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한때'라는 때이른 표현을 내걸고 어떤 결혼상이 있었다. 헐리우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자주 나오는 한 장면 같은. 아내에게 연말이고 하니 회사 동료 부부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자는 제안. 정갈한 식탁보, 앤티크한 촛대, 혹시 동료 부부가 사올지 모르는 와인을 따를 와인잔까지. 아내가 손수 요리를 하고 디저트까지 만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에이 시켜서 그냥 접시에 얹자'라고 하는 이해심까지 구상해보았던 터였다.
2. 교회명이 달린 십자가를 문앞에 붙이는 것보단 동료와 그의 아내가 식탁을 꽉 채운 요리를 보고선 '우와 이 많은 요릴 다 하셨어요?'란 진부한 감탄을 연발한 뒤 같이 기도를 하는 장면도 구상에 있었다. 각자 두 손을 모을까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을까 주기도문을 외울까 주기도문이 기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는 굶주린 생명들이...'로 시작하는 기도를 할까도 미리 깔아놓은.
3. 때론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말 시상식을 아내와 보면서 저 배우 혼자 타야 되는데 왜 공동수상이야란 불만을 서로 나누기. 그러다가 당신만 네일아트 하냐 나도 귤로 네일아트 한다며 개그를 치면 '아 짜증나' 하며 아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기도 있었다.
4. 혹은 애써 예약한 연극이었는데 같이 관람한 어린 대학생들의 타이밍 안 맞는 환호에 기분을 잡친 아내의 투덜거림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싸우다 서로 어색하게 대문을 열고 누구든 먼저 '나 먼저 씻을게' 하며 회피하는 것을 겪어보기도 있었다.
5.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와 이 소설에 모티브가 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더 어울릴 듯한 카버의 <깃털들>을 연달아 읽고선 그렇게 '한때의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았다. 그러곤 물었다. 내가 갖고팠던 기분은 뭐였을까.
6. 후덥지근한 날의 연속인데 12월 말이 왔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될 걸 알기에 어르신들이 잘 하는 '아이고 시간 자아알 간다. 이제 몇 달 남았노?'란 말이 음성지원되어 시계와 달력을 재촉했으면 좋겠다. 그리 큰 대박은 아닐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자족하며 버텼다, 보냈다, 지나간다에 박수를 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익명의 초대손님과 실컷 귤을 까 먹으며 티비를 보며 '자들은 멘트 연습 좀 하지. 맨날 상 받으몬 떨린다 열심히 하겠다 그른 말밖에 할 줄 모르노' 하는 돌직구 손님의 말에 다 같이 깔깔 웃어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7. 그러곤 어느 채널이든 잠시 고정시켜놓고 카운트 열부터 뜻을 모아 아홉,여덟, 일곱...잘 가다가 하나 반에 반 하는 장난꾸러기 친구의 소리에 티비와 일치되지 않은 '땡!'을 모두 크게 외치는.
각자가 새해 문자를 보낼 때 카톡 숨김 버튼으로 감추어놓았던 흑역사의 목록을 봉인해제하고 '잘 지내지? 새해 복 많이 받기를..^^' 아니 건조하게 가자. '새해 복 많이 받으렴'의 그늘진 장면들도 덤으로. 그러곤 1이 사라질까 계속 있을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가기 버튼을 누른 채 '야 재미있는 것 좀 틀어봐'라고 말하는 그날의 기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그 기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