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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시대의 어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사실 찾기도 하지만 이는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의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라는 발언이 담긴 인터뷰를 비롯해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런 움직임의 의도가 보이는 서적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기획 작업은 아니다. 최근의 분위기가 갖는 차별점에 대해 '인문적-'이라는 성격 부여를 꼽고 싶지만 이는 그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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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려 마음이 가는 쪽은 '꼰대포비아'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만났다는 것 아닐까 싶다. 꼰대라는 적대적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동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꼰대라고 예상했던 쪽이라면 그 확인 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은 좀 더 클 것이다. 여기에 '늙음'이 주는 잔잔함과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존경이라는 정서는 보다 굳건해진다.

하지만 황현산 이후 시도되었던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그 성공의 여부를 평가하자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정일의 최근 책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을 통해 해석의 열림보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에 더 가닿은 듯하고,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이 책을 만든 자들의 지나친 고개숙임이 페이지 내내 느껴져 부담스럽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 인문학의 기념비적 사유라는 호칭을 두른 건 책 내용을 읽어보건대 김우창의 지난 공로를 생각하더라도 과한 호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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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우리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우리 편이네?' 하는 시선을 주는 흔적의 모음이다. 이 흔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요즘 인기 있는 구호와 잘 맞물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볼지에 대한 고뇌의 영역은 주지 않는다. 속은 시원하지만 이 시원함을 넘어선 찝찝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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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찝찝함의 영역을 고민하게 된 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면서였다. 사이드는 일찍이 말년성lateness을 고민했던 아도르노의 작업을 해부하면서 말년성이 오늘날 사회에 던지는 가치를 모색한다.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조금 소화해보면, 말년성이란 인간이 시간을 통해 맞춰갈 수밖에 없는 신체-정신-건강의 영역이 문학-예술과 결부되었을 때 전자의 영역이 슬그머니 협상하는 인간의 한계에 맞선 '화해불가능'의 예술적 태도를 말한다. 더 나아가 '화해불가능성'이란 사람들이 뻔히 예상하는 처음과 끝이 선명한 통일된 큰 그림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없는 예술 작품 속 단절의 상태를 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를 초월해 뭔가 극도의 숙성된 느낌을 보여주리라 예상된 노령의 솜씨에 "야 이거 내가 한번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격한 반응이 동반된 아마추어리즘이 발표된다면 우리는 이를  그냥 "이 사람 이제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라고 쉬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해석에 탄복하면서 그를 범상치 않은 말년의 사상가로 위치짓고 싶은 건 바로 이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의 해석은 그런 말년성을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을 갖고 이 감각을 곧이곧대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조금 비틀어버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포장해버리는 단계는 말년성의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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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와 아도르노가 주창했던 말년성을 실천했던 이들은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쾌 대신 불쾌를 택했다. 그럼으로써 주변에 머물렀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택한 불쾌의 전략은 오늘날 그들을 계승하려는 후예들이 고스란히 학습해 써먹고 있기에 그들이 마냥 외롭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로 뭔가 움츠렸던 울분의 해소 정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비판의 복잡다단한 결이 윤리의 호소로 환원되었으며, 이런 형식은 기껏해야 온화함 속에 묻어난 단호함 혹은 김구라 같은 직설/독설이란 형식을 빌려 빚어내는 통쾌함의 도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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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더 찝찝한 어른이 보고 싶다. 그가 대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하고 싶은 인문적 아포리즘 따위가 아닌 살면서 부대낀 그 나름의 경험담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골계로 표현되었음도 싶다. 이를 위해선 '꼰대'라는 표현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한 평어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피아를 식별하는 격분의 언어로 전락하진 않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랏 이 정도면 나 이 사람이 준 의외의 면에 감동받아 이 사회 그래도 아직 살만해'라는 정서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근데 이 사람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아 이 이야긴 왜 꺼내? 사람 불편하게'의 정서를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서의 형식성을 고뇌 끝에 이미 내놓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는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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