향 없는 취향"(정성일)의 시대를 우려한다. 정성일 선생은 오늘날 취향이라는 말 자체는 취향이라는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시장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취향을 둘러싼 윤리적 풍경에 부정이란 없다. 오직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타인과의 쟁투로 이어지기에 이를 애써 막을 방도는 "좋아요"이다. "그 영화두 좋아요" "그 음악 괜찮죠(각자 다 즐기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사실 가장 점잖은 것 같지만 도발적인 언사를 표하는 글은 이상길 선생의 <취향, 교양, 문화>다. 이상길 선생의 글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이미 부르디외가 될 채비를 갖추고, 이를 잘 써먹는다. 아 이 계급이면 이런 문화를 좋아하지, 아니야 이 계급이라고 해서 이런 문화를 반드시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지? 하는 마인드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상길 선생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러한 사회학주의가 아니다. 사회학자인 그가 보기에 오늘날 문화, 예술을 다루는 관점은 지극히 사회학주의에 치우쳐 있다. '나'가 이러한 문화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외부의 결정적 요인을 자연스레 이어보고자 하는 태도, 이러한 사회학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오늘날 취향-교양-문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을 검토하며 주체의 능력에 주목한다. 그는 언뜻 오늘날 주어진 교양의 일반적 규범(가령, 이런 정도는 읽어줘야지 않겠어?란 말이 따라오는 하나의 문화적 위계라고 한다면)을 습득해가는 사람을 향해 '교양의 몰이해''줏대 없는 시류의 영합과 편승'이란 쪽으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듯하다. 어떤 인문주의와 교양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채, '나'가 자기 배려라는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이 합의해놓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텍스트이긴 한데, 편한 것부터 읽어, 그게 그리 중요한가'라는 태도로 그 합의를 은근히 숨겨놓은 듯한 문화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가. 이상길 선생은 그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쉽진 않겠지만, 이란 말과 함께.  

서동진 선생(<이토록 아둔한 취미를 보라>)은 개취, 취존의 인류학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합의의 풍경을 우려하면서 '합의'의 공동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지향해야 할 공동체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주창하는 이의의 공동체다. 정성일 선생(<21세기 신사숙녀 '反' 매너 가이드>)은 취향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풍토를 걱정하면서 취향이 불안과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영화를 통해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서 영화는 없다. 오직 (취향을 밝힘으로써 나타나는 불안감을 감지한) '나'만 존재할 뿐이다. 

세 필자의 글에서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해보았다. 서동진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인류학/인류학자'라는 표현(이상길 선생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부르디외의 인류학적 접근이 들어간 《구별짓기》의 마인드를 체득한 소비자-시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필자 다 그 용례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미 문화를 소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챙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고로 '나'는 영화를 보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반응과 무의식적인 교류를 챙긴다. 컴컴한 극장과 스크린에서 압도되어진  '집중'(흔히 극장주의자들이 잘 썼던) 대 이 산만하고 할 일 많은 가운데서 여러 개로 발산되는 듯한 가정 내 '분산'이란 구도는 어찌보면 다시 한번 관에 들어가야 한다(많은 영화학자가 밝힌 것처럼).

다른 하나는 아쉬운 점이다. 세 필자 모두 '존취(당신의 존중을 취향합니다)'란 이 비문적 실천을 챙기진 않는다. 존취라는 용법은 아직까진 남녀의 외형적 매력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저런 남자가 잘생겼어요?' '아니 저 여자가 정말 예쁘다구요?' '당신 눈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요?'라는 뜻이 한꺼번에 담긴 이 익살스러운 '존취'는 허나 정작 문화적 취향의 전쟁터인 영화나 음악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존취는 취존이 갖고 있는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더 떠안은 표현일 것일까. '취향 없는 취향'의 시대를 사는 '자신의 자신 없는' 상태를 극도로 방어하기 위한 용법일까. '존취'의 인류학이 궁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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