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도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헨리 나우웬에 의해 널리 퍼진 운디드 힐러. 즉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오늘날 '공감 주파수'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데 자주 동원되곤 한다. 더 정확하게 나아가 공감 주파수에 대한 하나의 요건으로 언급되는 것 같다. B라는 사람이 아파한다. A도 B라는 사람이 아파했던 것으로 '아픈 적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아픈 적이 있다'다. A는 그러한 '상처입음'의 순간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B의 삶에 조언이란 과정 안에서 개입을 하며 A 스스로의 더 큰 상처를 만들어가게 된다.

 

사회적으로 목회자 자녀 출신의 문화계 종사자들-말과 글을 다루는 저자들에게 보여지는 공감과 경청에 대한 강박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굳건해진다는 게 몇 년간 관련자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서 내린 소결론이다.  마음이 여리고 삶의 선택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두려움이 노출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은 상처입은 치유자 유형의 저자들에게 메일, 전화 등 일대일이 될 수 있는 메시지 환경으로  다가가 S.O.S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 저자들은 자신도 편하게 살고 싶다며, 그간 자신이 그들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공격적인 방식으로 풀곤 했다. 물론 이러한 공격성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독자이자 의뢰자에게 드러나선 안 된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가운데, 이 점이 자신의 신앙적 근본을 방해하지 않는 선(물론 독자의 측면에선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어?라는 의문이 들수록 좋은 삶의 어떤 유형을 살아가지만)에서 이뤄지는 말과 글을 통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다가가기'는 내향성의 사회학이 '조력자 콤플렉스'를 주시하는 이유와 이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에 은밀히 내포된 '감정의 헌신'은 상처입은 치유자가 갖는 감정노동의 그늘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늘은 삶에서 자기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활력 있는 언변, 똘끼 있는 그 나름의 경험담으로 나타나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점들이 커지면 상처입은 치유자는 '원치 않은 대변자'의 자리에 자연스레 추대된다. 물론 이러한 추대는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우연/필연적으로 놓인 사람들이 무조건 원한다고  볼 수 없다. 거기서 심리적 에너지의 소비는 커지고 이러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스트레스는 심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놓인 저자들이 대부분 바랐던 점은 '평범성으로의 귀환'이었다. 뭔가 특수한 경험으로 점철된 자기 서사 혹은 타인보다 뛰어난 통각으로 사회적 고통을 매만졌던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나의 '특수한 에피소드'였으며 이제 이러한 특수성은 진저리가 난 상태. 그들에게 삶의 평범함은 외려 더 '특별한' 가치였다. 

어찌 보면 '나도 당신이며, 그들이었다'라는 생각이 담긴 상처입은 치유자의 주요한 지향점은 이 개념이 지향하는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싶은 감정노동의 그늘과 더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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